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하나님 말씀과 몸의 형상화: 해운대 온누리교회

시와 건축 | 2012-02-16 오후 3:10:03 | 조회수 : 2897 | 공개



교회는 하나님 말씀과 몸의 형상화: 해운대 온누리교회
 
 

                                                                                                                                            이동언 부산대 건축학과 교수
 

 온누리교회로 가는 도중 필자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교회란 곳에 나가본지 꽤나 오래 되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세어보니 15년은 족히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해운대 온누리교회를 바라보는 순간 찬송가가 필자도 모르게 흥얼거려졌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이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필자의 흥얼거림 속에 교회가 보인다. 정말 그랬다. 필자가 흥얼거린 찬송가 속에 해운대 온누리교회 새 성전의 모습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정말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처음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노출콘크리트의 십자가탑 왼쪽 벽과 교회 벽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갈 때 "부자가 천국을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감으면서 오르는 하늘 길은 마치 삶의 고비 고비를 연상시킨다. 한 번씩 감길 때 마다, 즉 인생의 전환점마다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친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덕택이다. 십자가탑의 반듯함과 대조적으로 땅의 형태는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대지 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랑
 

성경적으로, 건축설계의 핵심은 거듭남이리라. 대지의 형태를 솔직히 받아들이고 기존 개념의 잘못을 인식이 반성한 후 그것을 훌훌 털고 대지를 창의적으로 디자인함으로써 그것이 거듭날 수 있다. 이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날 수 있다는 성경의 말씀과 유사하다. 창의적인 건축가는 사도 바울처럼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살아야 새로운 개념의 설계를 할 수 있다. 즉 대지의 기존 모양새를 거듭나게 혹은 창의적으로 살릴 수 있다. 대지라는 옛사람이 어떻게 죽고 새 성전을 갖는 새 땅으로 어떻게 거듭났는가? 찬찬히 살펴보자.

 좁아지는 정문 계단과 옥상으로 가는 좁은 십자가 옆 통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14만4000명의 마지막으로 남은 자, 구원의 무리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 같다. 북쪽 면의 창들이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면서 점차 상승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알레고리(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냄)로서 선과 악의 쟁투를 통해서 한 인간의 거듭남 등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거듭남을 마지막 시험하는 곳,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전체적인 매스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온누리교회 십자가의 탑은 마치 구약시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나타내는 십계명을 가리키듯 긴 직육면체로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꼭대기 근처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의 구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믿기만 하면 죄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둔 듯한 것이 십자가탑이다. 십자가탑의 계단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그러한 사랑을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로 의인화되는 십자가탑은 반듯하게 긴 직육면체(계명)와 계단(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계명의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의 표현이 곧 계명이라는 사실을 밝혀주셨다. 그렇다. 계단 없이 긴 직육면체를 이해할 수 없다. 계명과 사랑은 동전 앞뒷면 관계다. 계명 없이 사랑 없고 사랑 없이 계명 없다. 하늘광장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과 계명을 십자가탑을 통과할 때마다 흠뻑 받고 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하늘광장 길을 계속 가거나 본당으로 향한다.

 

 


돋보이는 빛과 어두움의 연출
 

 온누리교회의 모습은 죄로 지속된 많은 세월을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으로 감싸안은 형태다. 높은 탑은 십자가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본당은 수많은 세월을 사랑과 계명으로 이분화 되어 있는 이 세상을 빗대고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 하고 울퉁불퉁한 모양과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조형이 반듯하지 못하다. 큰 두 매스가 서로 반대 방향의 기울기를 갖고 나아가려는 '놈'을 십자가 탑이 잡아주고 중심의 역할은 한다,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온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데도 불구하고 태반의 인간은 온기를 못 느낀다. 그 온기는 인간이 찾지 않는 한 침묵할 뿐이다. 이제 평면구성으로 가보자.

 평면형태도 대지와 유사하다. 지하3층에는 지하주차장들만 있다. 지하2층에는 지하주차장과 체육관 등이 있다. 지하1층에는 애찬실, 경로실, 기도실, 영아실, 유치부실, 놀이터 등이 있다. 1층에는 소극장, 서점, 커피숍, 교역자실 등이 있다. 2층에는 대예배당, 자모실(수유실), 새가족실, 문화연습실 등이 있다. 이중 새가족실이 눈길을 끈다. 3층에는 대예배당 상부로, 소그룹실들, 개인기도실, 목양실, 회의실등이 있다. 4층 역시 대예배당의 상부로 3층과 유사하나 방송실, 편집실, 재정부실 등이 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브리지가 인상적이다. 마치 요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5층에는 하늘광장, 세미나실, 휴게실 등이 있다.

 이 교회는 많은 각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만큼 빛도 다양하다. 이 교회의 공적 공간에서 빛과 어두움의 연출이 돋보인다. 특히 강대상에서 빛의 연출은 극히 중요하고 극적이다, 2층 로비 부분에 떨어지는 빛은 자연광으로서 가장 신선한 맛을 낸다. 이 신선한 맛이 예수 그리스도를 조우하는 맛이리라. 교회는 악과 어두움의 세력과 싸우는 선과 밝음의 실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교회에서는 적절한 밝음과 어두움이 있고 결국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 적절한 자연채광을 통한 간접조명으로 빚어진 은은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내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건축가 임성필의 '벽'과 황동규의 시

  이쯤에서 온누리교회 전체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보자. 평면에서도 형태에서도 건축가 임성필(정림건축)의 말처럼 "온누리를 감싸 안은 벽"이 이 교회 설계의 주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더 설명하자면, 탑은 중심에 서서 본당을 감싸 안은 영적인 벽이고, 본당은 신도들의 행적만큼 복잡한 다면체를 감싸 안은 벽이다. 이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벽'이란 궁극적으로 계명과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랑과 계명으로 온누리를 감싸 안은 벽'이 궁극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은 십자가탑의 왼쪽 길이 하늘광장으로 가는 길을 통하여서이다.

 십자가탑은 조형 상 양쪽으로 어긋나게 기운 두 매스를 잡아주는 중심점이다. 탑은 계명과 사랑으로 이분화되는 경향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지킨다! 이러한 이야기가 온누리 교회에서는 건축화돼 있다. 또한 하늘광장의 길은 늘 열려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행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모두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런 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이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시인 황동규는 '두 문답'에서 이렇게 읊는다.

 '…종려 가지 흔들며 반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예루살렘에 발 들여놓기 전 예수에게 제자 하나가 물었다./ "가르치신 온갖 비유와 우화를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하라!'

 그리스도교에서는 건축물조차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 즉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매스들(덩어리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명과 사랑을 '하라!'라는 묵시적 행위,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선과 악의 대쟁투가 교회에서 일어난다는 메시지 전달행위, 형태(각진 형태)를 통한, 평면(각진 평면) 및 단면(실내브리지)을 통한 메시지 전달행위, 이웃에 말없이 내놓은 하늘광장 등이 '하라!'에 따르는 건축적 실천이다. '하라!'는 거듭난 후의 행위다. 마지막으로 꼭 명심할 바는 교회는 하나님의 몸의, 즉 말씀의 형상화이자, 유기체이지 단순한 물리적 건축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지금은 교회건축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때이다.(롬 12 : 4-5, 고전 6 : 15, 12 :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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