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창경궁

서울의 삶터 | 2011-12-29 오후 6:26:56 | 조회수 : 2418 | 공개

『어떻게 사모를 쓰고 검은 신을 신었는지 기억이 없다. 인몽은 정신없이 애련지를 돌아 기오헌, 금마루, 제월광풍관으로 치달았다. 제월광풍관 앞에서 규장각 내각으로 쓰이는 주합루(宙合樓)를 올려다보았을 때 인몽은 뭔가 섬찟한 것을 느꼈다. 아침 햇살이 막 주합루를 비추어 가로 세로 섬세하게 칸칸을 나누고 색색으로 물들인 주합루의 단청이 여느 날 같지 않았다.』

이것은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년전 한양의 왕궁 내에서 살아 움직이던 사람의 모습을 대하니 무척 신기하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古宮은 박제된 동물과도 같이 생명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궁에 가보면 모든 것이 잘 정돈된 채로 시간이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인다. 사람이 사는, 아니 살았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궁궐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젊은 충신 하나가 급한 일을 당해 버선발로 궁궐 내를 내닫기도 하고, 임금님이 달빛 환히 비치는 밤 궁녀들과 함께 연못가를 거닐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궁궐 내에 많은 내관들이 이리저리 종종 걸음을 치고 다녔을 터인데, 지금은 건물과 마당은 그대로 남아있으되 옛 사람들은 간 곳이 없다. 그 대신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고궁을 찾은「구경꾼」이 되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지난 500년 간의 조선왕조에 모두 5개의 궁이 한양에 세워졌다. 주궁(主宮)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들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 지난 100년의 근대 격변기에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지 않은 곳이 없으나, 그 중 가장 극적인 변신을 한 곳은 창경궁(昌慶宮)이다.

昌慶宮은 원래 수강궁(壽康宮)이라하여, 1418년 세종대왕이 上王인 태종을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지은 궁이었다. 그 후 1484년 성종이 명정전(明政殿), 문정전(文政殿), 통명전(通明殿) 등 궁궐을 크게 짓고 창경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그 후 16세기 말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또 19세기 초에 큰 화재가 있었고 그 때마다 바로 복구되어 궁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자마자 결정적인 수모를 당하게 된다. 1911년 일제는 창경궁에 동식물원과 박물관을 설치하고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그 이름을 창경원이라 고쳐 조선왕조의 품격을 땅에 떨어트리고 만다. 지엄하던 나랏님의 거처가 누구나가 놀러가는 유원지로, 그것도 동물들을 모아놓은 냄새(?)나는 곳으로 그 격이 추락한 것이다.

그 후로 70년 동안 창경원은 서울시민의 놀이터로 쓰이게 된다. 동물구경은 물론이요, 봄철의 밤벗꽃놀이로도 유명한 곳이 바로 이 창경원이었다. 그래서 나이 든 독자들은 아직도 창경궁보다는 창경원이라는 말이 더 귀에 익을 것이요,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구경 온 사람들로 득실대던 창경원의 모습을 눈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창경궁은 옛 모습을 다시 찾기 시작한다. 정부가 궁내에 있던 동식물원을 과천 신도시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고증을 거쳐 원래의 창경궁을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1986년, 3년의 공사 끝에 창경원은 다시 창경궁으로 문을 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동물원과 각종 놀이시설, 벗꽃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지난 100년간 사라져갔던 궁궐 건물이 몇채 다시 들어섰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보니 이 창경궁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즐겨찾는 경복궁,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덕수궁, 한국의 전통 정원이 그대로 보존된 비원과 창덕궁 등은 벌써 몇십년 동안 나름대로의 특색을 갖춘 고궁으로 남아있었던 반면, 동물원과 밤벗꽃놀이로 알려졌던 창경궁은 이제 아무런 성격을 지니지 못한채 일반 대중에게서 외면당했던 것이다.

