지금은 작으나 한 때 대규모였던 사찰 '대구달성 용연사'

기본카테고리 | 2017-07-19 오전 9:42:16 | 조회수 : 195 | 공개

한 때 500명이 넘는 승려와, 2백 수십칸이 넘는 사찰규모를 자랑하던 고찰

벚꽃잎 지듯 작아진 절간의 가슴아픈 역사가 있다.
 

대구달성 용연사

그동안 사찰답사가 드물었다. 모처럼 계획한 오늘도 오전엔 비가 내려 오후가 되어서야 가까운 곳인 이곳을 찾았다. 대구 달성 옥포에 오래된 절이지만 지금은 동화사의 말사로 전락한 사찰이 있다. ​가슴아픈 전설이 있어 이 사찰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건 비록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산54-1 (용연사길 260)

적멸보궁으로 유명한 용연사는 비슬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사찰입구에 있는 옥연저수지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용연사라고 이름 붙혔다고 한다.

 

▲ 일주문(비슬산용연사자운문)
 
〈자운문〉이라는 일주문은 기둥너비에 비해 공포의 출목수가 많아 엄청 높게 느껴지는 문이다.  용연사의 입장료는 현재 1,500원을 받고 있으며, 주차는 별도의 요금을 받지 않는다. 일단 이곳에 오면 일주문 앞까지만 차량진입이 가능하므로 여기서는 걸어야 한다. 그러나 70m정도에 사찰이 있어 얼마든지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다.
 
일주문을 지나 70여미터 오르는 길은 소나무 군락이 이룬 그늘길이다. 시원함이 있어 잠시 쉬는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여름곤충의 대명사인 매미의 울음이 풋풋한 공기사이로 전해온다.

 




▲ 좌측, 적멸보궁 영역 통문
 
오르막길의 막다른곳 까지 오면 좌.우로 나뉘게 된다. 좌측은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며, 우측은 〈극락전, 명부전〉으로 가는 길이다.  사실 용연사는 좌측에 있는 적멸보궁(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이 유명한 사찰이다.
 





▲ 우측, 극락전 영역 극락교 

우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용연사로 통하는 극락교가 있고 그 뒷편으로 용연사의 전경이 보인다.  천왕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올라갈 수 없도록 만든 오른쪽의 계단난간은 아래의 계단부가 부셔저서 윗부분의 통로를 막은것으로 언뜻 보면 이상하게 보인다. 극락교이라는 석교는 167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당시 500명이 넘는 승려와, 2백 수십칸이 넘는 사찰규모를 자랑하던 곳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사찰에 관한 일이 있으면 항상 앞장서서 움직이는 용연사의 승려가 있었으며, 그들 승려로 인해 많은 승려가 운집된 사찰이기도 했다. 

용연사는 914년(신라 신덕왕 3) 보양이 창건하였으며 그뒤 고려시대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419년(조선 세종 1) 천일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탔고, 1603년(선조 36) 인잠·탄옥·경천 등이 사명대사 유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범종각을 지었으나 1650년(효종 1) 다시 법당과 요사채 등이 모두 불에 탔다. 1653년에는 홍묵이 대웅전을 지었고 승안이 명부전을 건립하였다.  1655년 희감과 홍묵이 함허당과 관정료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청진이 관음전을 지었다. 1658년에는 도행이 명월당을, 이듬해에는 학신이 향로전을, 1660년(현종 1)에는 일순이 약사전을 차례로 건립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대웅전과 종각을 수리하였으며,  그 후 다시 한번 소실되어 현재는 명부전, 삼성각을 비롯, 1728년에 세운 극락전과 적멸보궁 석조계단, 안양루 등의 전각이 전해진다.





▲ 천왕문

사천왕의 그림이 조금 어두운 느낌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오래되어 밝은 빛을 조금 잃은듯 하다.  좌.우의 난간에는 수 많은 소원띠가 걸려 있어 내부가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으로 된 건물로 화려한 단청이 더욱 돋보이는 건물이다.





 

 


▲ 공양간(새로지은 요사)

 
근대에 들어 지은것으로 보이는 공양간이다. 2층은 강당으로 사용되는 요사로 면적은 넓은편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1층은 콘크리트구조의 슬래브건물이고, 그 위에 2층의 목조강당을 올린것이다.




▲ 안양루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의 경내로 오르는 중간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보광루'였으며 적멸보궁의 누각을 지으면서 보광루라는 명칭을 넘기고 안양루라고 바꾼것이라고 한다.  안양루의 1층부분은 불교용품 매점으로 이용돠고 2층의 누각은 종루를 겸하고 있다.
 





