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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부를 원하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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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31 오후 8: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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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터넷방송 대표/통일부 통일 전문위원/새누리 해운대구 당원 ***
우리는 어떠한 정부를 원하고 있는가?―과연 어떠한 정부가 이 도전에 응할 수 있는가?
전 세계는 갈수록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하여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고 문제가 더 광범위하고 해결될 전망과 해결된 것보다 해결책이 요원해 보이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서로가 평화롭게 협력하는 사회가 되게 하는 문제나 사람들 사이에 만족할만한 복지를 시행되게 하는 문제와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과 모든 사람들 개개인을 만족시키는 일을, 정부가 이 도전에 응할 수 있는가?
한 240여 년 전의 한 국민은 자기들이 예속되어 있는 정부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대영제국의 정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미국인 정치가 토머스 제퍼슨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절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정부에 대한 오늘날의 도전은 국민에게 그러한 “권리들”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온전하고 만족스러운 생활과 더불어 자유와 행복을 참으로 누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한 인생을 획득하기 위해서 어떠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였다. 에이브러햄 의사와 로우즈 프란츠블라우 의사는 그들의 저서 「건전하고 행복한 생활: 가정 지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만일 우리가 전 세계 사람들의 여론을 조사해서 우리 모두가 어떤 종류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가에 대해서 인간 본성에 묻는다면 분명히 우리 모두는 최소한도의 요구 조건들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최소한도의 요구 조건들” 즉, 요건들이란 무엇인가?
그들은 충족되기를 바라는 요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첫째로, 이 의사들은 “전쟁 없는 세상”을 꼽았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전쟁을 종식시킬 필요성에 동의할 수 있다. 국가들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희생시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러나 그 어떤 정부가 전쟁을 없애는 도전에 응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굶주림이 없는 즉 기근과 빈곤을 영원히 추방하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라고 이 의사들은 기술하였다. 모두에게 풍부한 식량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다시는 굶주림이나 영양실조를 겪지 않고 지상의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먹을 것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웅대한 일일 것인가! 정부가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인가?
“세째로, 질병이 없는 세상 즉, 모두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예방과 치료가 가능한, 병에서 벗어난 나날들을 지낼 가망이 있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라고 이 의사들은 계속하였다. 의문의 여지 없이, 인생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 건강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아무도 다시는 앓지 않을, 즉 아무도 감기나 기타 다른 괴로움을 겪지 않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환영할 만한 구원인가! 정부가 이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큰 도전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생명, 자유 및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려면 정부는 아직도 다른 근본적인 요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 의사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할 만한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위한 일거리가 있어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실직이 없어야 하며 모두를 위해서 만족할 만하고 생산적인 활동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이러한 요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
계속해서 이 의사들은 이렇게 부언하였다. “모두에게 공정한 법률 하에서의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가 자기의 능력과 재능을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며, 자기의 수고에 대해 공정한 보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오늘날의 극심한 부정, 불공평 및 편견이 제거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부가 이 일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살기에 바람직한 세상을 가지려면 아직도 다른 요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 의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그러한 세상은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좋은 것들을 즐기기에 충분한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성실, 사랑, 비이기심 및 동료 인간들에 대한 관심 등과 같은 특성들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요건들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성취되고 있지 않기는 하지만 이것들이 성취되길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가? 인류의 진정한 요건이 어떤 방법으로 충족될 수 있는가?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면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러한 권리들[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을 보장하기 위해서 인간들 사이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렇다.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좋은 정부가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의 초기 정치 지도자 존 C. 칼호운이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인간에게는 정부가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하고, 사회는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 필요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부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권리를 가진 지도 혹은 통제”라고 정의되어 있다.
정부는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들을 제정하고 시행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서, 특히 이 복잡한 사회 내에서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폭주하는 교통량을 통제하는 아무런 지침이 없다면 혼잡한 길모퉁이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것은 재난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폭주하는 교통량을 통제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법률을 시행하여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유지시키는 일, 식량 생산 및 분배를 감독하여 모두가 풍부한 양식을 받게 해 주는 일, 복지 시설을 마련하여 누구나 건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일, 모두에게 가치 있는 직업을 알선해 주는 일 등은 훨씬 더 어렵다. 이런 필요들과 사람들이 인생을 참으로 즐기려면, 충족되어야 할 다른 여러 필요들을 채우려면 유능한 정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면 어떠한 정부가 이 도전에 응할 수 있는가?
인류의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정부 즉 “권위를 가진 지도 혹은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하느님의 다스림 하의 정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실상,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이러한 약속이 성서의 주제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점을 알고 놀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성서 어디에서 하느님의 정부에 대해 말하고 있단 말인가?” 성서를 꺼내어 이사야 9장 6절과 7절을 펴보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 번역판에 따라서 약간의 단어 차이가 있겠지만 그 뜻은 비슷할 것이다. 아래에 인용하면 이렇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그의 어깨 위에 군왕의 통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놀라운 조언자’, ‘위력 있는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서, 군왕의 통치의 풍부함과 평화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정 없는 때까지 공의와 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고 지탱시키려는 것입니다.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입니다.”