결국 창경궁은 그야말로 시간이 멈춘, 박제된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이곳을 정말로 아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찾아와 지나간 역사의 흔적과 교훈을 조용한 분위기에서 한가로이 더듬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창경궁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은 조선왕궁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의 장엄함도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의 우아함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이들 남향 건물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고 있는 이 명정전(明政殿)은 그야말로 아침 햇살과도 같이「밝은(明) 정치」를 펴나가기를 원했던 선인(先人)들의 이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 옆에는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지난 30년의 군사정권이 끝이나고 문민시대가 열린 오늘날 이 문정전의 「文」자가 주는 감회가 새삼스럽다.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건물들 현판(懸板)들을 살펴보면 옛 사람들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어 좋다. 경복궁의근정전(勤政殿)에서는「부지런한(勤) 정치」가 선인들의 목표였음을 알 수 있고, 사정전(思政殿)에서는 나라의 앞날과 백성의 풍요로움을 위한 「정치를 생각하느라(思)」 낮을 보내고 밤을 새우던 임금님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뿐이랴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에서는 「어진(仁) 정치」라는 덕목이 들어나고 있지 않은가. 건물 이름뿐 아니라 궁궐 이름에서도 우리는 선인들의 멋을 찾아볼 수 있다. 창경궁(昌慶宮)이라는 이름은 기쁨(慶)이 창성(昌)하는 궁을 뜻하고, 昌德宮은 덕(德)이 창성(昌)하는 궁이 되며, 景福宮은 복(福)이 큰(景) 궁이다.

이에 비해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정부종합청사」, 「서초동 법원청사」 등의 이름은 삭막하기만 할뿐,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정치적 이상이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나마 대통령관저는 별칭으로 청와대(靑瓦臺)라 부르는데, 유감스럽게도 「푸른 기와집」이 지니는 의미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깨끗한 정치를 외치는 요즈음의 분위기에는 차라리「청정대(淸政臺)」가 어울릴 법하다.

다시 창경궁 이야기로 되돌아 가자. 원래 모습을 되찾은 초기에는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적막함마저 느낄 수 있었던 창경궁의 분위기가 요즘들어 급변하고 있다. 토요일 늦은 아침쯤에 창경궁에 가보면 궁의 이 구석 저 구석이 온통 흰꽃들로 뒤덮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부의 하얀 드레스들 말이다. 창경궁은 이제 결혼 기념앨범을 만드는 신랑, 신부가 사진을 찍는 명소로 둔갑했다. 달리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사진 촬영을 방해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적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옛 건물의 기와지붕의 검은 색, 벽과 기둥의 붉은 색이 신부 드레스의 순백색과 어우러져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룬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결혼식 당일날만큼은 왕과 왕비가 된듯한 대접을 받는 신랑, 신부들이 옛 왕궁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신부는 신랑 어깨에 손을 얹으세요. 아니아니, 좀 더 자연스럽게... 그렇지요. 자, 신랑은 신부쪽으로 고개를 더 돌리시고... 예, 좋습니다! 이제 두분 다 활짝 웃으세요...』사진기사는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리고 신랑, 신부는 열심히 그 명령에 따라 포즈를 취하고 미소를 띠운다. 결국 신랑, 신부의 행복한 모습은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출되는 것이다.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왕조의 가족들도 그러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궁 바깥의 아랫사람들이 볼 때는 하늘 아래 부러울 것이 없을만큼 부귀와 권세를 누리던 그들이었지만, 그들도 알고 보면 개인의 행복은 무시 당한채 당시의 제도나 관습에 얽매어 왕족으로서의 행복을 짐짓 연출해내야 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의 뒷 배경이 된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과 그 아들 영조의 한풀이 이야기가 그 극단적인 예가 된다.
 
그저 구경꺼리로서의 옛날 궁터라고 생각되는 곳에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서울의 600년은 그저 흘러간 것이 아니며, 그 긴 시간동안 쌓인 우리 선조들과 우리 자신들의 경험은 이제부터 다시 흐를 600년의 시간 속에도 그 흔적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출처: 문화재청 창경궁 홈페이지
--------------------------------------------------------------------------------------------------------------------------------
'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