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의 문화유산

울산문화 칼럼 | 2015-12-04 오후 11:47:57 | 조회수 : 2751 | 공개

 

                   태화강의 문화유산

 

 

                                                                                        서 창 원 지역홍보연구소장

 

 

1. 울산의 자연적 여건과 하천

 

울산광역시는 한반도 남동부에 위치하여 태화강과 울산만 주변 일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양산시, 부산광역시 기장군,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밀양시, 경상북도 청도군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동해안을 마주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이 태백산맥에서 동해 바다로 줄기를 치는 낙동정맥이 펼쳐지는 곳에 자리한 울산은 서쪽으로는 가지산(1240), 신불산(1209), 고헌산(1033) 등의 고산 준령이 평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운산, 정족산 등이 있다.

울산광역시의 주요하천은 서고동저형 지형을 따라 동해로 흐르는 태화강( 동천 포함), 회야강, 외황강 등 3개의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지천이 100여개가 산재해 있다. 그 외 복안천, 중리천, 활천천 등 형산강 상류지역 일부와 낙동강 수계의 밀양강 상류인 단장천과 소호천이 울산광역시 관내를 흐르고 있다.

 

2. 태화강의 현황과 유래

 

태화강은 가지산과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대암호와 사연호를 만들고 선바위를 거쳐 남구와 중구의 경계를 가르며 동해의 울산만으로 흘러 들어 가는 길이 44.7 km의 강이다.

태화강은 하천법상 직할하천 1개소, 지방하천 1개소, 준용하천 104개소로 총 106개 하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연장은 503.이며 유역면적은 총 652.4 km2에 달하여 울산광역시 총면적인 1,056.28 km2 (전국의 1.1%)의 약 61.8 %에 달한다.

태화(太和)란 ‘천하가 태평하고 화목하다’는 뜻으로서 불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신라시대 10대 사찰의 하나인 태화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산동반도에 있는 태화지변을 지날 때 신인의 계시를 받고 돌아와 사포 (지금의 태화동 일대)에 자리를 잡고 지은 절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태화강이나 태화동, 태화루, 태화교, 태화 로터리 등의 명칭들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3. 태화강의 발원과 소하천

 

태화강은 크게 나누어 세 갈래의 방향에서 시작된다. 첫째, 가지산 쌀바위와 청수골 및 고헌산 서쪽 외항재에서 반송 앞 까지 이며, 둘째, 두서면 탑골에서 미호천을 따라 대곡천을 거쳐 사연댐 까지 이며, 셋째, 영취산 기슭 방기리에서 보은천을 거쳐 대암댐으로 흐르는 강줄기이다. 따라서 태화강 발원지는 중앙의 언양 방면, 북쪽의 두서 두동방면, 남쪽의 삼남 삼동 방면의 세 갈래 물줄기가 모여들어 태화강을 이루어 동해로 흘러든다.

태화강의 대표적 발원지로는 가지산 북동쪽에 위치한 백운산이라고 하는데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 선생도 이 물줄기를 태화강의 본류로 삼았다고 한다.

 

첫째, 언양방면의 발원지는 두곳으로 크게 나뉘는데 그 한줄기가 가지산 쌀바위에서 석남사 앞을 흐르는 능동천과 배내고개에서 청수골을 거쳐 살티마을 앞을 흐르는 덕현천이다. 이 두 물줄기는 상북면 소야정에서 합류하게 된다. 또 하나는 경주시 산내면 외항재에서 시작하여 고헌산 서쪽을 거쳐 위 소야정에서 흐르는 물줄기와 궁근정에서 합류하는데 이 세 곳의 발원지에서 태화강의 총 길이는 46~47 킬로미터로 보고 있다. 이 물줄기가 합하여 언양을 지날 때 이를 ‘남천‘으로 불러 왔다고 한다. 태화강은 반송리 앞에서 작괘천과 만나는데 작괘천은 신불산 기슭의 명승지인 홍류폭포를 시작으로 작천정을 지나 동으로 흐르는데 취서산에서 시작한 상천천이 가천천과 합하여 삼동천을 이루어 반송에서 태화강 본류와 만난다 .

 

둘째, 두서 두동방면의 태화강 북쪽 발원지는 두서면 백운산 기슭의 절터가 있던 내와리 탑골마을 인데 백운산 계곡의 탑골샘에서 사작하는 대곡천이 주류인데 현재 건설중인 대곡댐과 국보 제 2147호 천전리각석과 국보 제 285호 대곡리반구대암각화를 거쳐 사연댐으로 흘러드는데 그 길이가 48 킬로미터라고 한다. 대곡천 서쪽의 물줄기로는 백운산 남동 기슭의 전읍천, 인보천, 마병천과 고헌산 동남기슭에서 시작한 구량천, 반곡천이 흘러들며 대곡천 북동쪽에는 주원천,연화천,도리천이 연화산 및 국수봉 북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흘러든다.

 

셋째, 삼남 삼동방면의 태화강 남쪽 발원지는 취서산 동남 기슭에서 시작한 방기천이 남쪽의 정족산 무제치늪에서 시작한 조일천과 금곡천이 합하여 보은천을 이루어 둔기리 대암댐과 만난다. 또한 문수산과 남암산에서 시작한 문수천이 작동천과 함께 둔기천과 합하여 대암댐을 거쳐 태화강 본류지점인 황새골과 만나게 된다.

 

그밖에도 태화강을 이루는 수많은 물줄기가 있는데 국수봉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국수천은 선바위가 있는 백룡담 바로 위로 흘러 드는데, 남쪽의 척과천,천상천, 구영리의 구영천 및 치술령과 국수봉 동쪽에서 시작한 척과천이 중구의 다운동에서 태화강과 만나게 된다.

