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잠실 야구장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24:25 | 조회수 : 6736 | 공개

1960년대 중반에 벌써 소설가 이호철(李浩哲)은 『서울은 만원이다』를 외쳤다. 그때의 서울 인구는 380만. 서울의 면적이 590km2였으니, 잘 따져보면 당시 서울 시민 한 명에게는 약 47평의 땅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오늘 서울 인구는 천백만이 되었다. 물론 서울의 면적도 조금 늘어 지금은 601km2라고 한다. 그러니 서울시민 한 명에게 주어지는 땅은 이제 16평일뿐이다. 사실 땅 16평이 작은 공간은 아니다. 서민용 아파트의 거실 크기가 기껏해야 네 평 정도이니까. 문제는 일상생활에서 한 사람이 혼자 차지하고 쓸 수 있는 공간은 16평은커녕 1평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 평의 면적은 대략 가로 세로 180cm의 정사각형 정도가 된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 가서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 내 전후좌우 180cm 이내의 공간을 나 혼자만 쓸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면 거기서는 내 주변 180cm를 확보한 채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퇴근길 지하철을 타면 거기서 1평의 공간을 나는 가질 수가 있는 것일까?
                                                                                                                                 
부족하기만 한 서울의 땅. 그나마 볼 수 있는 서울의 땅은 살아있는 땅이 아니다. 흙도 없고 녹색의 식물도 없는 죽은 땅이다. 언젠가 서울시민 여론조사에서 서울의 대표적인 색깔을 물어보니 「회색」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70퍼센트가 넘었었다. 아스팔트로 덮인 차도, 시멘트 블록의 보도, 콘크리트 건물들 덕분이다. 넉넉한 땅과 녹색을 잃은 사람들. 이들이 바로 오늘의 서울시민이다.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넓고 푸른 공간을 찾아 골프장에 간다. 그러나 우리네 소시민들은 기껏해야 일요일 오후 가족을 데리고 공원에나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서울의 공원 치고 복잡하지 않은 곳이 있으랴. 올림픽 공원에, 미사리 조정경기장에, 하다못해 한강 고수부지에 나가 보아도 사람이 넘쳐흐른다. 여기서도 내 가족은 10평의 공간을 확보할 수가 없다.

그런데 궁즉통(窮卽通)이라고 서울 시민들은 엉뚱한(?) 곳에서 널찍하고 푸르른 공간을 만끽할 수가 있다. 잠실 야구경기장이 바로 그곳이다. 둥근 원을 4분의 1로 잘라놓은 것 같이 생긴 야구장의 면적을 계산해 보면 적어도 2500평이 된다 (원의 반경은 최소 91m이다). 그런데 이 경기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심판까지 다 합해도 15명 안쪽이니 일인당 160평씩이나 배당되는 셈이다. 서울의 어디에서고 한 사람이 이렇게 넓은 땅을 가지고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없다. 더구나 세 명의 외야수들은 경기장 전체의 반 이상 차지하는 푸른 잔디 위에 널찍한 간격으로 서있다. 이것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잿빛 서울의 일상 삶터에서 받는 짜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물론 관중석에 앉아있는 우리 구경꾼들은 한 평은커녕 10분의 1평도 안 되는 공간으로 만족해야 한다. 어찌나 좁은지 내 다리를 주체못할 정도이다. 다리를 꼬고 앉다가는 앞사람의 등을 발로 건드리게 되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경기장의 넉넉함과 푸르름을 보며 신이 난다. 비록 내가 그런 공간을 즐길 수는 없지만, 야구선수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이라도 얻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면 푸른 하늘이 보이고 또 관중석 위 지붕이 보인다. 물론 지붕 밑은 어둡고, 이것이 밝은 하늘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옛날, 사회가 이렇게 복잡하지 않던 시절, 한옥 대청마루에 한가로이 누워있으면 지붕 밑 처마와 하늘이 함께 눈에 들어오던 기억이 새롭다.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장내 아나운서가 관중의 흥을 돋운다. 『... LG 트윈스가 4승 2패로 앞서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말에 환호한다. 응원가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면 우리는 박수를 쳐가며 따라 부른다. 『다시 한번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다시 열심히 박수를 친다.

경기가 시작되면 이제는 응원단이 나서서 관중을 리드한다. 손뼉도 치고, 구호도 외친다. 파도물결 박수도 시키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준다. 일상생활에서는 그저 스쳐지나가기에 바쁜, 무려 삼만오천 명의 「타인」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분위기」의 마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피커에서 왕왕 울려대는 음악소리, 응원단의 북소리, 우리 스스로의 고함소리가 어우러져 야구장의 열기가 점점 고조되어 간다. 상대편 응원단의 함성과 박수소리가 마치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소리와도 같이 들린다. 이 소리는 관중석 위의 지붕에 반사되면서 증폭이 되니 이편에서도 더욱 분발할 수밖에 없다.

