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오피스 빌딩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02:03 | 조회수 : 8650 | 공개

모든 건물에는 건물의 주인과 그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건물 소유주와 사용자는 항상 같은 사람은 아니다 (아마도 유일한 예외가 주택, 그것도 세를 놓지 않고 집 주인이 사는 주택의 경우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 거대도시 서울을 이루는 많은 건물 중에서 그 규모나 들인 돈으로 보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층 오피스빌딩을 예를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오피스빌딩의 소유주는 금전적 이윤을 남기고 싶어 한다. 즉, 적은 돈을 들이되 될 수 있는 한 많은 면적을 확보하여 세를 많이 놓고 싶어 한다. 오피스빌딩의 사용자는 쓰기에 편리한 건물을 원한다. 빽빽한 사무공간만 많은 건물보다는 주차장도 널찍하고 식당, 휴게실 등 복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건물을 원하는 것이다.

오피스빌딩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이 두 집단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사용자의 필요나 만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소유주에게만 금전적 이윤을 남기게끔 지어진 건축물은 비윤리적이다. 그렇지만 건축가의 설계비는 소유주가 지불하게 되니 아무래도 소유주의 요구사항에 더 충실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가 건축가는 건축가 나름대로의 욕심도 있다. 자기가 설계하는 빌딩이 멋지고 기념비적인 건물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서로 다른 세가지의 희망사항을 한 오피스빌딩에서 모두 성취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건축가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보기도 하지만, 이 세가지 희망을 개념적으로 교묘하게 뭉뚱거려 새로운 가치관을 설정하기도 한다. 어차피 상반되는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없는 바에야 「시대정신에 맞는 건축물」을 창조해 낸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서울의 오피스빌딩이 과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지를 최근 1백년간의 사회변화와 아울러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오피스 빌딩은 19세기 말 개화기에 비로소 서양에서 도입된 새로운 건물유형이다. 물론 옛날에도 사무실은 있었다. 제법 큰 규모의 한옥 살림집에는 사랑방이 딸리기 마련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실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사랑방을 쉽게 기억을 해낼 수 있으리라. 한옥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이 어린 세대들도 텔레비전의 사극(史劇)에서 본 다음과 같은 사랑방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안방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바깥주인은 바깥채인 사랑방으로 옮겨간다. 거기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갖추어져 있다. 내방객들은 으레 이 사랑방으로 모신다. 이곳에서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가게 되며, 경우에 따라 은밀히 뇌물이 건네어 지기도 하고, 역적모의까지도 이루어진다. 저녁이 되면 바깥주인은 다시 안채로 든다. 결국 사무를 보는 사람들 즉, 요즈음으로 치면 화이트칼라들은, 집이 곧 일터였고 가끔씩의 시내출장은 있었겠지만 출퇴근은 없었다. 이러한 생활양식에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사무실을 한군데 모아놓는 오피스 빌딩이란 개념조차도 존재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

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의 서울을 보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옛 가치체계에서 제일 밑에 놓였던 「商」이 이제는 우리 나라 발전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근래 크게 홍역을 치르고 있는 대학입시에서 상과(商科)분야의 인기도와 커트라인이라는 것을 보면 다른 인문 전공분야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에서도 우리는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서 「士」의 사람들만의 전유물(專有物)로서의 「사랑방」은 보통 사람에서 엘리트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는 「사무실」로 변하였고, 자연히 사무실이 모인 오피스 빌딩이 서울의 공간을 빽빽이 메우며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의욕, 무역진흥의 결의 속에서 「商」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접을 받게 되고, 재벌의 형성과 함께 그들은 심지어는 엘리트화 되기까지 한다. 당시 유행하던 「은행 다니는 샐러리맨」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말단 공무원들이 풀이 죽었던가.