이 성구에서 다윗의 왕좌라는 말을 들어서 이스라엘 나라를 말한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늘날 이스라엘 공화국은 여호와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신권국가가 더는 아니며 선거에 의해서 그 나라 국민이 선택한 정부이다. 하지만 성구는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는 여기서 장차 있을 한 아들, 즉 왕자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왕의 아들’은 위대한 통치자 즉, “평화의 군왕”이 될 것이다. 그는 참으로 유능한 정부 즉, 끝없는 평화를 이룩할 정부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될 것이다. 아마 우리는 이 아이의 신원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천사 가브리엘은 그의 탄생을 알리면서 그가 예수라 불리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이렇게 부언하였다. “[그가]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왕국]가 무궁 하리라.”(누가 1장 31, 33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 땅에 있는 그분의 제자들의 주된 활동은 하느님의 이 왕국에 대해서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이었다. 성서 내에 그들은 그 정부에 대해서 약 140회 이상 언급하였다.
예수께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내용만 다시 보아도 이러하다. “나라[왕국]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장10절)
그러나 과연 이 왕국 정부의 통치는 어떻게 수립될 것이며, 그것은 어떻게 기능을 발휘할 것인가? 인간이 그것을 수립하여 운영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정부를 인간이 만들 수 있는가?
한때 “지상의 교회가 하느님의 왕국이다”라고 가르친 적이 있다. 이러한 가르침이 생겨난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당시 세상의 지배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후반에 교황들은 정치적 권력을 두고 왕과 각축을 벌였다. 그들은 강력한 군대를 거느렸다. 존 F. 어스트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교황은 왕의 역할과 겨루려 하였으며 세속 문제들에 대한 중재자가 되려고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권세를 하느님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여러 나라의 왕들 역시 통치권의 신수설(神授説)을 주장하였다. 「신 가톨릭 백과사전」은 이렇게 지적한다. “신수설은 여러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자기들 권력이 교황들의 권력과 똑같이 신성한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입장에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권리로 통치한다고 주장한 교황들과 다른 통치자들은 좋은 정부를 마련해야 하는 도전에 응하였는가? 그들의 신민은 생명, 자유 및 행복을 누렸는가?
아니다,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이러한 통치권들은 심한 부정과 압제의 오점을 남겼다.
사람들은 무의미한 전쟁에 참전하도록, 그리고 수백만 명의 생명과 행복을 앗아간 유혈 십자군에 가담하도록 동원되었다. 또한 극악한 종교 재판을 행하여 수천 명의 희생자들을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하여 처형하였다. 참으로, 하느님의 왕국을 교회의 통치 혹은 신수설을 주장한 왕들의 통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하느님께 얼마나 모독적인 일인가?
좀더 최근에 와서 종교적 견해들은 수정되었다. 1916년에 출판된 「사도 교회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 일부 신학 집필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교의 영향력하에서 발전하여 결국 왕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하였는가?
아직도 살아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생애 중에 소위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대량 학살을 범하였다. 교회 역사가 롤란드 바잉튼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국의 교회들은 특히 제일차 세계 대전에 대하여 십자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국의 교역자들 말에 의하면 바잉튼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것은 거룩한 전쟁이었다. ··· 독일인들은 야만인이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지구에서 괴물들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런던의 주교 A. F. 윈닝튼 인그람은 영국민을 이렇게 충동시켰다. “독일인들을 죽이라—그들을 꼭 죽여야만 한다. ··· 내가 수천 번 말했듯이 나는 그것을 순결을 위한 전쟁으로 본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독일 쾰른의 가톨릭 대주교는 독일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우리가 빠져들게 된 정의를 위한 이 전쟁에서 하느님은 우리 편이다. 우리는 여러분이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최후의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20여 년 후인 1939년에 여러 나라들이 제이차 세계 대전에 휘말려 들어갔다. 또 다시 참전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그리스도교 나라로 자처하는 나라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그리스도교 영향력 하에서 발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제이차 세계 대전이 1945년에 끝난 후의 35년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것은 인간 정부들이 마침내 인류의 필요를 성취시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가?
사람들은 오늘날 구출의 희망이 실현되기는커녕 오히려 세계적인 문제들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실패는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 실제로 문명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전쟁을 제거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고려해 보라. 그것이 성공하였는가?
그와는 거리가 멀다! 1945년 이후에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터진 거의 150개의 전쟁에서 2,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당하였다. 어느 날이건 간에 평균 12개의 전쟁이 세상 어느 곳에선가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 정부들은, 건설, 환경 미화, 교육, 연구 등등과 같은 유익한 용도에 달리 바쳐질 수 있는 자금을 소모하여 전쟁 준비에 매일 10억 달러를 훨씬 넘는 돈을 지출하고 있다.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에 얼마나 큰 실패인가!
