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을 어찌할건가
서 창 원 / 울산암각화조형연구소 소장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는 1999년 1월 23일 KBS1 TV 역사스페셜 ‘3000년 전의 고래사냥, 울주 암각화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각화 자료라고는 거의 접해 보지도 못한 터라 그 프로그램이 암각화 갈증 해소에 얼마나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역사스페셜이 내건 ‘우리 역사의 대중화‘라는 목표가 적중했던 것일까. 그 후 십여 년이 지난 반구대암각화와 고래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며 울산의 문화코드로 부동의 위치를 굳혔다.
지난 25일 저녁, 역사스페셜 ‘귀신 쫓는 사나이, 처용은 누구인가’가 한 시간 동안 방영되었다. 암각화 다음으로 비중 있는 지역 문화코드를 조명한 것인데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현장취재와 심층 분석, 관련 전문학자의 말을 인용,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시각에서 다루려는 제작진의 노력이 돋보였다.
방영된 내용의 대강은 이러하다. 처용은 울산 출신 인재로서 신라왕에게 발탁되어 서울 경주에서 왕정을 보좌하던 중, 자신의 아내가 역병을 앓게 되자 슬기로운 처신으로 역병을 물리치게 되었다. 그 시대 국가적 재난인 천연두를 퇴치하는 신묘한 능력자로 주목받게 되어 재앙을 물리치는 상징인 처용신(神)으로서 오늘날까지 우리 민속과 국토의 현장 속에 면면히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설화가 실제 일어난 사건의 기록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당대의 국가적 위기에서 울산인 가운데 누군가가 영웅적인 활약을 했다는 정황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처용이 아내의 역병을 치유한건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역병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민심수습 차원의 정치적 판단으로 처용의 능력을 부각시켰을 수도 있다. 처용을 보거나 처용얼굴을 그린 부적을 붙이면 역병이 물러난다는 일종의 심리요법인 위약(僞藥)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처용을 바라보는 외부의 정돈된 시각은 이와 같이 긍정적인데 비해 처용의 고향인 울산에서 ‘처용’은 엉거주춤한 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매년 처용 문화제가 열릴 즈음이면 처용을 두고 찬, 반으로 갈린 말들이 쏟아진다.
‘다리가 넷이라’는 처용가 몇 구절의 선정성을 보더라도 처용은 울산의 대표 문화코드가 될 수 없다는 반대쪽의 편협성도 지적된다. 그러나 처용의 고장이라면서도 처용에 관한 모든 것을 체감하고 한데 담아둘 변변한 ’처용문화공간’도 갖추지 못한 채, 처용 문화제 연례행사 한가지로 수십 년을 버텨왔으니 비판의 목소리도 근거가 있어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처용 문화의 정착이 먼저 장소성의 확립에 있다는 말이 옳다면 개운포 처용암 또는 처용리 일대 해안경관을 보라. 공단부지로 매립이 되어있고 주변경관은 쓰레기더미로 말할 것도 없다. 처용설화가 서려 있어야 할 주변을 살피더라도 울산에서 처용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처용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 처용 문화제에 담길 몇 개의 프로그램 구상이 중요한 게 아니듯, 지역적 가치와 인식의 공유마저 건너뛴 채 함부로 처용뮤지컬 또는 처용뮤직페스티벌이다 하여 이름만 빌려 어지럽혀 놓았던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처용 문화 정책의 우선순위, 처용의 기본 틀을 살피자. 우리 울산이 언제까지 우물 안에 갇혀 각자 자신의 편견과 주관만 내세울 건가. 엊그제 역사스페셜 ‘……처용은 누구인가’ 와 같이, 갑자기 외부에서 벼락처럼 떨구어준 객관적 ‘처용’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 2009. 7. 28. 울산 제일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