또한 국가하천 시점이 되는 중구 다운동 구 삼호교에는 남쪽의 무거천이 합류하면서 태화강은 십리대숲을 굽어돌아 북쪽으로 꺾이면서 태화교 근처 용금소에서 시가지를 가로질러 흐른다. 태화강은 명촌대교를 앞두고 북쪽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에서 발원한 동천이 합류한다. 동천은 북구의 동대산맥 서쪽기슭 지류인 매곡천, 호계천, 창평천과 동천의 서쪽을 이루는 천곡천, 상안천, 시례천, 성안천, 약사천이 있다. 태화강은 국가하천 종점이 되는 남구 매암동 건너쪽에서 명촌천과 양평천과 마지막으로 합류하여 울산항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옥동 삼호산에서 발원하여 울산항으로 흐르는 여천천은 원래 여천동 돗질산 서쪽 아래를 지나 태화강으로 흐르던 것을 1920년대 일제가 간척을 통한 농토 확보를 이유로 돗질산 허리를 잘라 물길을 바꾸어 놓았다.

 

 

4. 태화강의 문화유산

 

 

1)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B-다

 

 

울산문화의 기원을 상징하는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이 반구대에서 남쪽으로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떨어져 있는데 지난 1971년 12월 25일 이곳 반구마을 최경환 선생의 안내로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 일행에 의해 재발견되어 우리나라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귀중한 유적으로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암각화란 ‘바위에 그려진 그림‘을 말하며 바위그림이라 한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의 지류인 대곡천 중류에 위치한 사연댐 끝자락 즈음 북쪽을 향해 있는 바위 벽면에 새겨져 있다. 이곳 반구대는 일찍이 고려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자주 머무른 곳으로 계곡의 경치가 매우 뛰어나 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되기 이 전부터 작천정과 같은 명승지로 잘 알려진 곳으로 집청정과 같은 유서깊은 누각과 반구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반구대란 명칭은 마치 산등성이가 거북이 목을 내밀며 엎드린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 그림이 있는 절벽은 높이 70여 미터 가량의 돌 병풍을 펼친 듯 반반한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데 대곡천과 거의 맞닿아 있다. 또한 바위 그림의 윗부분은 마치 지붕의 처마처럼 드리워져 있어 바위그림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로 바위그림은 높이 3미터, 넓이 6.5미터의 주암면에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으며 좌우 20미터에 걸쳐 모두 270여점의 형상들이 확인되고 있으나 오후 3~4시 경 햇볕이 들 무렵을 제외하고는 전체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바위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풍습은 세계적으로 구석기시대 이후 부터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를 비롯,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서북 러시아 해안에 새긴 바위 그림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바위그림들은 시베리아 동쪽으로 뻗어 예니세이 강변의 청동기시대 타가르 문화와 몽골 알타이 지역에도 존재하는데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반구대 암각화의 내용은 크게 나누어 고래를 중심으로한 거북, 물개 등 바다 동물과 사슴, 호랑이, 멧돼지를 비롯한 육지동물, 그리고 사람의 형상, 작살, 그물 따위의 생활도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고래가 가장 많아 60여 종을 헤아리고 있다.

고래의 종류로는 귀신고래, 범고래, 긴흰수염고래, 향유고래, 고래상어가 보이고 있으며 고래의 생태로는 공기방울을 뿜으며 둥글게 물고기를 모으는 모습과 새끼를 업은 어미고래의 모습과 작살을 맞은 모습이 보이며 특히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가 고래를 잡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일찍이 울산지방이 포경의 근거지인 장생포항과 관련지을 수 있는데 그 당시 내륙 깊숙이 바다였던 점을 짐작할 때 선사시대에는 반구대 일대가 고래잡이의 중심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암각화가 새겨진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 까지 이 지역에 살았던 선사인들이 후손들에게 고래잡이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장이며 사냥한 집승들의 재생과 풍요를 빌었던 신성한 제의 장소로 보고 있다.

이렇게 반구대 암각화는 정확하게 사물을 포착하여 특징적인 요소를 과감히 강조 또는 생략하는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선사인의 순수한 생명력이 담긴 미술작품으로 오늘날 울산광역시를 대표하는 특화문화 관광자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매우 활발하며 우리문화의 기원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실측조사를 통한 새로운 내용이 밝혀지고 있다.

 

2) 천전리 각석 B-다

 

우리나라 선사 암각화 연구의 첫장을 열게한 천전리 각석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대곡천에 자리하고 있는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로부터 2km 상류에 있다. 이 암각화는 지난 1970년 12월 25일 반구마을 최경환 선생의 제보로 재발견되어 지난 1973년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천전리 각석은 대곡천이 휘감아 도는 산자락 끝에 동남쪽으로 향해 약간 비스듬하게 숙여진 바위면에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다.

최근 실측 조사된 이 바위그림의 구성 양식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연구 결과와 다른 내용이 살펴지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에 따르면 바위그림의 상단부에는 주로 기하학적인 문양들로 가로 10m 세로 3m의 바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주로 마름모 꼴이 살펴지는 가운데 동그라미, 겹동그라미, 소용돌이, 물결 문양들도 배치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이 바위그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머리에 무엇인가 쓴 사람의 얼굴이 살펴지고 있어 추상적이면서 기하학적인 도형들과 어우러져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사실적인 표현으로 구성된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는 다르게 거의 같은 장소에 발견된 서천전리각석의 이러한 기하학적인 문양에 대해 그 추상성으로 해석의 어려움이 많다. 다만 제작 연대는 신석기 중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주로 인간의 내면세계에 잠재된 자연에 대한 신앙관념의 의식행위의 표현으로 보면서 이들 문양이 수렵 농경생활과 관련된 곡식의 성장과 수확, 생명의 잉태를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종전에 연구에 의해 사슴 등 둥물의 형상으로 분류되었던 문양들도 세로운 연구에 의하면 기하학적인 문양의 연결 부분 중 특별히 강조되어 보여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천전리 각석의 하단부에는 신라시대에 철기류로 조성된 선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의 행렬, 돛을 단 범선, 네발이 달린 용의 모양이 살펴지고 있다. 특히 한자로 세겨진 여러 글씨 가운데 호세, 수품, 영랑 등 여러 화랑의 이름이 있어 당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 법흥왕 2년 (525) 때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어 우리나라 고대 사회상를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 가지산 석남사 B-가

 

태화강의 발원지의 하나인 가지산(1,099) 기슭에 석남사가 있다. 석남사는 1200년전 신라 헌덕왕 16년 도의국사가 창건한 절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고승에 의해 다시 고쳐 지었다. 석남사란 가지산 남쪽에 자리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석남사는 도의국사의 사리탑으로 알려진 석남사 석조부도(보물 제369호)가 대표적 문화유적이며 그 외에도 삼층석탑(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 삼층석가 사리탑과 석조수조(지방문화재 자료 제4호), 엄나무 구유가 있다.