60년대에 우리는 많은 대형 오피스 빌딩의 등장을 지켜보게 된다. 64년의 남산 자유센터를 필두로 하여 소공로 상업은행 본점(65년), 광교 조흥은행 본점(66년)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이들은 모두 10층이 넘어가는 건물로서, 이제껏 5,6층의 낮은 건물로 이루어지던 서울의 평탄한 스카이라인을 역동적으로 바꾸게 되며, 하나씩 준공될 때마다 장안의 화제가 되곤 했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69년 3월 1일 준공된 삼일빌딩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오피스 빌딩이다. 이 건물은 60년대를 마감하는 시점에 준공되었고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의 하나인 김중업(金重業)의 작품이기도 하며, 당대 최고의 모더니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걸작 시그램 빌딩(1958년, 뉴욕)과 같은 계열의 건물로서 한국 건축과 미국 건축과의 격차를 10년으로 줄여놓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일빌딩은 60년대를 풍미하던 경제자립에의 희망이 삼일독립정신의 이미지와 극적으로 맞아 떨어진 경우가 되기 때문에 60년대를 대표하는 건물이 되어야 한다. 삼일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던 탑골공원(舊 파고다 공원)을 지나는 길이라 하여 이름지어진 삼일로에 들어서게 된 31층의 삼일빌딩.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높이 하늘로 치솟은 이 고층건물은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어 정부에서 발행되는 홍보책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20년을 건너 뛰어 80년대 서울의 오피스 빌딩을 보기로 하자. 지난 20년 간은 급속도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오피스 빌딩은 88년에 준공된 삼성동 무역회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88년은 아주 의미 깊은 해가 된다. 그 해에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오천년만에 처음으로 무역수지가 흑자가 돌아서는 해이기도 하다. 올림픽 개막 바로 전인 6월에 개관된 무역회관 건물은 지난 20년의 노력을 자축하는 기념비가 된다. 그런데 이 건물은 일본의 일건(日建)이라는 설계사무소와 한국의 원도시(原都市)라는 설계사무소의 합작품이다. 삼일빌딩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면, 무역회관은 일본과의 협력을 상징한다는 일면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삼일빌딩과 무역회관, 이 두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건축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실감이 난다. 60년대의 삼일빌딩은 이름에 걸맞는 지사적(志士的)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커튼월(건물의 외벽을 판유리로 대체)이라는 당시 최신기법 사용으로 미래지향성을 지니고, 고동색 판유리는 산업현장에서 그을린 피부를, 간결한 직육면체의 형태는 검소하고 곧은 애국지사의 모습이 된다. 탑골공원에 있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연상되는 것이다.

80년대의 무역회관은 이에 비해 호상(豪商)의 이미지를 풍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는 턱을 추켜들고 하늘은 향해 배를 내민듯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고, 건물을 감싸고 있는 흰색 반사유리는 기름끼 도는 허여 멀끔한 피부를 연상시킨다.

무역회관의 위치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이 건물의 동쪽으로는 세종로 다음으로 도로폭이 넓다는 영동대로가 지난다. 이 길은 7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강남지역 개발과 부동산 치부의 상징이다. 또 남쪽으로는 테헤란로가 지난다. 이 길은 70년대초 오일쇼크 이후 중동의 원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끼로 당시 이란 황제 팔레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테헤란로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두 길의 교차점에 위치한 「무역」회관의 옆에는 호화판 인터컨티넨탈 호텔 건물이 서있다. 돈되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부자 상인과 그 앞에서 미소짓는 소비적인 여인이 어우러져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를 거쳐가는 현재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은 너무 비약적인 유추일까.

서울의 역사는 계속 된다. 2000년대 서울에 들어서는 오피스빌딩은 어떤 시대적 의미와 그에 걸맞는 이미지를 갖게 될지 궁금하다.
 
*이미지출처: 사진1-삼일빌딩(실내건축가클럽 카페-dbwldud333) 사진2-무역회관(네이버블로그 xkskxht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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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댓글 : 1
지쮸님   2016-09-25 15:34 [ Modify ]  [ Delete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삼일빌딩에 그런 의미가 담긴 건줄 처음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