사실 부산의 야구경기장도, 광주의 경기장도 다 이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잠실 경기장은 조금 특별난 구석이 있다.
잠실 야구경기장은 가락지형의 둥근 건물이다. 그런데 가락지의 한 쪽은 높고 반대쪽은 낮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야구장의 본부석과 내야 쪽 스탠드는 아주 높게 되어 있고, 그것이 외야 쪽으로 갈수록 점점 낮아진다. 가락지가 바닥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높은 쪽 스탠드 뒤로는 한강이 흐른다. 낮은 쪽 스탠드 뒤로는 잠실대로가 지나고 그 너머로 아파트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면 아무 것도 아닌 이 배치가 사실은 무척 재미있는 효과를 연출해 내고 있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 중의 하나가 조망이다. 건물이 들어설 자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쪽으로 건물의 정면을 안치게 된다는 말이다. 잠실야구장 자리에서 가장 좋은 전망은 물론 한강이 된다. 높은 스탠드는 잠실대로 쪽으로 놓고 낮은 스탠드를 한강 쪽으로 놓았다면 야구장 잔디를 보면서 낮은 스탠드 너머로 푸른 한강 물까지 볼 수 있었으련만. 그런데 잠실야구장을 설계한 김인호(金仁鎬)라는 건축가는 정반대로 스탠드를 배치해서 한강 쪽은 전혀 보이지 않고 외려 잠실대로 쪽의 아파트 건물만이 보이게 했다. 건축가의 실력이 모자란 탓일까? 그렇지 않다. 김인호는 오히려 기가 막힌 센스를 지닌 건축가이다.

필자의 판단이 옳다면, 그는 여기에서 야구장 안팎의 강한 대비효과를 얻으려 했다. 야구장 안에서는 엎치락 뒤치락하는 시합의 긴장감과 관중 응원의 열기가 가득하다. 저녁이 되어 야간 조명등에는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6개의 조명탑에서 도합 792개의 전등에서 비추는 불은 경기장 내부를 환히 비추어준다. 불빛을 받은 잔디는 더욱 더 파랗게 보이고, 선수들의 유니폼 색깔도 더욱 선명해진다.

7회말 무사만루. 두점 차이로 쫓아가고 있는 홈팀의 공격. 관중과 선수들은 환한 불빛 아래에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빠져든다.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외야 스탠드 너머로 눈길을 주니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서울의 일상(日常)」이 무표정하게 서있다. 우리가 매일 지지고 볶으며 사는 회색의 아파트들이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묶인 자동차들의 빨간색 후미등이 줄을 지어 서있는 것도 보인다. 이쪽 편 환하고 재미있는 판에 끼어든 나는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반대로, 어둔 잠실길 오도가도 못하는 차량행렬 속에서 잔뜩 지쳐있는 퇴근길의 샐러리맨은 야구장 낮은 스탠드 너머로 새어나오는 환한 불빛이 부럽다. 관중의 함성과 박수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좁고 우충충한 서울의 일상 공간과 넓고 푸른 야구장. 또, 어둡고 따분한 서울의 밤과 환하고 신나는 야간경기. 잠실 야구장은 이러한 극적 대비효과를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서울의 몇 안되는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첨부파일
naver.jpg (303K)

댓글 : 5
신선   2012-06-02 14:06 [ Modify ]  [ Delete ]
맛있는 글입니다. 갑자기 야구보고싶습니다. .. 샹하이에서 최부득 드림
planet91   2012-01-09 10:55 [ Modify ]  [ Delete ]
잘 읽었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학창시절 야구를 했었고, 지금도 즐기고 있는 사람중 한명으로서
항상 야구글러브와 공을 들고 가족과 함께 찾았던 잠실야구장의 기억은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함으로 다가옵니다.
잠실야구장에서 야구를 구경하며, 답답한 서울 한복판에 숨막혀 사는 우리가 넓은 필드를 뛰는 선수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행복한일이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주말에 시간과 용기를 내어 동호회등에 참석하며 직접 경기에 참여해보는것도 무미한 도시를 사는 우리에게 큰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북극성   2012-01-05 13:19 [ Modify ]  [ Delete ]
작년에 잠실야구장에 갔다가 경기장 넘어 보이는 풍경에 대해서 묘하다면서 친구와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 칼럼 읽으면서 '움찔' 했습니다.
하나   2012-01-04 16:01 [ Modify ]  [ Delete ]
잠실 야구장 근처에 살아서 그런지 교수님의 칼럼을 보니 왠지 모르게 반갑네요~  늘 야구시즌 때나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걸 보면 지친 도시생활 속에서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을 제공해주는것 같아요~
s1ver   2012-01-04 15:57 [ Modify ]  [ Delete ]
잠실야구장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당시 저는 몸과 마음이 경기응원을 하며 맥주로 목을 축이는 것에만 쏠려있었기에... ...
선생님의 칼럼을 읽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