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공간의 숨결이여 : 금정산 범어사 일주문
이동언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범어사 경내 주차장에서 남쪽을 향해 10m쯤 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니 일주문이다. 내가 간 날은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범어사 전체가 들떠보였다. 사찰이 들뜨니 다른 곳이야 오죽하겠나. 근래 설치된 듯한 주차장을 코앞에 둔 일주문이라 왠지 무엇이 생략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일주문까지 돌고 돌아가던 것이 생략되었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과정적 공간'의 생략이었다. 과정을 별로 중시하지 않은 시대에 당연한 처사이다.
장애인 주차장은 일주문 가까이 두고 일반인 주차장은 멀리 두어 가는 동안이라도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일주문까지 가는 길이 좀 성스러웠으면 좋겠다. 일주문에 담긴 다음의 뜻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일주문은 만법(萬法)이 갖추어져 일체(一切)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는 문으로 사찰의 기본 배치에서 사찰의 경내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지나야 하는 문이다.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인터넷 백과사전)
일주문이 전체적으로 전경이 되고 숲은 배경이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전경과 배경이 서로 어우러져 일주문이 배경인지 숲이 전경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즉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 돌계단-돌기둥-나무기둥-공포부(꿒包部)-지붕으로 이어지는 일주문은 정말 배경과 잘 어우러진다. 마치 돌, 나무, 기와, 숲이라는 악기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같다.
서로 물고 물리는 억겁세계를 담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바람은 소리 없이 지나고 그 소리 없음은 숲을 일렁이게 한다. 햇볕이 일렁일 때마다 숲도 일렁인다. 그것에 더하여 단청으로 단장한 공포(꿒包)는 숲의 일렁임 속에 깊이를 더한다. 그것을 통해 아득한 꿈의 세계로 끝없이 나아간다. 일렁이는 물결처럼 숲결 속으로 속으로 깊숙이 나아간다. 선찰대본산, 조계문, 금정산 범어사 등 현판글씨조차 일렁임 속으로 흘러 흘러가는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 여정 끝에 나는 이곳에 서 있다. 주추(기둥 밑에 괴는 돌 등의 물건)의 돌-돌기둥-나무기둥으로 나아가던 나는 마침내 형형색색의 윤회의 고리로 들어섰다. 다포(多包)의 세계는 들어선 곳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상호관입되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윤회의 고리 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땅에서 솟아난 기운은 주추-돌기둥-나무기둥을 거쳐 단청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상호 물고 물리는 억겁의 세계다. 여기서는 모든 것들이 서로 물려 있다. 단청의 각양각색 모양들이 패턴을 통해서 시공간적으로 상호 맞물려 있다.
다시 나는 억겁의 세계로 들어간다. 긴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는 꽃이 되었다. 갈매기가 되었다. "아, 입이 없는 것들"이 되었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아, 입이 없는 것들"(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너무 큰 외침과 공간의 침묵
입이 없는 것들에 반(反)하여, 우리는 너무도 크게 소리를 질러왔다. 시각적, 청각적으로 거리에 나가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너무나 많은 크고 작은 간판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다. 공공디자인이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벽화들, 부산의 거리를 더욱 더 시끄럽게 한다. 단청은 우리에게 화려함과 충만함을 주면서 동시에 침묵을 선사한다. 산이라는 배경도 침묵을 선사하는데 도움 일부를 준다. 이에 비해 공공디자인의 벽화는 유치함과 시끄러움 이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주위의 것들, 즉 배경들이 복잡함과 시끄러운 소음 속에 있는데 전경이 되는 것은 오히려 숨을 죽이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디자인은 가능하면 자그마한 미니멀리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옳다. 불과 10여 년 전에 '침묵의 미학'이 건축계를 강타한 적이 있다. 이때 대부분 건축가들은 침묵을 그냥 큰 공간을 비워두는 것만으로 생각했다. 아직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긴 하지만.