안양루 매점에 걸린 의미 깊은 문장.
 




▲ 극락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
 
안양루를 지나면 바로 근락전이 나타난다.  용연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어 이 극락전을 본당으로 모시고 있다. 극락전 안의 석가 삼존불은 조선후기 영조 4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 맛배지붕의 다포식 공포를 한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얼핏 보아서는 고풍을 느낄 수 없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후불탱화, 삼장탱화, 단청과 벽화 등에 모두 세월의 무게가 차분히 서렸다.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삼존좌상은 본존인 아미타불, 좌협시인 관음보살, 우협시인 대세지보살로 되어 있다. 재질은 나무이며 표면에 금을 입혔다. 불상의 높이는 156cm, 광음보살이 138cm, 대세지보살이 143cm이다.  이 삼존불은 1655년 수화승 도우가 주도하고 다른 조각승들이 도와 만들었다. 도우는 대구 운흥사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경북 칠곡 송림사의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석조아미타여래산존좌상을 제작한 인물로서 17세기에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조각승이다.
 

후불탱화는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빈궁 조씨를 비롯한 몇몇의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씨는 나이 열셋 되던 1727년에 아홉 살 난 효장세자의 세자빈이 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사별했다. 그러니까 세자의 3년상을 끝내고 그의 천도를 위해 이 영산탱을 시주했던 모양이다. 평범한 여인으로 치자면 아리고 기막힌 사연이겠으나 아무튼 이러한 왕실의 뒷받침으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 솜씨도 남달라 청록의 고운 색감, 양 보살의 투명한 두광 표현, 다양한 표정의 섬세한 얼굴 모습 그리고 다채로운 의복 표현 등이 짜임새 있게 자리잡은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 종무소(극락전 우측)




▲ 요사(극락전 좌측)





▲ 용연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극락전 전면의 마당중앙에 있는 오래된 삼층석탑이다.  높이 3.2m로 이중기단과 탑신과 옥개를 각각 하나의 돌로 세웠다. 화강암재료로 아래기단은 보수한 흔적이 있다. 바닥돌에 바로 2단의 괴임을 했으며, 위 기단석은 4매로 구성,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의 조각이 느러냈다. 갑석에는 보연과 2단의 괴임이,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이, 옥개석에는 4단 받침과 2단의 괴임이 조각되어 드러나 있다.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는 면이 짧고 기단의 폭이 짧아 신라탑의 기본형에서 많이 벗어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용연사에서 가장 오래 된 유물이지만 크기가 2m 남짓에 세장하여 극락전이나 다른 건물들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 영산전 

 
극락전의 오른편에 위치한 영산전.
 




▲ 삼성각





▲ 불이문 

명부전이 있는 영역은 또 다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각 앞의 요사를 돌아 불이문을 통해야 한다.




▲ 청운교

명부전 앞의 작은 계곡에 놓여진 석교로 2m가 조금 넘는 폭의 5m정도의 길이이다.






▲ 명부전

명부전영역은 두개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공개된 명부전과 출입이 금지된 사명당 공간이다.





▲ 홍재문 

명부전의 우측 윗쪽에 자리한 사명당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이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열려있는 대문으로 고개만 내 밀어 사진만 찍었다.
 




▲ 사명당 





▲ 적멸보궁 가는 길(천왕문 맞은편)
 
다시 초입의 막다른 도로의 끝부분 안내판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면 왼쪽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막돌로 층을 만들어 평탄한 황토계단형 2.5m폭의 도로로 조금만 올라 가 우측 모퉁이을 돌면 적멸보궁이 나온다.
 




▲ 보광루 

금강계단이 있는 적멸보궁으로 들어서는 입구의 누각으로 누문이 있는 1층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며, 2층은 넓은 강당으로 되어 있다.
 




보광루의 북측면은 적멸보궁쪽으로 향해 있는 모든 창들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이곳에서도 금강계단을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적멸보궁 

적멸보궁 법당은 여느 보궁의 그것처럼 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뒷벽을 틔워 사리탑에 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내부를 꾸몄다. 법당에서 한 단 높은 곳에 석조계단이 있다.  치악산 각림사에서 통도사로 옮겨온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일부가 있는 금강계단을 볼 수 있도록 북측의 벽은 대부분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으며 기도를 올리기 위해 적멸보궁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내부에는 금강계단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금강계단 

적멸보궁 뒷편에 있는 석조계단. 지금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줌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을수 밖에 없었다.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것이기에 엄격히 관리하고 있는듯 하다.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옯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인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사천왕상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팔부신상을 돌에 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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