석남사 석조부도는 신라 후기 부도 가운데 단아한 조형미가 신라 불교조각의 정교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탑신은 팔각 원당형으로 여덟 개의 면에 사각 테두리를 둘렀다. 앞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를 돋을새김 했고 양 옆면에 사리를 지키는 수호신인 신장입상을 새겼다.

옥개석은 추녀가 단정하며 아래 2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지대석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부족하여 가파르게 보이나 각 부분 사리탑의 구성요소가 온전히 남이 있는 신라 시대 말 작품이다.

석남사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세운 신라시대 전형적인 탑으로 도의국사가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염원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엄나무 구유는 스님들이 공양을 지을 때 쌀을 씻어 담아 두거나 밥을 퍼담아 두었던 나무그릇으로 1천명의 공양을 넉넉히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석남사에는 지금도 물을 담아 두는 석조수조가 절의 취사장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절에서 사용되는 수조는 일반적으로 긴네모꼴이나 이 수조는 규모가 매우 클뿐 아니라 모서리를 두겹으로 둥글게 돌려 깍아 모양을 내었다.

석남사는 조계종 산하 80여개의 선원 중 문경봉암사와 더불어 종립 특별선원으로 지정될 만큼 비구니 청정도량으로 천연기념물 제 323호인 붉은배새매 등 희귀동식물이 관찰되고 있을 정도로 자연경관이 잘 보존된 절이며 가지산 쌀바위 등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4) 박제상 유적지 b-다,라

 

이 유적지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1호로 신라 충신 박제상과 김씨부인의 충절을 기려 세운 사당인 두동면 은편리 치산서원과 치술령의 망부석,국수봉 기슭의 은을암 등 세 유적을 일컫어 말한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내물왕 8년(363)지금의 경남 양산시 충효동에서 태어났다. 박제상은 눌지왕이 신라왕 위에 오르자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왕의 두 아우를 구하고자 했는데 먼저 고구려에 가 있던 복호를 구출해 귀국 시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내었으나 자신은 붙잡혀 심한 고문 끝에 불에 타 숨졌다.

이 때 박제상의 부인 김씨는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의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숨은 곳이 은을암 이라 한다.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눌지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는 대아찬이라는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김씨 부인은 국대부인으로 추봉하였다.

 

 

5) 간월사지 C-나

 

작괘천의 상류인 홍�폭포가 있는 간월산 기슭에 위치한 간월사 터는 1984년 한 농부가 논흙으로 덮혀있던 불상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간월사는 금당지와 두개의 탑,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370호)이 유물로 전하고 있는데,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왔다고 한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허물어졌다가 조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으나 헌종(1836)때 큰 흉년이 들어 폐사하고 말았다. 간월사 터에는 금당지 등의 건물 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이 남아 전한다. 간월사는 절의 본당이 남향인 보통의 절과는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특이하며 금당 앞에 세워진 두 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8세기 신라탑의 형식을 띄고 있다.

 

6) 만정헌 C-나

 

간월산 기슭 상북면 명촌리에 자리잡은 ‘만정헌(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2호)은 울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문화재이다. 500년전 현감 벼슬을 지냈던 김자간이 경주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세운 계림 김씨 정각으로 명헌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만년각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홑처마에 기둥머리에는 날개모양의 장식을 단 전형적인 조선 후기 건축물이며 특히 싸리나무로 만든 기둥이 독특하다.

200년전 새로 고쳐 지으면서 본래 1칸이었던 것을 2칸으로 늘렸다가 현재는 정면 3칸이며 측면은 오른쪽 2칸, 왼쪽 3칸이며 사랑채가 있는 한쪽은 1칸 온돌방이며 나머지는 마루로 되어 있다.

 

7) 작괘천 작천정

 

작괘천은 신불산 홍류폭포의 물이 작천정 앞으로 흐르는 옥류계곡으로 계곡 바위의 파인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둔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작괘천 일대는 예로부터 물이 맑고 경치가 뛰어나 철 따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특히 4월 중순 벚꽃이 필 무렵이면 장관을 이룬다.

이곳 물가에 세워진 작천정은 고종 31년(1894)에 언양현감 정긍조의 제청으로 1899년 울산군수 최시명이 1902년 건립하였다.

이 일대는 일찍이 임진왜란 때 언양 의병활동 및 3.1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언양지방 의병들의 공적을 기리는 선무원종 공신의 이름을 새긴 바위와 비석, 언양 3.1독립운동비가 세워져 있으며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글을 새긴 모은대가 있다.

 

8) 백룡담 선바위 C-라

 

태화강 중류의 백룡담 가운데 30미터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선바위에는 선녀같은 울산 아가씨와 이 마을에 동냥하러 온 스님 사이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태화강에서 빨래를 하던 울산 아가씨에게 태화강에서 떠내려 오던 선바위가 갑자기 덮치자 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스님과 함께 깔리어 죽었다고 하는 전설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그 뛰어난 경치로 정몽주 서거정 이언적 정구 김종직 선생과 같은 인물이 즐겨 찾아와 시문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태화강 선바위는 오랜 세월동안 태화강 물길이 남쪽으로 급히 굽이쳐 꺽이면서 백룡담과 함께 생겨 났다.

이곳 태화강가 절벽에는 입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가뭄이 들었을 때 호랑이 머리를 백룡담에 던져 넣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속설이 전하고 있다.

 

9) 베리끝의 전설 C-다

 

중구 다운동 척과천과 범서면 구영천 사이 태화강 중류 양지바른 바위 절벽을 베리끝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 농부 부부가 누이동생을 데리고 살았는데 어느날 농부가 논에 간 사이 폭우가 쏟아져 태화강이 홍수가 나 아내와 누이가 떠 내려 가게 되었다. 황급히 집에 돌아온 농부는 먼저 아내를 구하고 다시 여동생을 구하려 하였으나 여동생은 안타깝게도 통나무를 타고 떠 내려 가고 말았다.

