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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 코리아 초대석 : 욕심도 감추지 않아 순박해 보이는 사람, 남문기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그의 이력서는 길다. 일반인의 이력서가 길어야 3장인데 반해 무려 12페이지, 2967단어로 구성됐다. 미주 한인 중에 이력서가 가장 긴 사람은 아마도 그가 아닐까. 이력서가 길다는 것을 두고 내세우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신의 이력서를 작성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력서라는 세글자 안에 자신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해왔던 일을 정리하기도 마땅치 않다. 대표라는 명함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곳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주 잘 정리해서 마우스를 수십번 스크롤다운 해야 할 정도라면 자신이 한 일을, 다시 말해 성과를 아주 잘 돋보이게 하는 자기 마케팅의 천재다. 그 이력서를 갖추기 위해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한 번만 고려해본다면 감탄사를 붙일 수밖에 없다.
현재 명함은 해외 한민족 대표자 협의회 공동의장 그리고 뉴스타 부동산 대표라 찍힌 남문기 회장 이야기다. 그러나 그의 명함도 그리 간단치 않다. 로스앤젤레스 직선 한인회장(28대), 미주 한인회 총연합회 총회장(제 23대), 미주한인상공인 총연합회 총회장(21대), 세계 한인회장대회 공동의장 역임, 미주동포후원재단 이사장, 한미친선연합회 총재 등이 작게 찍혀 있다.
남문기 뉴스타 부동산 대표의 명함 내용을 일일이 나열하는 이유는 그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서와 명함에서 남 대표를 절반 가량 읽을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감추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심중을 더 굳히게 된다.
남문기 대표가 보스톤을 방문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4일 인터뷰하게 된 계기는 그가 간암으로 인해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또한 벌써 2년이 되어버린 이야기지만 2011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재외국민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가 국적 논란으로 자진 사퇴하는 등 한국 정치계의 문을 두드렸던 뒷이야기도 직접 듣고 싶었다. 그가 보스톤을 방문한 목적은 간단치 않다. 명목은 뉴스타 직원 교육이었지만 지역 단체장들과 면담을 통해 재외국민의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뉴스타와 그의 정치적인 일정이 겹쳐있다. 인터뷰도 뉴스타부터 시작했다.
현재의 뉴스타로 만든 경영 노하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세가지를 답했다. 첫째가 팀 플레이다. 혼자서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여러 명이 함께하면 쉽다는 얘기다. 같이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때 해결도 훨씬 빠르다는 것이 남 대표의 말이다.
두번째는 교육이다. 많이 알아야 손님에게 잘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관련 지식이 많을수록 더 좋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직원들에게 교육을 많이 시킨다. 셋째는 감사와 감동이다. 어떻게 고객들에게 감사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이다. 부동산 투자 및 중개업자로서 동시에 성공한 그의 부동산 철학은 흥미로웠다. “부동산은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이 회사를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지난 금융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부동산을 구입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큰 회사, 예를 들어 맥도날드 같은 곳도 결국 부동산 가지고 부자됐다.
미국도 텍사스와 알래스카 사서 부자됐다”는 게 남 대표의 이야기다. 남 대표에 따르면 “미국땅을 후손을 위해 많이 소유해야 하는 게 좋다.” 영토를 영역의 개념으로 바꿔 미국에 있는 한국을 건설하는 것이 신 광개토대왕의 개념이다. 부동산 투자를 한국 영역 확장개념으로 생각하는 남문기 회장은 확실히 특별하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여행자들도 비교적 많지 않은 돈으로 미국에 투자할 수 있으니 부동산을 구입하라고 주장한다.
“뉴스타 없이는 남문기도 없다”라고 말하는 남문기 대표의 정치입문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남들처럼 정치 한 번 해보고 싶어서 정치에 입문했다”는 것이다. 미주에서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한인회장, 미주한인회 총연합회 회장, 해외한민족대표자 회의 공동의장. 재외동포 참정권 실현에 발벗고 나섰고 LA 총영사도 재외국민 출신으로 임명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내가 국회의원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하는 그다. 한국의 정치권이나 재외동포 관계자들 사이에 자신이 제 1의 후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실패했다. 결국 그를 선택하지 않은 한국의 답변은 “LA에서 뽑으면 뉴욕이 싫어하고 또 중국과 일본이 미주에서 뽑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오히려 할 말이 많았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내가 미국의 시민권까지 포기하고 한국정치를 지향한 것은 대표성 때문이다. 전 LA 한인회장, 미주총연 한인회장 등을 지닌 대표자가 권리를 안 받아 들일 때 비겁자가 될 수 있다. 700만 해외 동포를 대표해서 국회의원이 됐어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해외 대표 국회의원으로서 한국에 가면 “한국사람들의 생각에 국제화의 개념을 심어주고 해외동포들의 권익을 대변하며 한국의 부동산 시스템을 세계적 기준에 맞게 변형시키고 싶었다”고 그는 밝혔다. “정말 해외동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 일해야 한다”고 솔직하게 자신이 적임임을 주장한다.
