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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 작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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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오전 4:27:25
| 조회수 :
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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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김중업 金重業 [1922.3.9~1988.5.11]
출 생 지 : 평양
주요수상 :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서울시문화상,
산업훈장 등
주요저서 : 《김중업-건축가의 빛과 그림자》
주요작품 : 《서강대학 본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본관》 《삼일로 빌딩》 《육군박물관》 등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공업고교 건축과 졸업,
8·15광복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로 있었음.
1952년 한국건축가로는 처음 유럽에 진출하여 프랑스의 르꼬르뷔지에 건축연구소에서 4년간 수업.
1956년 홍익대학교 교수, 김중업 합동건축연구소장이 됨.
1956-1965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약.
1971-1978 프랑스 파리 및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활동.
1972년 파리건축대학원 졸업,1971-1975년에는 프랑스 문화부 고문건축가로 활동.
1976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 교수와 하버드 객원교수로 있었음.
그는 소년시절, 그 당시 군수로 계시던 가친의 임지를 따라 평남 강동군, 성천군 등 대동강 강류의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랐다. 건축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건축관은 아마도 어렸을 때 느꼈던 자연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가 교수시절 디자인 이론 강의에서 줄곧 강조해왔던 것들 것 있다. 자연에 대해 눈을 떠라, 자연을 사랑하고 깊이 관찰하고 사색하라, 자연은 디자인의 스승이며 자연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등등. 그는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가의 자세는 어떤 것인가를 갈파하는 혁명지도가 같은 타입의 교수였다.
그의 저서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에서 밝혔듯이 초기에는 충만한 정력에 비해 창조적 능력이 부족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명보극장> <부산대학 본관> <건국대 도서관> <서강대학 본관> 등이 있는데 그가 스스로 고백했듯이 르 꼬르뷔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곧 그의 재능이 발휘되는데 바로 프랑스 대사관이다. 김중업 선생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대부분 이 건물을 들 것이고 나 또한 답사건물로 정하게 된 작품 중 하나이다.
프랑스 대사관은 아현동고개 그리 넓지 않은 언덕진 대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대사관 과 관저의 콘크리트 지붕으로 특별한 기능은 없지만 매우 상직적인 조형으로 어쩔수 없는 우리나라의 고전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 고전을 한마디로 말하면 “지붕의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그 특성을 현대감각으로 잘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김중업 선생의 초기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뼈대는 고전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작품집을 통해 건축가는 모름지기 어제도 내일도 아닌 자기가 살고 있는 오늘을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 하고있다. 불국사는 매우 아름답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라시대의 아름다움으로 현대에 어울리는 건축은 아니다. 옛날 불국사에 버금가는 현대의 고전을 작품으로 빚어내는 것만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스승 르 꼬르뷔제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의 개성을 찾기 위한 영역으로 한국적인 것을 창조하는 길인 것을 깨우친 결과가 바로 프랑스 대사관이다. 그 이후, 제주대학본관, 서상부인과의원, 부산유엔묘지정문, 주한 이태리대사관, 진해 해군공관 등으로 그의 창작의욕이 이어졌다.
유엔 묘지정문은 처마,지붕,기둥의 디테일이 우리나라 고전을 자유분방하게 재구성했다. 건축은 표정이어야 하고 노래 불러야 한다는 그의 건축관이 이 자그마한 대문에 그대로 나타나있다.
콘크리트로 빚어낸 작품의 으뜸은 제주대학본관이다. 잠수함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작품이다. 평면에서 보듯이 건물은 쭉 뻗은 사각형인데 이화 대조가 되는 램프가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땅을 가른다. 대지 가득히 사방으로 뻗어있다. 그는 건축은 한쪽으로만 길게 뻗을게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대지와 안정감 있게 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한 것이다. 건축은 자연과 동화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김중업 선생이 이 건물의 미미지로 떠올랐던 것은 제주도라는 섬에서 느끼는 남국다운 낭만이 풍기는 조형이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 창작의 불길을 태운 후기작품엔 <육군박물관> <평화의 문> <백화점 태양의 집> <군산문화회관>등이 있다.
김중업 선생은 작품마다 각각 개성이 다른 것을 꾸밀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그 예로 육군박물관을 들수 있다. 원형의 전시장과 직방체의 부속건물로 두 조형이 만나서 꾸미는 매우 힘차고 단순한 건물이다원형의 전시장부분은 2층에 있고 1층은 피로티로 되어있다. 공중에 뜬 원형의 닫혀진 공간에 대조를 이루면서 직방체의 관리동이 차분하게 피로티로 이어진다.
그의 건축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식이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역사의식을 가져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앞날을 창조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아름다움에 대한동경, 고전에 대한 애착, 뛰어난 비례감각, 조화에 대한 예리한 감성, 예술 전반에 대한 깊은 식견으로 하여 그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전통의 계승이란 결코 기와지붕을 세우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외국건축 사조의 영향
김중업이 파리의 르꼬르뷔제의 사무소에서 머물면서 익힌 것들은 한국건축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크게 세가지 의미로 볼 수가 있는데 첫째, 이전까지 식민지와 내전으로 인해 세계 현대건축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한국건축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출발을 의미한다. 둘째, 그 동안 일본을 통해 심어진 근대건축이 이 때부터 서구로부터 수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게 되었다. 셋째, 이 기간은 김중업이 귀국 후 펼친 작품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실 김중업에 대한 르꼬르뷔제의 영향은 건축을 제외하고도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서부터 생활방식과 아뜰리에의 운영과 같은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그가 수첩에 모든 것을 기록하고 스케치 하는 것 또한 르꼬르뷔제의 영향이다.
우선 건축문법적으로 볼 때, 김중업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바로 병치적이고 평면적인 조형 구성방법이다. 각 건축요소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병치시키는 방법은 르꼬르뷔제의 후기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상반되는 건축요소들을 조합하는 수단으로 병치를 사용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각 구성요소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로 분리되도록 하였다. 바로 이런 점이 김중업에게 큰 영향을 끼친 점이다. 초기작품부터 1980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보여지는 점이다. 앞서 서술한 육군박물관과 같이 원형과 직방체를 자유분방하게 병치하는 방법을 자주 볼 수 있다.
김중업은 파리 체류시 르꼬르뷔제의 많은 건축요소들에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지붕의 조형적 의미, 평면과 입면에서의 건축언어, 모듈러에 의한 입면과 단면의 분할, 브리즈-솔레이유의 기능 및 조형적 역할, 피로티에 의한 지상층과 상부의 분할에 관한 것들이 있다. 가령 지붕이 가지는 조형적 의미는 잘 장착되어, 한국현대건축에 중요한 언어로 자리잡았고 반면 한국인 체형에 잘 맞지 않는 모듈러나 토지 사용에 문제점을 일으키는 피로티는 1950년대 말까지 사용되다가 폐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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