이 누이동생은 올케만 구하고 자기를 구하지 못한 오빠를 원망하며 슬퍼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남창 남창 베리끝에 무정하다 오라버니, 나도 죽어 환생하면 낭군부터 정 할라네” 이 슬픈 처녀의 노래는 오늘날 까지 울산의 모심기 노래 말로 전하고 있다.

베리끝 아래는 태화강 물길이 선바위를 돌아 급히 남쪽으로 굽이치면서 다시 동쪽으로 돌면서 북쪽 벼랑을 치고 흘러 생긴 깊은 벼락소(召)가 있다. 이 벼락소는 용금소 등 태화강에 있는 여러 물길 가운데 수심이 가장 깊으면서 태화강의 자연경관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10) 상천리 국장생 석표 D-나

 

장생표는 원래 사찰의 입구에 세워 사찰의 일정한 성역과 토지를 확정하는 구역 표지이다.

여기에 국장생이란 표시는 국가의 명에 따라 세운 장승이란 뜻이다. 따라서 상천리 국장생 석표는 양산 통도사에서 동북쪽으로 4km지점에 토지 경계선을 표시한 것으로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4만7천보의 구역 12곳에 세운 장생표 중 하나이다. 이 석표는 기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다듬어 세웠는데, 이두문으로 적힌 비문의 내용은 세워진 위치, 국가에서 통첩을 내려 세운 사실, 경계표시, 석표를 세운 일자가 새겨져 있다.

 

충효사

 

태화강 상류 남천교를 지나 후리마을에 있는 충효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함께 전사한 박언복 박인립 부자를 모신 사당이다. 충효사는 조선 헌종 6년(1840) 언양읍 반곡리에 세웠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박언복은 아들 인립과 동지 김득례와 더불어 죽기를 맹세하고 선조 26년 많은 왜병과 싸우다 전사했다. 나라에서는 박언복은 선무원종 공훈 3등에, 아들 인립은 선무원종 공훈 1등의 관위를 주어 이들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16) 열녀 정씨와 범무덤 C-나

 

상북면 능산에서 향산리 본동으로 가는 산마루에 열녀 동래정씨 열녀각(烈女閣)과 범무덤(虎墓)이 있는데, 이 열녀각에는 ‘열 숙부인 동래정씨 정려비’가 있다. 그리고 범무덤에는 ‘영호영세 불망비’란 비석과 무덤의 상석에는 ‘영호지총’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기이한 사연은 지금부터 600년 전에 동래 정씨가 언양 입향조인 남편 유혜지가 일찍 죽자 뒷산에 장사 지내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던 중 움막에 송아지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밤이면 나타나 시묘살이하는 동래 정씨를 지켜 주었다는 사연이 전한다. 어느 날 부인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 나 살려 달라고 애원 하기에 살펴보니 함정에 빠진 호랑이와 그를 잡으려는 동네 젊은이가 있었다.

정씨 부인은 이들에게 이 호랑이는 자신의 시묘살이를 지켜준 신령스런 호랑이라고 말하고 살려주기를 간청하여 살려 내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의 보살핌으로 시묘살이 3년을 무사히 마치고 몇일 후 부인이 죽었다. 그런데 뒤이어 호랑이도 죽고 말았는데 이를 본 가족들이 이 호랑이의 신령스러움에 대한 보답으로 극진히 장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며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태종실록 등 여러 문헌에서 전하고 있으며 언양 남부리에 살았던 후손 고 유덕조 옹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오기도 했다.

 

용화사

 

언양읍과 상북면 경계지점의 태화강 상류지점인 상북교를 건너 상북면 천전리의 용화사 법당에는 하얀색의 돌부처가 있는데 원래 이 부처는 냇가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군역(軍役)을 치루는 대신 일년에 군포(軍布) 한필씩 내어야 했는데 당시 군포 한필이 쌀 6말이 되었다고 한다.

나라의 지나친 군포 징수에 이 곳 천전리 사람들도 집집마다 군포를 바쳐야 했는데 마을사람들이 냇가를 지나며 이 돌부처에게 빌었다 “저기 많은 돌들이 모두 장정이었다면 모두 군에 보내고 군포 걱정은 안해도 되겠는데 그 많은 군포를 어떻게 장만합니까? 걱정입니다”하였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이 돌부처 앞을 지나다 보니 두 어깨 위에 베필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돌부처의 머리 위로 오색찬란한 서기가 가득하더니 “마을사람들아! 나는 미륵존불이다. 너희들의 정성된 기도가 가상하여 이 군포를 내리노니 나라에 바치고 고생을 면하도록 하여라”는 소리가 들려 마을사람들이 미륵불에게 감사의 합장을 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12) 언양 고인돌 C-나

 

울산지역에는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구 다운동, 두동면 만화리, 은편리와 언양읍 화장산 일대에 흩어져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고인돌이 태화강 상류지점에 한국 최대의 고인돌이라는 평가를 받는 언양 고인돌(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이다.

높이 3미터 길이 7미터 가량의 거대한 두껑 돌을 네 개의 받침돌을 괴게 했는데 그 무게가 약 300톤에 이른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이 일대를 지배했던 부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거대한 고인돌을 통해 언양지역 일대는 청동기 시대에 이미 어떤 정치적 지배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동면 은편리의 지석묘 군( 울산시 기념물 제 21호)은 숲안 마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둥글게 패인 알모양의성혈이 새겨져 있으며, 상북면 향산리 지석묘는 조선시대 정성업 장군이 무예를 닦던 바위라고 하여 일명 장군 바위라고 불리기도 하며 7개의 성혈이 남아 있어 칠성바위라고 하기도 한다. 상북면 지내리 지석묘는 바둑판식으로 성혈이 나 있으며

언양 송대리에서 상북면 지내리 신리마을로 연결되는 소로변 위에 있다.

두서면 인보리 지석묘군( 울산시 기념물 제26호)은 백운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구릉의 끝부분에 위치하며 현재 2기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양읍 반곡리 지석묘군( 울산시 기념물 제 27호)은 고헌산 동남쪽 능선자락 구릉 위에 2기가 있다. 두서면 복안리 지석묘( 울산시 기념물 제28호)는 천마산의 동쪽 구릉 아래음지마을 뒤 게단식 경작지에 있다.