공간을 침묵케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범어사 일주문에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일주문은 크게 5등분 할 수 있다. 돌계단-돌기둥-나무기둥-단청한 공포부분-지붕.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나무기둥과 단청한 공포부분이다. 그것들은 색을 사용해 시각적이다. 그럼에도 반복되는 각종 패턴으로 인해 질감이 형성되면서 촉각화된다. 단청 부분은 색과 패턴으로 인해 질감이 형성되어 시각적인 것 같으면서 촉각적이다. 지붕 또한 동일한 질감과 패턴의 반복으로 촉각적이다. 패턴은 색깔이 특정한 형태로 나아가 시각화하는 것을 억누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일주문의 단청은 시각적인 것이라도 패턴으로나 질감으로 표현되어 거의 촉각적이다. 그러므로 일주문 전체를 보면 시각적이라기보다 촉각적이다.
일주문 전체가 촉각적일지라도 배경이 시각적이면 침묵을 유지할 수 없다. 배경과 전경은 하나이므로. 다행히 배경이 숲으로 덮여 있으므로 촉각적이다. 화려한 침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촉각 덕분이다.
표피적 이해 넘어 접촉과 퍼짐으로
일주문과 나는 악수를 나눈다. 내 손이 상대의 손을 잡았는지 일주문이 내 손을 잡았는지 알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온다. 내가 손을 내밀며 일주문도 손을 내민다. 내가 손으로 만지며 일주문도 내 손을 만진다. 악수는 접촉이며 접촉은 퍼짐이다. 내 손과 일주문 손은 서로 간의 접촉이며 퍼짐이다. 그리고 내 손과 일주문의 손, 몸이 순식간에 하나가 된다.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사물 간에 필요한 것은 서로 간의 악수, 접촉, 퍼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침묵하는, 하나 되는 만남이 된다. 존재하는 두 침묵, 사람끼리는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만 하면 접촉이 되고 퍼짐이 일어나고 하나가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와 악수, 접촉, 퍼짐이 일어나고 사람끼리 하나됨 (사실은 하나도 아닌 둘도 아닌 그 무엇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물이 온다는 것도 사람과 사물 서로 간의 악수이며, 접촉이며, 퍼짐이며 하나됨이다. 사람끼리 혹은 사람과 사물이 악수를 거쳐 하나됨을 체험한다면 이는 역지사지 (易地思之)대화이다
범어사 일주문은 겉으로 보면, "일반 건물의 기둥배치는 네 방향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데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삼문으로 처리하고 4개의 높은 기둥 위에 짧은 기둥을 세워 다포의 포작과 겹처마로 많은 중량을 지닌 지붕을 올려놓아 자체가 지닌 무게로 몸을 지탱하게 한 역학적 구조로 되어 있다. 다포식 건축에 외삼출목(外三出目) 형식이며 정면 3칸으로 맞배지붕이다."(인터넷 백과사전 중에서) 이것은 그야말로 표피적 이해이다. 이런 시각적 이해와는 달리 나와 일주문의 만남은 악수를 통해, 접촉을 통해 획득되어 하나 된다. 나는 여기-이때에 있지만 저기-저때에도 참여한다. 저기-저때서 시심(詩心)이 나온다. 사물과 악수를 통해 저기-저때에 참여하여 억겁의 세계를 다녀온 것도 詩心의 덕분이다.
일주문의 악수, 금정산의 악수
금정산-범어사-일주문이라는 현판을 일주문에 단 이유가 무엇인가? 일주문이라는 전경에 집착치 말라는 것이다. 일주문의 배경인 범어사, 그것의 배경인 금정산을 망각해버리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일주문은 나와 악수하며 동시적으로 접촉, 퍼짐, 하나됨이 되고 범어사에서 금정산으로 순식간에 나아간다. 순간 동시에 금정산과 나의 악수가 이루어지는데 접촉, 퍼짐, 하나됨이 되어 범어사에서 일주문으로 동시에 내려온다. 억겁의 세계도 한 순간인데 일주문과의 악수는 곧 금정산과의 악수다. 공간과 시간! '…서로 품에 안겨 서로 배고 낳으니 꿈꾸며 반짝이느니.'(정현종, '때와 공간의 숨결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