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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6 오전 6: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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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
최고 명가(名家)에서 배운다
장재식·장하진 가문의 남다른 가풍과 교육철학
알아주는 부자에 타고난 천재 집안. 지금까지 장씨 가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랬다. 물론 호남의 대지주
집안으로, 3대에 걸쳐 정·관·학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장씨 가문에는 그보다 더 특별한 게 있었다. 명가의 명성 뒤에는 남다른 가족애와 교육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세계
부부의 날
위원회는 지난 5월 16일 '올해의 명가(名家)상' 제1회 수상자로 장재식(전 산자부 장관)·장하진(전 여성부 장관) 가문을 선정했다. 한 집안에서 '숙질(삼촌과 조카)'이 장관이 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장씨 가문은 3대에 걸쳐 정·관·학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명가 중의 명가다. 장재식 전 장관의 형인 장영식 전 한국전력 사장과 장 전 장관의 두 아들인 장하준·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 형제, 장하진 전 장관의 동생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물이 즐비하다.
먼저 장재식 전 장관의 아버지대인 1세대는 독립 운동가로 유명하다. 장 전 장관의 할아버지인 장진섭 씨는 병준·병상·홍재·홍렴 등 4형제를 두었는데, 광주학생 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젊은 나이에 타계한 셋째 홍재 씨를 제외하고 3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장남 병준 씨는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 측근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사남 홍렴 씨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후에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 전 장관의 아버지인 병상 씨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대는 등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가로 명성이 높았다.
장씨 가문의 1세대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데는 장재식 전 장관의 할아버지인 장진섭 씨의 교육열이 크게 작용했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재산이 상당했던 장진섭 씨는 일찍 타계한 삼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을 모두 일본과 중국 등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장남인 병준 씨와 둘째 병상 씨는 일본에서, 막내 홍렴 씨는 중국 베이징에서 각각 유학 생활을 하며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2세대인 장재식 전 장관의 형제들은 정치인과 관료가 많다. 3선 국회의원이자 전 산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 전 장관은 막내로, 그의 바로 손위 형은 전 한전 사장이자 뉴욕대 교수를 지낸 장영식 씨이고, 장하진 전 장관의 아버지 충식 씨는 도의원을 지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남 정식 씨는 생전에 전남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3세대는 주로 학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충식 씨의 장녀는 충남대 교수 출신으로 노무현 정권 시절 여성부 장관을 지낸 장하진 씨고, 그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소액주주 운동으로 유명한 고려대 경영대 장하성 교수다. 이뿐만 아니라 장하진 전 장관의 여동생 하경 씨는 광주대 교수이고,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으로 하나금융 경영연구소장, 열린우리당 정책실장을 지낸 하원 씨는 장 전 장관의 막내 동생이다.
장재식 전 장관의 두 아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저자로도 유명한 장남 하준 씨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이고, 차남 하석 씨는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런가 하면 장 전 장관의 사위는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관련 사건을 수사해 'PD수첩 검사'로 유명한 임수빈 전 부장검사(현재 변호사)다. 장영식 전 한전 사장의 1남 1녀는 현재 보잉 이사와 재미 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장정식 전 전남대 의대 교수의 장남 하종 씨도 역시 조선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가족애·검소함은 선대부터 물려받아
장씨 집안이 3대를 거치며 각자의 분야에서 활발히 사회 참여를 하고 있는 데는 '주어진 재능을 사회를 위해 쓰라'는 집안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장재식 전 장관의 형제들이 모두 6·25전쟁 당시 참전했던 것도 아버지 장병상 씨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 참전으로 장하진 전 장관의 부친인 충식 씨와 전 한전 사장 영식 씨는 총상을 입고 상이용사가 됐을 정도다. 장하진 전 장관은 학자가 많은 3세대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 참여를 하고 있는 데 대해 "아버지 세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우리 집안은 형제애와 가족애가 아주 남달랐어요. 아버지와 큰아버지·작은아버지는 주말마다 모여 늘 바둑을 두시면서 정치 이야기, 사회 이야기를 하셨어요. 우리는 놀면서도 그런 얘기를 귀동냥하며 자랐죠. 할아버지 세대도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신 걸 보면 그런 게 집안 분위기로 형성됐던 것 같아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현대사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일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기 일에 성실해야 한다는 게 가풍으로 자리 잡은 거죠. 우리는 한번도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과에 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다만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과를 선택하라'는 말씀은 하셨죠."