두동면 만화리 지석묘( 울산시 기념물 제 29호)는 비조마을 회관 앞에 있는 비둑판식 지석묘이다. 북구 상안동 지석묘는 동천의 서쪽 신답마을의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0여개의 성혈이 나 있다. 북구 창평동 지석묘( 울산시 기념물 제31호)는 동천 하류 오른쪽 난곡마을 구릉과 경작지에 각각 1기씩 위치하고 있다.

 

문수산성지

 

문수산성( 울산시 기념물 제34호)은 문수산(599)의 8부 능선에서 정상을 따라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성내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편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울산 언양 일대를 방비할 목적으로 쌓은 협축식 산성으로 보인다. 협축식이란 성벽의 안팎을 자연석을 이용하여 서로 맞물리게 거의 수직으로 단면이 사다리꼴이 되도록 쌓은 성으로 자연유실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재 남아 있는 체성은 길이 800m, 높이 50~140m 정도인데 평면은 타원형이다.

남쪽으로 성문이 있었던 자리가 살펴지며 서쪽에는 언양 일대를 감시하는 별도의 석축시설이 남아 있다. 한편 이 성은 굴화산성이라고도 전해 오고 있으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삼동 하잠리 요지군

 

조선시대에 청자, 백자 분청사기 등을 굽던 가마터가 무리를 지어 남아 있는 곳으로 여기서 수습된 파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으로 언양인수, 장흥, 순, 예 등 조선시대 관청의 명칭과 관련이 있는 명문이 씌어 있는 그릇 파편이 보이고 있어 이 곳 가마터의 성격과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이 가마터는 세종신록지리지에 기록된 139개의 지기소 가운데 하나인 언양 자기소로서 중앙정부에 도자기를 공급하던 곳으로 보여 조선 초기의 도자기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요지군은 삼동면과 삼남면 경계지점 대암댐의 서쪽 가장자리에 분포하고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터

 

이곳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이 태어나 17세 까지 살았던 집터이다.

건물은 없어졌으나 집터와 축대가 남아 있다. 선생은 병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기 중고등학교로 진학 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1910년 선생은 주시경 선생이 세운 조선어강습소에 다니며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이 나라를 되찾는 길임을 깨닫고 평생을 국어연구에 바쳤다.

선생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와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등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전념하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문교부 편수관, 학술원 회원,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대표이사,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면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겨레의 얼을 되살리는데 헌신하였다. 현재 외솔 선생 생가터는 울산시 기념물 제39호로 지정하고 최근 생가 복원계획이 활발히 일고 있다.

 

박상진 의사 생가

 

이 집은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의사가 살았던 집이다. 박상진 의사는 1902년 허위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되었으나 사퇴했다.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박의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 광복회 총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교수형을 당 하였다.

1963년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대지주 집안이었던 박상진 의사는 모든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은 몰락하였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 갔다.

이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체 등 모두 4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때 조선 후기 ㅂ 자형의 구조를 갖춘 양반 살림집으로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있다.

 

천전리 공룡발자국 화석

 

대곡천 천전리 각석 맞은 편 평평한 바위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공룡 발자국 화석인데 약 1억년전 전기 백악기에 살았던 중 대형 공룡의 흔적이다. 대형 초식공룡인 울트라 사우루스를 비롯하여 중형 초식공룡인 조각류 등의 발자국 화석 200여개가 살펴지고 있어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나난 발자국의 형식으로 보아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이동한 흔적이어서 이 일대가 공룡의 서식지 임을 알수 있다.

대곡천 일대 바위면에는 대곡천의 급한 물살에 오랜 세월에 걸쳐 깍이어 드러난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여러 장소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입구에 대곡리 공룡발자국 화석이 24개가 발견되어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 외 중구 유곡동에도 공룡발자국 화석이 80여개가 발견되어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 12호로 지정하고 있다.

 

 

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비

 

이 비석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원강서원의 묘정비이다. 엄홍도는 본래 영월호장이었는데 세조에 의해 죽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장례를 지낸 충절을 높이 사 후에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정조 23년(1799) 울산에 살던 엄홍도의 후손에 의해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에 원강사를 세워 그를 기리는 제사를 모셨는데 순조 17년(1817) 에 사림의 뜻에 따라 이 사당이 원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994년 원강서원을 삼동면 둔기리에 다시 세우면서 이비석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이 비석은 순조 20년(1820)에 세운 것인데 홍문관제학 조진관이 엄홍도의 행적을 찬술하고 동부승지 이익희가 비문을 �으며 명필로 이름난 이조판서 이조원이 새겼기 때문에 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학성이씨 현령공파 절송공묘 출토유물

 

이 유물은 학성이씨 현령공파로 어모장군 용양위좌부장을 지낸 이충립의 묘에서 나온 것이다. 이충립의 묘는 본래 남구 부곡동 한터마을 어귀에 있었는데 공단조성으로 1986년 묘를 옮겨가게 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발굴 당시에는 시신은 미이라 상태에 있었고 유물들도 350년 이상 묻혀 있었는데도 양호한 상태였다. 출토된 유물은 시신을 덮었던 명정, 수의 조각, 띠, 얼레빗, 참빗, 단도, 칼꽂이, 부채 등 10여종인데 이 유물을 통해 17세기 전기 양반들의 복식 및 장신구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울산시 문화재 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4) 위열공 김취려의 묘 C-나

 

이 묘는 고려 후기 무신정권시대 거란족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운 위열공 김취려(?~1234)의 묘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장군은 사람됨이 검소 정직하고 충의를 신조로 삼았으며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 명령이 참으로 엄격했다”고 전한다. 김취려 장군은 대장군과 재상인 시중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몽고의 침입이 한창이던 고종 21년 강화도에서 사망해 위열공으로 봉해졌다. 철종 8년(1857)에 세운 장군의 태지 유허비는 언양읍 송대리 능골에, 묘소는 뒷산인 화장산에 있다. 태비에는 김취려 장군의 태생지가 언양 임을 알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5) 화장암 C-나

 

화장산 화장굴에는 신라시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왕실의 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곧 죽게 되었다. 한 노승이 말하기를 복숭아꽃으로 쓰다듬어 주면 나을 것이라 하였는데 추운 겨울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 신하가 언양에 와 보니 모든 산들이 흰눈에 뒤덮여 있었는데 공주의 병을 낳게 해줄 복숭아꽃이 나타나 주길 간절히 빌었다.