1982년 300불을 갖고 도미해 처음 청소부로 일을 시작한 후 성공신화를 이룬 남문기 회장은 이민 1세대로서의 자부심이 철저했다. 1세대야 말로 국제화 시대를 이룬 사람들이라고. LA에서는 한국말만 해도 살 수 있다. 영어를 못 해도 살 수 있는 것이 남 회장에게는 “무식의 상징이 아닌 한인 경제력의 상징”이다. 재미 동포가 미국의 정치 경제에 들어가 성공하고 한국을 돌아보는 것은 바로 남문기 대표에게는 국제화다.
LA지역 유력지 한 언론인은 “남들은 자신의 욕심을 뒤로 감추지만 남문기 회장은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지적하고 “하지만 각종 한인회 활동과 정치 활동이 부동산이란 비지니스와 섞여 욕심을 챙긴다는 비난도 피하지 못한다.”고 그를 평가했다. 그의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담백한 성품이지만 정치나 사업 한가지에 올인하지 못하면서 공사 구분이 애매하다는 지적이다.
뉴스타 남문기, 정치인 남문기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다”라고 했다. 뉴스타가 없는 남문기는 보통의 정치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월급 받지 않는 정치인 남문기, 또는 자기 돈을 쓰면서 대한민국을 살리고 실업자에게 직업을 주는 남문기 아니면 자기 돈 버는 방법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그에게 의문부호다. 그가 고민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지점이리라.
인터뷰를 마치고 직원에게 강연을 하는 남문기 대표 사진촬영을 위해 잠시 남아 있었다. 직원들과 사진촬영 시간에 한 사람 한 사람 잘 나오도록 챙겼다. 강연을 하는 그의 모습은 창밖의 봄 햇살처럼 생기가 넘쳤다. 금방 암투병을 하고 나온 사람 맞나 싶을 정도였다. 뉴스타 직원들 앞에서 강연할 때 그는 행복해 보였다
올해로 23회를 맞은 호암식 시상식이 지난5월31일에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다. 호암상은 호암 이병철 선생의 인재제일주의와 사회공익정신을 기려, 학술·예술, 사회발전과 인류복지 증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사를 현창하기 위해 199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제정한 상으로 현재까지 총 117명의 수상자를 선정해 시상해 왔다. “문화는 그것이 창조되고 수용되어 궁극적으로는 모든 국민의 것이 될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된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풍요롭게 가꾸어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시대야말로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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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향해 야망을 품고 또는 사회를 향해 반항을 하던 학창시절에 돈병철이라 별명이 붙을 만큼 돈을 포대자락으로 긁어모으던 한 기업가가 있었다.그의 눈부신 기업성장에 사람들은 부러움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때 문화 창달에도 눈을 떼지 않은 삼성 창업자 호암 이병철회장이 호암아트홀을 설립하며 축사에 남긴 말이다. 깡마르고 촌노 같지만 우직하고 기업가로써 독보적 존재였다. 이제 이병철 회장은 돈만 밝히는 ‘돈병철’이란 별명에서 문화유산을 아는 재벌로 인식되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역사적인 도약이었다. 현재의 삼성가는 국가보다 더 많은 국보급 보물를 지녔다고 할 만큼 한국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호암 이병철회장은 한국50년대, 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과 함께하며 문화사업까지 조화를 이루어 세계적으로도 완전한 재벌가를 이루었다. 부러움에 앞서 국가 이미지 선양을 생각하면 아무리 극찬을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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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뉴스타 장학 재단 장학금 수여식및 하계수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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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살면서 오늘날 미국 매장에서 삼성메이커의 전자 상품을 보면서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되겠는가. 미국 주부들에게서 “삼성 냉장고가, 삼성 셀폰이 최고다”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촌로인 이병철회장이 한국인임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시대에 호암 이병철은 한국경제의 성장을 어떤 시각에서인지 기업관으로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을까? 책을 통해서 보면 순전히 호암 이라는 한사람의 결단과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호암은 196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전자산업이 한국의 미래라며 설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1968년 정부의 ‘전자공업진흥 8개년 기본계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 기업인의 의욕과 열정이 국가를 움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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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병철회장도 첫 사업이었던 정미소와 운수사업은 실패였다. 그러나 실패 앞에서도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다시 한번 일어선다. 그 후 부정축재자, 주식헌납 등 정치적 수레바퀴에 함께 뒹굴며 어떤 고난에도 좌절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기업인으로써 그의 식솔 때문이라도 후퇴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1976년인가 그는 위암 진단을 받아 병마와 싸우면서도 끊임 없는 진취적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의 기업관에서 볼 수 있는 명언을 하나 소개하자면 “기업의 적자는 한 기업의 적자로 그치지 않는 일종의 사회악(惡)”이라고 했다. 또 “기업 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생계를 보장 해 주고 세금을 납부 해 국가 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 고 말 했다. 참으로 이해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에 따르고 싶은 정신이 아닌가. 한국인은 모든 분야에 모두가 기업정신과 그에 따른 애착심으로 또한 예술 감각으로 문화생활을 할 때 윤택한 역사를 만들 것이라고 본다.
모든일에 해답은
내 마음속에 답이 있는듯...
이왕이면..
밝고 따뜻하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후회라는 단어가 안떠오르는 그런
해답으로..
오늘도..
내일도..
늘..방긋 방긋웃으면서
인사할수있는 우리님들이길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상큼하고 즐거운 11월 첫날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