장하진 전 장관은 "가족 화합 도모에는 장재식 작은아버지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매년 여름 20명이 넘는 가족들의 스케줄을 일일이 맞춰가며 함께 휴가를 떠났던 것. 그녀는 "어렸을 땐 억지로 갔는데 지금 생각하니 감사한 일"이라며 어릴 적 추억을 떠올렸다. 남다른 가족애는 장재식 전 장관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열일곱 살에 세 살 연하인 아버지에게 시집왔는데, 28세가 되도록 11년간 아이를 못 낳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얼마나 착했던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밖에 몰랐다고 해요. 그 후 어머니가 아들 여섯에 딸 둘을 낳았는데, 우리 형제는 이복형제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일본으로 유학도 가고 그랬는데도 여자는 어머니밖에 없었지요. 저도 남자지만 우리 아버지를 정말 존경합니다."(장재식)
장하진 전 장관은 옆에서 "작은아버지도 작은어머니와 금실이 아주 좋다"고 덧붙였다. 장재식 전 장관의 부인인 최우숙 씨는 경기여고, 연세대 영문과 출신으로 남편과 함께 가족들을 챙기는 데 열심이었다.
선대부터 알아주는 부잣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소함 역시 집안 대대로 이어졌다. 주택은행장 출신에 국세청장,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 전 장관은 "우리 집이 20평대였는데, 책상이 없어서 아이들이 밥을 먹은 후 그 밥상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고 말했다.
"집사람도 사치라는 걸 모릅니다. 내가 존경하는 게 바로 그런 점이에요. 결혼할 때 제가 5부(0.5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줬는데 그마저 도둑맞아 없고, 지금은 그 흔한 반지·목걸이 하나가 없어요. 요즘엔 남대문 시장에 가서 5000원, 1만 원짜리 옷을 사서 입습니다. 그런데 남들은 어디서 그렇게 좋은 옷을 사 입었느냐고 합니다(웃음). 하준이와 하석이도 어렸을 때 나이키 신발 한번 신어본 적이 없어요. 하석이가 런던대 교수로 있을 때 제가 자동차를 하나 사주겠다고 했더니 필요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녀석은 휴대전화도 작년에 샀을 정도입니다. 대단한 놈이에요(웃음)."
서울대 출신 다수, 전설적 무용담 많아
장씨 가문은 알아주는 수재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웬만하면 다 서울대 출신이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하느라 제때 졸업을 하지 못했다는 장하성 교수가 고려대, 여성들은 이화여대 출신이 많다.
"
서울사대
를 졸업한 작은 누님을 포함해 우리 형제가 전부 서울대를 나왔는데 시험 시간표가 1주일 전에 발표되면 그때부터 공부했어요. 그런데도 형제들이 다 수석을 했어요. 하룻밤에 영어 단어 120개씩 외워 시험을 봐도 100점을 맞곤 했죠. 하진이 아버지가 공부를 잘했어요. 가방만 들고 다니고 책도 안 봤다니까요. 우리 어머니는 늘 몸이 중요하다며 '공부 그만해라'는 말을 달고 살았어요. 세상에 공부를 그만하라는 엄마가 어디 있습니까(웃음)."(장재식)
장재식 전 장관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월반해 서울 법대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된 후 형 영식씨가 대신 원서를 내줘 몇 개월 만에 치른 행정고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 장하진 전 장관의 아버지인 충식 씨는 서울대 화공과 졸업 후 전남도의원을 거쳐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다 5·16 군사정변이 터지며 수감됐다. 당시 다른 정치인들은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으나 그는 끝까지 버텨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이기도 했다. 그 후 정치를 접고 한국은행에 다니다 도의원을 지냈다. 고인이 된 장 전 장관의 어머니도 4·19 혁명
국가유공자
다. 역시 서울대 공대 출신인 장영식 씨는 국내에도 드문
계량경제학
박사로 국내에서 한전 사장을 지낸 몇 년을 제외하고 40년간 뉴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경제학자 중 유일하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예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제가 여성부 장관에 임용됐을 때 한 언론에 '천재 집안'이라고 기사가 나서 놀랐어요. 아버지들은 놀면서도 공부를 잘하니까 그런 소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대에는 다 둔재가 됐어요(웃음). 심지어 아버지는 서울대 시험을 본 후 발표하는 것도 모르고 놀러갔다는 말도 있고, 그냥 가서 봤는데 붙었다는 말도 있고, 아버지 대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요(웃음). 우리는 그런 무용담을 많이 듣고 자랐죠."(장하진)