그런데 한 야산을 바라보니 붉은 복숭아꽃 나무가 눈에 띄어 달려가 보니 꽃나무는 간데없고 한 비구니가 그를 맞았다. 그는 부처님의 영험으로 알고 그 비구니를 공주에게 모셔가 어루만지게 하였는데 금새 공주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복숭아 꽃나무가 있던 동굴을 가리켜 화장굴(花藏窟;꽃을 감춘 굴)이라 하였다.

 

11) 언양읍성 C-나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에서 서부리에 걸쳐 있는 언양읍성은 정사각형의 모양을 한 평지성으로 고헌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태화강 상류인 남천과 언양천 사이에 있다. 이 성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풍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고을 마다 읍성을 설치 했는데 이는 고을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적인 목적과 유사시에 군사적인 기능도 겸하였다. 이런 읍성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제도로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읍성이 전국적으로 190여개나 되었다.

울산에도 언양읍성과 함께 울산읍성이 있었으나 울산왜성을 쌓으면서 성돌을 가져가 허물어 지고 없다.

언양읍성 안의 동쪽에는 동헌을 두고 서쪽에는 객사를 두었으며 내동헌, 향사당, 호적고, 통인방 등 부속건물을 두었으며 성곽의 각 변마다 문을 내어 문에는 각기 다른 이름의 누각이 지어졌다.

북문은 계건문, 서문은 예일루, 남문은 영화루, 동문은 망월루라 했다. 언양읍성은 처음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이었다. 조선시대 연산군 6년(1500) 언양 현감 이덕룡에 의해 다시 지어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광해군 9년(1517)에 새로 쌓은 것을 최근 연차계획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3) 언양 벅수

 

언양터미널 동쪽 사거리에서 조금 지나면 언양 벅수가 서 있다. 벅수란 경상도 지방의 장승명칭으로도 불리운다. 장승 또는 벅수는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민중의 소망을 담고 있는 주요 민속유물이다.

벅수 또는 장승은 지방마다 특색있게 돌이나 나무를 깍아 만들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사찰의 입구에 사천왕상 같은 수호신 성격으로 세워지기도 했다. 남구의 옛 고래잡이 항구인 장생포의 명칭도 장승(장생)이 있던 포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언양현 호적대장

 

호적대장은 전근대의 국가가 주민의 신분을 파악하는 기초적인 장부로 전국 군,현의 호구를 5가구씩 묶어 1통으로 하여 가구수 별로 3년마다 호구단자 2통을 작성하여 관아에 제출한 것을 이전의 호적대장과 대조 확인하여 1통은 호주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1통은 관아에서 호적대장을 만드는데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울산에서는 언양현 호적대장(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울주군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언양현 호적대장은 숙종 37년(1711)을 비롯해 여러 호적대장이 남아 있는데 사회변동을 알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매우 높다.

 

17) 두서 은행나무 B-나

 

이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64호)는 조선 초 단종 1년(1452)에 이지대 선생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이지대 선생이 수양대군(세조)의 불의에 분개하여 한성 판윤(서울시장)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곳에 내려 올 때 서울에서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두서면 구량리 논에 서 있는 이 나무는 550년의 수령에 걸맞게 높이 22m, 몸통 둘레 12m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데 울산을 대표하는 노거수이다. 중국이 원산지인 은행나무는 울산광역시의 시목이기도 하다.

 

18) 차리 고분유적 B-나

 

이 고분유적은 두서면 차리와 언양읍 다개리에 걸쳐 있는 고분군으로 채집된 토기로 볼 때 4~7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본 유적에서 목곽묘는 구릉의 정상부와 남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며 서북쪽에는 석곽묘가 조성되어 있다. 동쪽으로 경사진 곳에는 봉분을 가진 중형급 분묘도 있으며 석실묘는 동으로 뻗은 구릉 끝에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 몇 기는 대형 횡구식 석실분으로 여겨진다.

 

19) 백운산 김유신 기도소 A-나

 

이곳은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화랑으로 있을 때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할 힘을 달라고 하늘과 산신에게 빌었던 장소라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29년(612) 18세의 나이로 혼자서 보검을 들고 열밝산(백운산) 깊은 구렁에 들어 갔다는 귀절이 있다. 백운산은 경주를 가로 지르는 형산강의 발원지로 신라 때부터 명산으로 받들어 오던 신령스런 산이며,조선시대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태화강의 발원지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20) 울산 향교 C-라

 

향교는 여러 선현을 모시는 제례와 학생에 대한 교육 기능을 수행 하여 온 관학기관이었다.

고려시대는 중앙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부,목,군,현에 각각 향교(공립학교)를 세워 지방교육 진흥을 꾀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서원(사립학교)이 일어나게 되자 점차 쇠퇴하다가 고종 31년(1894)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울산 향교는 본래 반구동에 있었는데 불타 없어진 것을 효종 3년에 지금의 장소에 다시 세웠다.

 

21) 울산 동헌 및 내아 C-마

 

동헌이란 조선시대 고을의 원과 같은 지방장관이 공무를 처리하던 건물인데 중구 북정동에 소재한 울산동헌은 울산도호부의 것이다. 이 동헌은 숙종 7년 (1681)에 부사 김수오가 세운 것을 그의 아들인 부사 김호가 자리를 이어 옴에 지난 일을 생각하여 현판을 일학헌이라 하였다가 영조 39년(1768) 부사 홍익대가 중건하면서 반학헌이라 고쳐 걸었다. 내아는 지방 관청의 안채를 말한다.

 

22) 함월산 백양사 C-마

 

풍수지리상 울산의 주산인 함월산 정상에 자리잡은 백양사는 신라시대 경순왕6년(932)에 백양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숙종 4년 (1678)과 영조 29년(1753)에 중건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가 현재는 1922년에 보현스님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백양사에는 석종형 부도 2기가 전하고 있으며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산령각, 선실, 누각 종각이 있다.

