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가회동 11번지 한옥촌

서울의 삶터 | 2011-12-27 오후 2:58:45 | 조회수 : 4318 | 공개

서울 가회동 11번지 일대를 찾아 나서자.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오면 재동 네거리가 된다.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회동(嘉會洞)이다. 이 길은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제 맛이 난다. 30 미터쯤 걸어올라 가면 왼쪽으로 헌법재판소의 하얀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이제는 강남으로 이전해버린 창덕여고(昌德女高)가 있던 자리이다. 여기에는 얼마 전 결국 말라 죽어버린 천연기념물 백송(白松)이 있었다. 하얀 소나무의 곧음이 헌법재판소의 하얀 건물의 인상으로 이어진다.

좀더 올라간다. 오른쪽에 재동 초등학교가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 중의 하나다. 기록을 살펴보니 백년 전에 첫 졸업생을 낸 것으로 되어있다. 학교 왼쪽으로는 가회동 동사무소가 있다. 이 건물 한편 구석에는 조그만 표지석판이 있는데 거기에는 "손병희 선생 댁. 3․1 운동 거사절차를 협의하던 곳"이라 씌어있다.

여기서부터 길은 갑자기 좁아진다. 자동차 두 대가 간신히 비껴 지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 양쪽에 인도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차도 사람도 옛날 양반걸음 같이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찻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면 주위 풍경은 달라진다. 약국․구멍가게가 보이고 방앗간도 보인다. 서울 시청에서 2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요즘 농촌에서도 보기 힘든 그런 시골스러운 가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계속 발걸음을 옮기면 이런 가게건물 위로 기와집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의 목적지인 11번지 일대에 도착하게 된다. 방앗간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노폭 3m 정도의 경사진 길 양쪽으로 한옥이 늘어서 있다.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은 한옥 벽에 붙은 노란색 도시가스 파이프와 계량기들이다. 바로 몇년 전에 설치한 것으로, 옛 한옥에 최신 도시시설이 어우러져 세월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길을 끝까지 따라 올라가면 왼쪽으로 꺾어지게 되고 역시 좁고 경사진 길이 계속된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가 있는 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여기까지 오면, 자동차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된다. 또한 조금 전까지 보이던 조그만 가게들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한옥의 날렵한 처마곡선이 하늘을 배경으로 정지해 있다. 이제 우리는 600백년 고도(古都)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길 중간중간에는 더 좁은 골목길이 있다. 이 골목길들은 막힌 길이고 그 끝에 나무로 만든 대문이 보인다. 양옥에 달게 되는 차가운 철제문과는 달리 포근한 느낌을 준다. 막다른 골목길도 새삼스럽다. 강남의 새로운 동네 길들은 사통팔달식의 격자형을 이룬다. 길을 따라 끝없이 이리 돌고 저리 돌아보아도 종착점이 없다. 가회동의 막다른 골목길은 종착점이 있다. 하루의 숨가쁜 일과에서 지친 가장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이젠 집에 다왔다는 편안함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어 좋다. 몇백년 전 집현전(集賢殿)의 어느 학자도 같은 기분으로 대문 앞에 서서 "이리 오너라!"하고 외쳤으리라.

가회동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중의 하나이다. 정도(定都) 이래 지난 6백년 동안 우리나라의 역사적 변환을, 특히 구한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격동기를 그대로 지켜본 증인이요, 아직도 옛날의 흔적을 고집스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삶터이다.

북한산(北岳 또는 白岳이라고도 한다)의 남향 자락인 가회동 부근을 「北村」이라 불렀다. 이는 청계천 건너 남산 밑의 「南村」과 함께 조선조 한양의 양반촌을 이루고 있었다. 남산의 북향 기슭에 자리잡은 남촌은 벼슬에는 별 욕심이 없던, 혹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한 딸각발이 선비들이 모여 산 동네였다. 반면 가회동을 중심으로 한 북촌은 동쪽의 창경궁과 창덕궁, 서쪽의 경복궁 사이에 위치하여 조선조 초기부터 왕족과 사대부계급의 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요즈음 말로 「實勢」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일제에 의해 망하고 나서부터 가회동도 쇄락의 길을 걷는다. 1930년대 日人들의 조선진출이 가속화되고, 식민정책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이 농촌으로부터 서울로 몰려듦에 따라 서울은 주택난이 심각해진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34년에 조선시가지 계획령을 발포하고 1937년에는 토지구획 정리사업을 시작하여 소규모의 「도시형 한옥」을 많이 짓는다. 가회동도 토지구획 정리사업의 대상이 되어 그때까지 권문세가의 필지로 남아있던 큰 땅들이 분할이 된다. 가회동 11 번지 일대는 원래 2천7백여평의 큰 단독필지였으나 이때 30평 정도의 소필지로 나누어졌다.

이 자리에 그 당시의 집장사들이 집을 지어 당시 신흥 중산층에게 분양한 집들이 오늘 우리가 보는 가회동의 한옥들이다. 60년 전에 벌써 주택난이 있었고 이에 편승하여 집장사들이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며 미군의 주둔과 함께 서양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때부터 서울의 그 많던 한옥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어가고 그 자리에는 양옥들이 들어선다. 그러나 「북촌」에 이어져 내려오는 보수성은 가회동에서만은 그 명맥을 유지한다. 서울의 다른 곳에서는 더 이상 한옥을 찾아 볼 수 없게 되는 70년대 들어 가회동 일대는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된다. 이곳의 한옥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철거 후 신축은 물론 집수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동산투기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당시 가회동의 집값은 오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거기 살면서 돈을 모은 중산층들은 강남개발 붐에 동참, 살기 편하고 투자가치가 좋다는 강남의 아파트로 앞다투어 이사를 간다. 그 대신 가회동의 한옥에는 과거를 아끼는 노인부부나 강남으로 옮겨갈 경제력이 없는 소시민들과 문간방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만이 남아 고도 6백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90년대 중반 들어 주민들의 집단민원이 드높아지자 가회동 일대의 대부분이 한옥보존지구 지정에서 풀려났다. 벌써 집장사들이 짓는 고급빌라들이 여기 들어서게 되었고, 항상 새로운 것, 투자가치가 높은 것을 놓치지 않는 서울의 재빠른 중산층은 다시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며, 이곳을 지키던 소시민들은 다시 어디론가 중산층이 살다 남겨놓는 동네로 옮겨갈 것이다.

60년 전 대량으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집장사 집들이 전통문화계승의 이유로 보존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역사발전」의 주변에서 묵묵히 살아나가는 소시민들이 이곳을 지켜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 60년 후, 강남의 아파트군들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의 대상이 될는지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다.

*이미지출처- Google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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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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