"우리 세대에는 천재성이 몰락했다"는 장하진 전 장관의 겸손의 말에도 불구하고 3세대들의 천재성도 두각을 나타낸다. 특히 장재식 전 장관의 두 아들인 장하준·하석 교수 형제의 이력은 대단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장하준 교수는 1986년 케임브리지대 석사과정에 지원했지만 '(당시) 세계 20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대학 졸업생'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학위를 주지 않고 수료증만 주는
디플로마
과정에 허락을 받았는데, 그렇게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한 지 4개월 만에 교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너에게는 1년 만에 석사학위를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박사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박사과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하라"는 말을 들었고, 결국 영국에서 공부한 지 4년 만인 27세 때 교수에 임용됐다. 한국인 케임브리지대 박사 1호로,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에프 상을 최연소 수상했고, 2010년에는 경제학 서적 중 가장 뛰어난 책에 수여하는 뮈르달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차남인 장하석 교수도 천재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다닌 그는 2년 만에 월반해 수석으로 졸업한 뒤 미국 고교 수석 졸업생들이 모인다는 칼텍(
캘리포니아
이공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39세에 런던대 주임교수가 됐고, 과학철학 분야 최우수 도서에 주는 라카토스상을 2006년 사상 최연소로 수상했는가 하면, 그에 앞서 2005년에는 영국 과학사학회가 과학 역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에세이 저자에게 주는 이반 슬레이드 상도 수상했다. 현재 장하준·하석 형제는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재직 중인데 700년 케임브리지 역사상 형제 교수, 그것도 동양 사람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독서가 가장 큰 교육…4대까지 이어진 천재 기질
장재식 전 장관은 "아들들이 잘 된 것은 운칠기삼"이라며 "운이 좋아 잘됐는데 그래도 내가 삼할 노릇은 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 모두 지독한 독서광이었는데, 이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부친의 영향이 컸다.
"하준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이가 520페이지짜리 책을 열심히 보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왜 보느냐고 했더니 아이들 엄마 말이 날마다 본다는 거예요. 하준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한 시간에 250페이지를 읽어 학교에서도 놀랐을 정도니까요. 하석이도 마찬가집니다. 중학교 때부터
영한사전
이 시시하다고 영영사전만 봤고, 대학 때는 1주일에 한권씩 책을 읽어서 졸업할 때까지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으니 말 다했지요. 하석이는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아이도 낳지 않을 정도로 공부 욕심이 대단해요."
명석함은 장 전 의원의 손자 대까지 이어졌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외손자는 벌써 사법고시 1차를 패스했고, 영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장하준 교수의 1남 1녀도 공부에선 뒤지지 않는다. 장하진 전 장관의 두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큰 아들은 중국 베이징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고, 차남은 서울대 화공과에 재학 중이다.
"저도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공부를 다 잘했어요(웃음). 한번은 작은 애가 '엄마, 나도 의대에 갈 걸 잘못했나?'라면서 엄마는 왜 의대 가라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네가 밥은 못 먹고 살겠느냐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집안 분위기가 그래요."
장재식 전 장관과 장하진 전 장관은 자기 일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게 장씨 집안을 명문가로 만든 비결이라고 입을 모았다.
"4대, 5대까지 명문가라는 명예를 이어가면 좋겠지만 그게 억지로 되는 일인가요. 다만 후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착하게 자기 할 본분을 다하고 살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장재식)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사진 서범세 기자
joycine@hankyung.com
<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 BUSINESS 810호 제공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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