 

23)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 C-마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 (643)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듬해 경주 황룡사탑을 세우면서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여러 문헌에서 태화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 되던 중구 태화동 반탕골에서 지난 1966년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보물 제 441호)가 발견되었다.

십이지상이란 십이간지를 뜻하는 12동물의 형상으로 즉,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를 이른다. 이들 동물을 사람의 몸으로 변형하여 석종형의 부도 주위에 시간 혹은 방위에 맞추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북쪽은 쥐이고 남쪽은 말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부도는 고승의 사리탑으로는 십이지상이 새겨진 독특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어 가치가 높다. 현재 중구 학성공원에 있다.

 

24) 다운동 고분군 C-라

 

이 고분유적은 다운동 서쪽 구릉에 있는 큰 고분 무리인데 지름 10m 전후의 봉토분과 소형 석곽분이 한데 모여 있다. 구릉 아래에는 네 개의 작은 고인돌이 있으며 태화강변에서 민무늬 토기와 석기가 채집된 일로 미루어 이 고분유적은 청동기 시대에서 신라시대에 걸쳐 형성된 굴아화부족이 남긴 유적이라 보여 지는데 4~6세기의 토광 목곽묘, 석곽묘,옹관묘 적석 목곽묘 등 10여기가 조사되었다.

 

25) 태화루 용금소 C-라

 

태화교가 끝나는 태화강변 언덕(지금의 로얄 예식장 터)에 영남 최고의 절경 태화루가 있었다. 태화루는 고려와 조선시대 까지 전하여 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으나 현재 서거정이 쓴 태화루 현판만이 남구 신정동 이휴정에 남아 전한다.

태화루는 일찍이 고려시대 김극기, 정포, 권근, 서거정과 같은 선비들이 찾아와 무수한 시를 남겼는데 특히 고려시대 제6대 왕인 성종이 경주에 들렀다가 이곳 태화루에서 잔치를 배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태화루 절경 아래 태화강 황용연을 용금소라고도 하며 울산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현재 태화루 복원 논의가 활발히 일고 있다.

 

26) 울산 병영성 C-마

 

울산 병영성(사적 제 320호)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영성‘의 줄인 말이다. 좌병영은 본래 경주 모화에 있던 것을 태종 17년 (1417)에 옮겨와서 쌓았는데 세종 8년 한 때는 군의 치소를 이곳에 두기도 했다. 성의 둘레가 3723자, 높이 12자, 우물과 해자가 있었다고 하며 사방에 성문이 있었으며 성 가운데 계곡(약사천의 갈래)이 남쪽으로 나 있는 포곡식 성이다.

이 성안에는 병마절도사가 공무를 보는 체오헌, 객사인 선위각, 객사 정문인 진해루 그리고 찬주헌 등 주요 건물과 부속 건물로는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

병영성은 관문성의 동쪽 끝인 모화의 기박산성 자리에 영성을 쌓기 위해 꽂아둔 붉은 깃발 하나가 큰 바람에 날리어 하늘의 계시로 꽂힌 자리에 쌓았다는 신기한 전설(기 따라온 병영성)이 남아 전하고 있다.

 

27) 울산왜성 C-마

 

울산 왜성(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 7호) 은 신라시대 계변성이라 하던 성을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 기요마사’에 의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지었다.

이 성은 우리 측에서 도산성 또는 시루성으로 불렀으며, 학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신라 말 학을 타고 내려온 천신이 있었다 하여 신학성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울산왜성은 선조 30년 (1597) 축성 중에 1차 전투가 있었으며 이듬해 2차 전투를 치른 후에 왜군이 철수 했다고 한다.

 

28) 관문성 A-마

 

관문성(사적 제 48호)은 울산과 경주의 경계를 이루는 긴 산성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인데 신라 경주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성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 성은 서쪽의 치술령에서 시작하여 동쪽의 기박산성에 까지 이르는 성으로 경주의 반월성 둘레보다 길다 하여 만리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을 쌓을 당시 구역별 책임을 따지기 위해 성돌에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의 축조법을 살펴보면 산능성을 따라가다 산이 험한 벼랑에는 험준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을 쌓지 않았으며 지형이 완만한 동쪽 지역은 잘 다듬어 만든 가공한 사각형 석재를 5단 내지는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과 진흙을 다져 쌓았다.

 

이휴정 소장 출토 복식

 

남구 신정동 태화교 남쪽에 위치한 이휴정에는 조선시대 무덤에서 나온 의복이 중요민속자료 제 37호로 지정되어 전하고 있다. 이 민속자료는 후손 이채석의 11대 할아버지 이천기 (1610~1666)와 그의 부인 흥려 박씨 (1605~1672)의 합장묘와 그의 셋째 아들 이지영과 부인 평해 황씨(1637~1658)의 합장묘에서 나온 수의이다.

이 네 사람의 무덤은 지금의 남구 신정동 여천천 북쪽 학성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를 짓기 위해 1969년 여름에 무덤을 옮길 때 출토된 것으로 300여년 동안 썩지 않은 원인은 석고로 관을 밀페하여 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천기의 무덤에서는 동다회대( 편복에 매던 띠)와 감투 2점과 운문단 직령포 (구름무늬 비단 수의)가 나왔고, 평해 활씨 무덤에서는 겹으로 된 직령포와 누비치마, 버선, 명주목도리, 무명 수의치마가 나왔다. 이 유물들은 1998년 보수 복원처리하여 밀폐 보존하고 있다.

사진은 겉감이 감청색이며 안감이 흰색인 무명으로 만든 평해 황씨의 아청색 직령포 이다.

이 유물들은 태화로터리 근처 이휴정이 있는 학성이씨 월진파 문회에서 관리 하고 있다.

 

금속장 임원중

 

울산의 병영동은 조선시대에 경상좌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태종 17년(1417) 이곳에 병영을 둔 이래 조선 후기까지 군사기지의 역할을 해오던 곳이라 일찍이 무기는 물론 생활용구나 말에 쓰이는 도구를 만드는 군수산업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바탕 위에서 병영은 금속을 제련하는 단야업이 성하였으며 이에 종사하는 야장들이 많이 배출되어 병영에서는 담뱃대나 은장도를 만들어 왔다.

