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만의 공업탑 정비, '이렇게 할 것이었다면...' (조선일보 서창원 칼럼)

울산문화 칼럼 | 2015-12-09 오후 9:14:50 | 조회수 : 1571 | 공개

  
        44년 만의 공업탑 정비, '이렇게 할 것이었다면...'

 

 

   조형미술을 공부한 필자는 1970년대 초 울산에 왔고, 공업탑로터리 근처에 살면서 공업탑을 설계한 작가에 대해 늘 궁금했다. 공업탑 그 어디에도 작가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십수년 전 우연히 '6·25' 때 월남한 조각가 박칠성 선생이 최초 설계자란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그에 대한 커다란 존경심을 품어왔다. 1967년 당시 30대의 젊은 작가가 울산시에 공업기념탑 건립을 먼저 제안하고 직접 설계까지 맡았던 순수한 창작 열정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공업기념탑은 건립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단순한 기념 조형물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어 세계적인 산업도시로 발돋움한 울산의 눈부신 발전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울산시는 지난 17일 그 공업탑 정비공사를 완공했다. 어설펐던 공업탑 주위 분수대를 없애고 낡고 닳은 시설물들을 건립 당시의 모습으로 보수·복원했다. 예산 부족으로 하얀 시멘트로 만들었던 여신상을 청동상으로 바꾸고 녹색으로 덧칠했던 건설의 역군상(남성군상)도 제 빛깔을 되찾았다. 낡은 철제 공업탑 지구본과 칙칙하던 공업탑 기단부도 말끔히 새로 단장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각종 비문과 시멘트 여신상, 철제 지구본이 그 소중한 역사를 간직한 채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박물관에 영구 소장되는 것도 뜻깊다.

   그러나 이번 공업탑 정비공사를 관심있게 지켜보아 온 한 시민으로서 진한 아쉬움이 남아 몇 가지 사실을 꼭 기록해두고자 한다. 우선 울산시의 짧은 안목이 아쉽다. 기왕에 공업탑을 복원하려면 적어도 정비공사라는 맹숭한 용어와 작업에 그칠 게 아니라 공업도시 울산의 반세기 역사를 마감하고 회고하면서 새로운 100년을 염원하는 범시민적 문화행사로 차원을 한층 더 높였어야 했다. 공업기념탑은 이제 단순한 도시 랜드마크가 아니라 울산 발전 백년대계를 가늠하는 성소(聖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초 설계자이며 이번 복원사업을 맡았던 작가의 안이한 태도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공업탑을 건립할 당시였던 1960년대 울산은 본격적인 공업화 이전의 반농반어촌이어서 살림살이가 궁핍했다. 때문에 당시 작가의 열의에 찬 창작 의지를 온전하게 뒷받침해주기 어려웠을 것은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그랬던 만큼 이번 기회는 당시 구현하지 못했던 작가의 숙원을 풀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런 치열한 작가정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 중 몇 가지만 지적해보겠다. 공업기념탑 표지석은 무성의하게 석재 조각을 이어 붙였다가 지역 여론의 질타를 받고서야 황급히 교체했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축문(祝文)이어야 할 '공업센타 지정 취지문'은 띄어쓰기 등 맞춤법이 틀린 상태 그대로 복제해 붙여 놓았다. 이는 최초 건립 당시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잡아 고쳐야 하는 복원의 참뜻과도 맞지 않다. 또한 당초 복원 조감도에 없던 커다란 철제 컨트롤 박스를 주탑과 청동상 사이에 끼워 넣어 전체적인 미관을 해치고 있다. 이 때문에 산업축제 시 탑돌이 행사도 못할 형국이다. 그외 다른 문제들도 곳곳에서 보인다. 작가가 조금만 성의있게 살폈으면 충분히 개선됐을 문제들을 별다른 고민없이 그대로 방임하고 말았다.

   공업탑은 한때 도심 교통 소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철거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것을 지켜낸 것은 열화와 같은 울산시민의 관심과 애정이었다. 울산시는 박 선생을 명예시민으로 선정해 물심으로 세심한 예우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자세는 그같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창작의 관점에서 공업탑의 저작권(著作權)은 작가에게 있다고 보겠지만 지난 44년간 한결같은 사랑으로 공업탑에 대한 의미를 드높이고 지켜 온 것은 울산시민이다. 그래서 친권(親權)은 오히려 울산시민에게 있다고 봐야 옳다. 작가가 공업탑에 대한 시민의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소홀한 복원에 그치진 않았으리라.


   서 창 원 울산지역홍보연구소장

   ( 조선일보 2011. 1.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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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비중인 공업기념탑 탑신, 지난 44년 세월의 무게를 잠시 잊은듯 지구본도 비워져 있습니다.공업탑을 등지고 서 있던 시멘트 자유의 여신, 석상의 기단부에서 내려져 탑신을 향해 섰습니다.

울산 공업탑 재정비를 하면서 작가는 동판을 쓰지 않고 철재 지구본을 만들었다는 논란에 휘말려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창작자의 사명감이 배제된 조형미술품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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