정부들은 서로 모여 무장 해제에 동의해야 함을 우리의 이성은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였는가? 그들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군비 경쟁을 계속한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에 사이러스 밴스 전 미 국무장관은 자기 나라가 가지고 있는 파괴 능력을 짐작케 하는 이런 말을 하였다.
“오늘날의 미사일들 중 어떤 것은—단 하나만 가지고—제2차 세계 대전 전 기간에 모든 전투 지역에서 우리 폭격기들 전체가 투하한 것보다 다섯 배의 폭발력을 발휘한다. 물론 우리 무기 대부분은 그것보다 작다. 그러나 우리는 도합 9,000개의 핵탄두와 폭탄을 미사일과 장거리 폭격기에 배치하였다. 소련은 우리를 겨냥하여 약 5,000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수치를 극적으로 증가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무기 한두 개만 가지고도 밀워키만한 크기의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
지구와 그 위의 생명체는 무엇이든 완전히 멸절시킬 잠재력이 얼마나 큰가! 그러한 핵 파괴 능력은 우리를 안전 보장을 느끼게 해 주는가? 그것은 우리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 자유 및 행복’에 기여하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를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의 인간 정부들의 무능함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을지 모른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에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의학 박사 앨버어트 스젠트지오르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동네가 어두워진 후에는 강도를 만나거나 살해당할까 두려워서 밖에 나갈 수 없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슬프게도 범죄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자기 집에 갇힌 죄수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정부들은 그 상태를 시정하는 데 무력함이 입증되었다.
더우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 그러나 어떤 지역들의 곡창 지대는 식량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심지어 식량이 남는 나라들에서도 가격이 매우 빨리 치솟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식량을 충분히 살 수 없다. 인간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또한 에너지 문제가 있다. 해, 바람, 강, 호수 및 바다에서 계속 쓸 수 있고 무해한 에너지를 엄청나게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정부들은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선견지명의 빈약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땅의 계속 쓸 수 없는 석유와 가스 매장량을 파냈는데, 그렇게 하여 동시에 그들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상당히 오염시켜 버렸다.
지상사를 다스리는 인간의 노력을 조사해 본 결과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인간들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성공적인 정부를 세울 수 없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문명은 결국에는 붕괴되었다. 역사란 실패한 노력들, 실현되지 못한 열망에 대한 이야기다. ··· 그러므로 역사가라면 비극의 불가피성을 느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정치가들이 과거의 지도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이년 반 동안 카터 대통령의 연설문 수석 작성자로 일한 제임스 M. 팔로우즈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나는 정부 내에서 많은 변화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 이제 나는 이 정부가 카터나 다른 대통령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인간이 반복적으로 실패한 사실로 우리가 놀라야 하는가? 우리가 성서를 연구해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통치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조사한 결과는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 진실함을 강조해 줄 뿐이다.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예레미야 10장 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 부부가 그분의 권위에 반역한 이래 인간들이 자치 정부를 실험해 보도록 허용하셨다. 왜 허용하셨는가? 인간과 천사들에게 대상 교육을 베푸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이 교육에서 무엇을 배웠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알게 된 점, 즉 인간은 성공적으로 자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이러한 점도 깨닫게 된다. 즉, 인류의 정부들이 하느님의 허락으로 기능을 발휘해 왔지만, 우리 모두가 살고 싶어할만한 세상을 누리려면,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왕국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른다. “인간들이 정부에 대한 그 도전에 응하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가? 우리가 좋은 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달리 어떻게 세상이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설립하시는 데 인간을 사용할 것이라는 교회들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주장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성서는 왕국이 인간 노력에 의해 임할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왕이 되라는 권유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 6:15; 18:36)
「존 도반 성서 해설 백과」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왕국이란 결코 인간이 시행하는 행동이나 인간이 수립한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왕국을 설립하려는 노력의 이념이 아무리 숭고할지라도 이 성서 용어는 현대 자유 신학 용어와는 전혀 상반된다. 왕국이란 하느님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 인간의 업적이나, 심지어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의 업적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의 왕국은 어떻게 임할 것인가?
성서의 대답에 깊이 유의하라. 인간 정부와 그 무익성을 묘사하고 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느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다니엘 2장 44절
인간 정부들을 멸망시키고 자신의 정부를 출범시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혹하거나 부당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가?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의 정부 형태를 영속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완전한 정부를 고대하고 살아남을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새 하늘”의 통치가 지상의 인간 사회에 축복을 쏟을 것을 설명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니라.”—이사야 65장 17-19절
그러므로, 인간이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부를 마련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 자신의 정부를 설립하시는 것이 시기에 알맞고 적절하다는 점에 대해 확실히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하느님 왕국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과 우리가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마땅히 알고 싶어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서두에서 에이브러햄과 로우즈 프란츠블라우 의사들의 저서 「건전하고 행복한 생활: 가정 지표」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정부에게 기대한 요건들을 충족시킬 정부에 대해서 성서를 통해 확인해 보고 하느님의 왕국 정부에 대하여 지식을 갖게 되기를 권해 드린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댓글에서 자신의 이 메일 주소를 남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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