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시대따라 바뀐 아파트문화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05:00 | 조회수 : 4060 | 공개

"우리나라 구래(舊來)의 고식적이고 봉건적인 생활양식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인 집단공동 생활양식을 취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으로나 시간적인 면으로 다대한 절감을 가져와 국민생활과 문화의 향상을 이룩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1964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마포아파트 2차 준공 치사에서 한 말이다.

마포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로서, 이후 30년간 지속되어오고 있는 아파트시대의 막을 연 장본인이 된다. 원래 계획으로는 10층 높이에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설비,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은 전기사정이 나쁜데 엘리베이터가 웬말이며,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중앙난방이 무어냐 하는 식으로 반대를 했다. 게다가 서울시 수도국에서는 마실 물도 귀한 판에 수세식 화장실은 곤란하다고 나섰다. 결국 엘리베이터가 필요없는 6층 높이에 가구별 연탄보일러를 갖춘 총 10개동 642가구의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대한주택공사 30년사」에 수록된 일화를 살펴보자. 마포아파트 준공 직후 에는 의외로 입주자가 적어 총호수의 10분의 1도 되지 못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아파트의 거의 대부분이 빈집이었기 때문에 이 빈집을 통과하는 파이프가 동파되기 시작했고, 연탄가스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니 입주자들이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주택공사에서는 급기야 모르모트 여섯 마리를 구하여 여러 방에 넣어놓아 보았으나 가스중독은 없었다. 그러나 입주자들은 사람과 모르모트는 다르다며 여전히 불안해 했다. 당시 현장소장 등 주공직원들은 밤새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입주자들의 안부를 점검했고, 야밤중인 2시, 3시에도 입주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러한 사태로 현장소장은 신경쇠약증에 걸렸고, 건축부장은 시달리다 못해 ࡔ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인체실험을 하겠다ࡕ 하여 술을 마시고 연탄가스가 가장 많이 샌다는 방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고 한다.

긍정적인 일화도 있다. 마포형무소 농장으로 사용하던 땅에 들어선 「서구식」의 6층 건물군은 그 당시 마포 일대뿐 아니라 서울 전체의 명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포아파트를 소재와 배경으로 하는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희비극을 거친 후에 마포아파트는 비로소 「서구화된 고급 문화생활의 장」으로 인식이 되기 시작하고, 다음 해 여름철부터는 프레미엄까지 붙게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의 서울에 아파트문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부터 30년 후인 오늘, 서울시 전체가구의 반 이상이 아파트나 연립주택 등의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아파트가 서울을 대표하는 주거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세계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우리 서울만큼 아파트 문화가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정착된 곳이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아파트는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저급주거로 인식이 되고, 실제로 범죄 등의 사회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아파트에 들어가 살지 않으려고 한다. 기실 이네들은 아파트를 시끄럽고 냄새나는 비둘기장에 비유하곤 한다. 똑같은 건물에 똑같은 집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개성이 무시된 값싼 건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건축전문가들도 아파트를 닭장에 비유하며 아파트를 저급한 대중주거문화의 표본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파트 한칸을 얻지 못해 난리들이다. 저소득층은 저소득층대로, 중산층은 또 중산층 나름대로, 적지않은 청약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몇년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천신만고 끝에 막상 분양신청을 할 자격을 얻어도 몇십대 일의 경쟁을 겪어야 한다.

산자락에 포근히 둘러싸인 마을에서 단층의 나지막한 한옥에다 마당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다. 땅과 근접한 삶을 수천년간 살아온 우리가 5층, 10층, 심지어 20층에 집을 얹어놓고 살지 못해 아우성이니 지난 30년간 변해도 많이 변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나 주택공사 社史가 말하는대로 아파트가 「고식적이고 봉건적인」 생활양식을 버리게 하고 「서구화된 고급 문화생활」을 가져다 주기 때문일까. 그런데 선진국에서는 아파트가 저급주거로 인식되고 있으니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시각을 달리 해 우리나라에서 아파트가 정착되는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주거양식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60년대 초 마포 아파트가 세워진 후, 70년대 들어 아파트 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강변 모래밭에 수백동의 아파트 건물이 오와 열을 정연히 맞추어 들어서 반포와 잠실 아파트가 되었다.

같은 크기와 획일화된 외관으로 이어지는 건물군은 「좌우로 정렬」한 군대의 열병식을 연상케 한다. 강북에 흩어져 있던 가구들이 강남으로 「헤쳐모여」한 것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5․16 직후의 마포아파트와 유신 직후의 반포․잠실 아파트는 군사문화의 소산이다. 획일화된 외관은 같은 색, 같은 모양으로 통일된 군복과 마찬가지이고, 아파트 동․호수만으로 내집, 네집이 구분되는 것은 계급과 군번이 이름 대신 쓰이는 군대와 다를 바가 없다.

반포․잠실 시대의 아파트는 거의가 다 낮으막한 5층 건물이었다. 그런데 80년대 들어서면서 10층이 넘는 고층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한다. 80년대 초반과 중반을 거치는 5공 시대는 초창기의 암울한 시대 분위기를 보상하려는 듯 무엇이든 크게 포장을 하는 시대였다. 공해에 대한 언급없이 세계 최대의 제철소와 조선소를 뽑내고,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되는 근로자들이 중동의 사막지대에 벌려놓은 세계 최대의 건설공사를 자랑스레 이야기 했다. 또한 국민의 부담은 아랑곳 없이, 88년에 유치될 올림픽을 사상 최대의 초호화판 올림픽으로 몰아 가고 있었다. 아파트에도 이 과대망상의 바람은 불어 급기야는 상계동에 25층짜리 초고층아파트가 세워진다. 단일 건물에 이백세대 팔,구백명이 날마다 먹고 자는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지상 60m의 아찔한 높이에서 말이다.

80년대 말 6공 시대의 아파트 문화는 신도시 건설로 이어진다. 군부대가 이동하여 적당한 곳에서 대충 정지작업을 하고 막사를 세우듯, 논밭과 야산을 뭉개고 하루 아침에 인구 3,40만의 거대 아파트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때는 조금씩 민주화가 진행되던 시기인지라 신도시의 아파트들은 획일화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우선 건물 모양과 외부 색깔이 다양해 진다. 게다가 이제껏 흔히 볼 수 없었던 아파트의 지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병사의 짧게 깎은 머리가 제대 후 길게 기르는 머리로 바뀌어진 것이라면 지나친 유추일까.

군사정권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태어난 마포 아파트는 30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91년 3월, 재개발의 대세에 밀려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그 자리에는 새로운 고층 아파트 건물이 들어섰다.

문민정부, 그리고 이어 국민의 정부의 시대가 되었다. 비단 마포 아파트 뿐만 아니라 서울의 오래된 다른 아파트 단지들도 마치 사정(司正)의 칼날과 같은 재개발의 철퇴를 맞고 허물어지게 될 것이다. 여기 새로이 지어질 문민시대의 아파트 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지 궁금하다.

*이미지출처: 네이버캐스트 <마포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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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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