지방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임원중 선생은 1930년에 출생하여 사촌형 임인출의 장도공방에서 기술을 전수 받아 오늘날 까지 은장도 제작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은장도라 함은 은으로 만든 장도칼로서 아녀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노리개 였으나 오늘날에는 장식용으로 쓰이는 울산 특산 민속 공예품이다.

 

중산동 고분군

 

중산동 고분군은 삼한시대에서 신라시대 까지에 걸쳐 형성된 옛 무덤들로 규모가 매우 크다. 제 1지구 유적은 시대별 문화층에 따라 다양한 묘제 형식으로 나타 나 있어 고대 사회 묘제 변천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주지역에서도 신라 고분문화를 이해하는데 자료상의 공백이 많은데 이 곳 고분군의 다양한 묘제와 유물은 이러한 면에서 더욱 중요하다.

약 40만평에 이르는 중산동 고분군은 크게 두 군데로 나뉘어 지는데 경주와 울산시 경계지점에 못 미쳐 동천 상류와 가까운 이화마을 일대에는 3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고분이 겹겹이 분포되어 있으며 국도 오른편 중산동 임야 일대에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까지의 대형묘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분포되어 있다.

중산동 고분군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91년 당시 이화마을 동편에서 아파트를 신축하던 중

유물이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96기의 고분에서 오리모양의 토기와 화로모양의 토기 등 1,200여점의 유물과 각종 공구류, 마구류, 무기류, 갑옷, 투구 등 철기 240여점과 금제, 금동제 귀걸이도 출토되었다.

중산동 고분군의 특징은 돌무지 덧널 무덤으로는 가장 오래된 신라고분으로 사각형으로 돌을 둘러 묘역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볼록하게 얹는 방식이다. 이는 당시 5세기 경 고분으로 알려진 경주 황남동의 돌무지 넛널 무덤보다 빠른 양식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았다.

이 고분군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강대한 군사력을 소유한 신라 주변의 정치체제가 3~4세기 경에 존재 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고분군은 극히 일부만 지방기념물 제 9호로 보존하고 있다.

 

방기리 알바위

 

삼남면 방기리 방기천 상류지점 하방마을에는 높이 15m 가량의 작은 동산이 있는데 여기에는 화강암 종류의 자연석이 흩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 큰 것은 둘레 4~5m, 작은 것은 1~2m 정도이다. 여기에 알 모양의 오목한 자국들이 둥글게 새겨져 있는데 크기에 따라 10개 혹은 30개 이상 조각되어 있는 바위도 있다.

지방 기념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알바위 유적은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과 같은 선사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평리 선사유적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양향교

 

언양 향교는 조선시대 숙종 22년(1696) 후세 교육을 위해 지은 공립교육기관이다.

처음 대성전은 앞면 3간, 옆면 3간 규모로 세웠다가 숙종 26년 (1700) 앞면 5간 옆면 3간의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세웠다. 이 향교는 평지에 위치하여 앞에는 교욱시설을 배치하고 뒤쪽에는 성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례를 올리게 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북쪽인 반월산 아래에 세웠다가 몇차례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세운 끝에 지금의 삼남면 교동리 태화강 상류와 작괘천 사이에 자리 잡았다.

 

효자 송도선생 정려비

 

송도 선생은 조선 세종 때 북구 효문동에 살았던 효자로서 울산에서 최초의 생원이다.

선생은 병든 부모를 10여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병하였으며 1년사이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유교식으로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정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표창을 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전한다.

선생의 효성이 중국 명나라에 알려져 신종이 친히 지은 시인 어제시와 홍문을 하사 받게 되었는데 효문동의 유래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송도선생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세에 세운 정려비는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다가 영조13년(1737) 에 다시 만들어 지금의 중구 우정동에 세운 것인데 그 당시 이 지역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전 수운 최제우 유허지

 

전 수운 최제우 유허지( 지방 기념눌 제 12호)는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이 31세 되던 해에 울산에 와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 이듬 해 하늘이 내린 을묘천서를 받고 크게 깨우쳤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중구 유곡동 여시바우골을 말한다.

최제우 선생은 경주 양반 출신이면서 봉건적 체제에 대한 모순을 크게 느끼고 ‘사람이 곧 하늘’ 즉 인내천 이라 가르치며 37세 되던 해인 1860년 동학을 일으켰다가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 이후 교세를 넓혀 가다가 단군신화의 환웅을 모시며 유교,불교,도교의 가르침을 합친 천도교의 기초가 되었다. 그 밖의 울산의 동학운동 기념물로는 작전정 입구에 인내천이라 크게 새긴 바위가 있다.

 

언양 부로산 봉수대

 

봉수대는 사방이 확 트인 산봉우리에 위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려 인근 봉수대와 서로 연락하여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과 해당 진영에 알리던 군사통신 수단의 하나인데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제도인 듯 하나 그 체제가 정비된 것은 조선 세종 때 부터이다.

오장과 봉군이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 적이 나타나면 두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홰, 적이 국경을 넘으면 4홰, 적과 전투를 벌리면 다섯홰의 봉수를 올렸다고 하는데, 고종 31년 (1894) 전화가 보급되면서 페지되었다.

부로산은 태화강 상류와 작괘천 사이에 있는 지금의 봉화산(351)을 말한다.

이 부로산 봉수대는 부산 대대포의 구봉에서 시작하여 양산 위천(원적산)에서 신호를 받아 두서면 구량리 소산(봉화산)으로 전한 중요한 봉수대로서 울산지역 내륙을 연결하면서 서울 남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직봉망의 하나이다.

 

언양 천전리 성

 

이 성은 태화강 상류와 작괘천 사이에 위치한 산성산 8부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태뫼식 산성이다. 이 성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주로 왜구의 침임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언양읍지에 의하면 ‘둘레가 2천척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있다“라고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언양지역의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성이 있는 산의 모양이 마치 떡시루를 엎어 놓은 듯하다 하여 시루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과부성이라고 하는데 의병들이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여자만 남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성의 윗부분이 대부분 무너져 내려 원래의 모습은 알기 어렵다.

 

서 창 원 지역홍보연구소장

(울산 태화강 보전회 발행, '태화강의 문화유산' 2004.1월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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