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處容)과 처용무(處容舞)가 뜻하는 것 (울산문예 서창원 칼럼)

처용 칼럼 | 2015-12-03 오후 8:32:06 | 조회수 : 6004 | 공개

              처용(處容)과 처용무(處容舞)가 뜻하는 것
 

                                                    서 창 원 지역홍보연구소장
 

 

처용의 고향은 울산이다. 개운포 처용암에서 나타난 동해용왕의 아들,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조 내용과 현존하는 처용 관련 유적이 있기에, 처용이 그 후 왕정보좌를 위해 서라벌 경주서 정사를 돌보며 벌어졌던 처용가의 배경이 울산이 아니라 하더라도 울산은 처용의 도시다.


처용의 주무대가 서라벌 경주이나 고향과 출신지를 따지려드는 우리네 뿌리의식이 그러하고 오늘날 경주가 처용을 굳이 자기네들의 것이라고 우기지 않는 마당에서도 울산 스스로가 처용에 대한 인식을 단색 단형으로 몰아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히여 사람들은 처용(處容)을 일컫어 '처변하여 달라지는 얼굴' 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처용에게도 처용을 처용 답게 하는 아이덴티티가 있으나 그 또한 천 수백년 동안의 시대적 변화를 모른척 하고서야 생성될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처용가 몇 구절에 처용의 모든것을 가두어 두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다.


처용의 기예가 주로 가무(歌舞)였던 대목이 특히 강조되는 것은 처용가의 극적 순간에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기 위해 춤을 추었다는데 있다. 처용이 아내의 열병을 고치기 위한 주술적 의식무에서 출발한 처용무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은, 이러한 벽사(癖邪)의 민간신앙에서 출발한 처용무가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처용무의 생성 이전인 신라시대에는 원시 귀면의 무서운 탈을 쓰고 춤을 추어 춤사위 도한 벽사의 본성을 가졌던 것이 당대의 특권신인 용신(龍神)과 결합하여 변천한 일인무(一人舞)로 보고 있으며, 그 후 고려시대에는 처용탈이 인자한 노인의 얼굴인 옹면형(翁面形)으로 바뀌었고, 두사람이 추는 쌍처용무가 되었다가 고려의 안정기에는 궁중 무용인 옹면 처용무로 정착되었다.


이와같이 쌍처용무로 바뀐 처용무는 고려의 연등회와 팔관회, 나례 등 국가 중요행사 중에 추어졌는데 조선조로 내려오면서 처용무는 일대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조선 초기에 궁중악제의 정리를 마무리하여 만든 악학궤범에서 보여주는 오방처용무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처용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처용의 모습만 처용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조선시대 지도 이념인 성리학의 미의식에 맞추어 바꾼 것이다.

 

오방(五方)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맞닿아 있는 우주 자연의 동서남북 사방과 가운데에서 중심을 이루는 인간의 모습과 정도(正道)로 나아가려는 중용(中庸)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오방처용무는 이 후 학춤과 연화대춤과 합쳐져 복합적인 구조의 합설무로 발전하는데 바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說)이 그것이다.


이 춤은 처용무가 처음과 마지막에 추어지고 그 가운데에 학,연화대무가 끼어든 구조인데 어디까지나 처용무가 중심무로 자리잡고 학춤과 연화대무가 들어가 수용되며 극적인 구조를 이루는 극무(劇舞)형식이 처용무 합설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처용무는 처음에는 혼자서 추는 일인무에서 이인무로 바뀌었고 그것이 다시 오인무로, 여기에 학춤과 연화대무가 합설하여 처용무의 질적 변화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처용무의 원리는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으며 영원히 이어지는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와 합치되고 있어 처용무의 변모과정은 우주 대자연의 순환적 변화과정이 그대로 춤으로 상징화 되고 체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용무는 의식(儀式)을 행하는 춤이면서 모두가 기뻐서 추는 공동체적인 해방감이 깃든 신명(神明)의 춤이다. 처용무를 통해 본 처용은 부단히 자신의 틀을 깨고 열린세계로 나아가는 행동형 인간의 본보기 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외부의 영향을 받되 부단히 자기화(自己化)하여 받아 들일줄 알며 중심을 지키되 줏대를 바로 세울 줄 아는 처용의 본질이야말로 이 시대에도 바람직한 변혁적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울산의 작은 포구인 개운포에서 태어난 처용이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중앙의 궁중무에서 관용과 화합의 상징으로 다시 고향으로 회귀하고 있음은 처용무의 구조적인 윤회(輪回)의 본성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러한 처용의 본질을 가치있게 현재화하여 보다 분명한 지역의 문화 상징 요소로 정착 시키는 일은 울산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아 있다.

 

(2000. 12., 울산문예 창간호)

 

 

아래 사진은 북한이 만든 이조 복식도감의 처용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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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사연도(부분)의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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