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관공서 건물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0:58:52 | 조회수 : 2634 | 공개

언젠가 문민시대가 시작되면서 작은 개혁사례가 하나 언론을 탄 적이 있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꿈도 못꾸던 서초동에 있는 법원종합청사를 개방하여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견학을 할 수 있었다는 짤막한 보도였다. 1989년에 건립된 이 법원종합청사는, 안기부의 안가(安家)만큼은 못되지만, 그 모양이나 크기로 가뜩이나 법(法)이 무서운 우리네 보통사람들을 제압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건물의 중앙현관은 2층에 있고 그 양쪽으로 반원형의 경사로가 있어 승용차가 문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최소한 3층 높이는 됨직한 어마어마한 로비가 있어,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질 수밖에 없다. 법의 존엄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겠지만 너무 권위적이고 으리으리해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지레 질려서 이곳으로 들어 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따로 건물 양쪽 구석에 마련된 「보통사람용」 출입구를 사용해야 마음이 편하다. 서울의 관공서 건물은 오래 전부터 으레 이런 식으로 설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과연 관공서 건물은 권위주의적이여야만 하는 것일까.

예부터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으레 관청(官廳)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개개인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고, 좋게 보면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 나쁘게 보면 힘센 사람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공권력(公權力)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 공권력(公權力)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옛날에는 관리(官吏)라고 불렀고 이들이 일하는 곳을 관청(官廳)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제는 이들을 공무원(公務員)이라 부른다. 관리와 공무원을 여기서 굳이 구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官」은 벼슬을 뜻한다. 그러니 관리(官吏)는 벼슬을 가지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옛날 군주국가(君主國家)의 통치집단이지, 오늘의 민주국가(民主國家)의 공복(公僕)은 될 수 없다. 「官」에 따르는 권위주의적 통치라는 개념은 민주시민적 자유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사람들도 「官」을 얼마나 혐오했는지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게 되는 나무상자를 「官」에 나무 「木」변을 붙여 「棺」이라 한 것 같다는 필자의 생각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공무원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 장소를 「관」공서(「官」公署)로 부르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우리 주위에는 권위주의적 형태를 가진 관공서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70년대 이후 우리는 행정․입법․사법 3부를 대표하는 세개의 새로운 청사를 갖게 된다. 그 중에서 행정부의 정부종합청사가 70년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그 위치는 조선시대부터 관공서가 모여있던 이른바 육조(六曺)거리인 세종로(世宗路)인데, 이는 60~70년대의 슬로건 중의 하나인 「옛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에 충실했음을 엿볼 수 있다. 지하 3층 지상 20층인 이 건물은 광화문 일대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으며, 큰 덩어리(mass)나 수직선을 강조한 입면 등은 이후 지어지는 정부청사 건물의 전형적(典型的)인 설계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의 정부종합청사 건물이 미국인 회사에 의해 설계되고 시공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건물 건너편에 있는 미국대사관 건물과 현 문화부 건물이 미국사람들의 돈으로 지어져서 하나는 미국사람들이 자기네 대사관 건물로 쓰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 당시 경제기획원 건물로 쓰게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국의 경제원조에 의존하던 60년대의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75년 국회의사당 건물이 여의도에 새로 건립되었다. 제헌국회에서부터 유신 초기까지의 의사당 건물은 태평로(太平路) 현 서울신문사 건너편에 있었다. 광화문-정부종합청사-시청을 연결하는 축 바로 위에 있던 옛 의사당은 관공서 건물가(建物街)의 어엿한 일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만 멀리 여의도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것도 여의도의 가장 서쪽 끝에, 좌우에는 아무런 건물이 없이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국민과 함께 (즉,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려) 호흡해야할 국회의사당이 섬의 끝쪽에 멀찌감치 혼자 떨어져 있어 퇴락하여 멀리 쫓겨난 행정부의 시녀가 되어있는 모습은 건립당시 유신 치하의 정치풍토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이 건물도 외국인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지어졌다는 점에서 앞의 정부종합청사와 같이 아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이 건물은 여전히 권위주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외국의 의사당 건물들이 돔과 열주(列柱)를 흉내내어 무작정 얹혀진 돔이나, 윗부분의 중량을 받친다는 원래의 기능을 갖지 못한 채 엄청난 크기로 덧붙여진 열주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이곳의 돔을 없애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조차 건축미학적인 필요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워낙 하늘 일 없이 무능하기만 한 국회의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쓸데없는 일만 궁리해 낸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 좀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

1989년 3부 청사 중 마지막으로 법원종합청사가 서초동에 건립되었다. 한강 바로 남쪽 야산의 가장 높은 지점에 20층 짜리 건물 두 동이 무자비하게 치솟아 주위의 도시경관을 압도하고 있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백성을 오만하게 내려다 보고 있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머리가 없는) 거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이 건물의 모습은 설계 당시 행정부나 입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사법부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였다는 설계자의 변명(?)이 있기는 하나, 문민시대를 시작하는 오늘의 시민들에게는 묘한 반발감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글머리에 말한대로 위압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실내로 들어서면 설계자 김수근(金壽根)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에 어긋남이 없이 마음이 편한 공간이 펼쳐진다. 법원에 찾아와야 하는 사람들은 어쨌거나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다. 약간은 어둑한 실내조명과 교묘히 배치된 대기실의 의자들은 거기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어색한 시선이 서로 맞부딪치지 않도록 충분한 배려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건물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우리의 건축가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껏 1970년대 이후 건립된 행정․입법․사법 3부의 청사들을 생각해 보았다. 각자 나름대로의 특색도 있었지만 세 건물 모두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기실 권위주의적 건축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하나의 큰 덩어리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위의 세 건물 모두 주위의 건물에 비해 그 덩치가 커서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둘째로 건물의 외관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세 청사에 모두 적용된다. 셋째, 우리 것이든 외국의 것이든 잘 알려진 고전적(古典的) 요소를 모방한다.

국회의사당의 돔과 열주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마지막으로, 권위주의적 건축물은 대리석이나 화강석 등 육중한 재료를 사용한다. 우리의 세 청사 역시 그렇다. 단, 법원청사의 경우는 재료값이 저렴한 타일로 화강석의 기분을 내기만 한 것이 재미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선의(善意)의 눈가림을 쓴 것인데, 법과 눈가림이 한 건물에 공존한다는 것이 아이로니컬하다는 느낌이다.

당위성이 없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더욱 더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지난 세월에 건립되었던 우리의 정부청사들이 이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제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은 문민주의(文民主義) 정부가 출범했었고 지금은 그 정권도 국민의 선택으로 바뀌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건축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제는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는 관공서 건물이 세워져야 한다.

*이미지출처: 싸이월드 블로그 - 신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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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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