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신라 명기 전화앵'이 누군가 ( 조선일보 서창원 칼럼)

울산문화 칼럼 | 2015-12-09 오후 9:23:38 | 조회수 : 2559 | 공개



                    도대체 '신라 명기 전화앵'이 누군가

 

 울산 문화계 일각에서 ‘전화앵’이라는 옛 여인을 성스럽게 치장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그들은 이 여인이 신라말의 명기(名妓;이름난 기생)로서 국운이 기우는 가운데서도 고려에 귀부(歸附)하지 않은 채 신라에 대한 충절을 끝끝내 지켜낸 기개가 아름답다며 칭송한다. 10여년전부터 해마다 ‘신라 명기 전화앵’ 추모제를 갖더니 최근엔 묘역(墓域) 성역화추진단체까지 결성했다. 여기에 지역 언론들까지 가세해 이 단체의 활동과 이 여인의 행적을 미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전화앵 묘역성역화추진단체는 급기야 울산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의 어느 이름모를 묘가 전화앵의 묘로 확실시 된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최근 이 묘역 일대가 활천농공단지 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되자 묘역을 보존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각계에 동분서주 호소하고 있다. 지역 언론들까지 덩달아 여론 만들기에 나서자 결국 울산시도 이 작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용역을 맡은 울산발전연구원이 ‘전화앵의 묘’라고 주장되는 ‘어느 이름모를 묘’에 대한 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엊그제 울산발전연구원의 시굴조사 중간보고가 있었다. 울산발전연구원은 이 묘가 도굴된 흔적이 있는 7세기 말 신라시대 묘라는 것 외에 ‘전화앵의 묘라고 볼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덧붙여 전화앵의 묘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단서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얘기인 즉 ‘누구 묘인지 전혀 알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도대체 전화앵이란 여인에 대한 이같은 추모와 연구, 보존 열기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의아하다. 상당수 주변 인사들 또한 어떤 근거로 묘역 성역화 소동까지 벌이는지 황당해하고 있다.
전화앵이란 여인에 관한 역사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화앵의 묘가 있는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다’는 것이 유일하다. 다음으로는 육당 최남선이 쓴 경주읍지 '동경통지(東京通志·1933)에 ‘전화앵은 고려명기(高麗名妓)'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기록에 근거하면 전화앵은 신라가 아닌 고려의 이름난 기생이다.


   그런데도 소위 ‘신라 명기 전화앵’로 둔갑해 묘역성역화 주장까지 나오게 된 건 왜일까. 그간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야기의 발단과 확산 과정은 이러하다. 1996년 울산 KBS의 이양훈 팀장이 활천리 일대 촌로들로부터 예부터 유명한 기생의 묘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거리를 측정해보니 경주성을 기준으로 성벽에서 30리 거리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열박령과 일치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활천리의 이름모를 묘가 전화앵의 묘인 것처럼 사실상 굳어지게 됐다.


   여기에 사학자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의해 전화앵이 만고 충절의 기개를 떨친 신라의 명기로 덧입혀졌다. 이 교수는 자신이 쓴 ‘창기와 명기의 애환(1988)’이란 책에서 신라가 패망하자 고관대신들이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기 위해 개경으로 옮겨가면서 그들이 즐겨 찾아 아끼던 기생 전화앵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전화앵은 되레 ‘대감들이나 가서 잘 사시오. 나는 여기서 영원히 신라를 지키겠소’라며 크게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 이야기를 경주 일대 촌로들로부터 채록한 것이라고 밝혀놓았을 뿐, 근거가 될 역사기록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역사 기록에는 전화앵은 고려의 명기였고 그녀의 묘는 열박령에 있다는 것이지만, 어느날부터 느닷없이 신라말 충절지사로 둔갑해 성역화 대상으로 각색돼 버린 것이다. 추가적인 역사 기록 등에 의해 그같은 둔갑의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화앵 위인 만들기’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또 울산의 역사 문화계가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지경이 되는 것인가.

 
서 창 원  지역홍보연구소 소장


 ( 조선일보 2009. 12.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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