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는 한 나라의 수도답게 국가에서 제공해 주는 볼거리가 많다. 이런 것들에는 「국립」이라는 접두어가 붙는데, 국가가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멋지게 지은 후 여기에 볼거리들을 연출해 낸다.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한다. 그러니 국가가 직접 짓는 건물이야 말로 한 나라 문화수준의 「공식적」지표가 될 것이다. 70년대에 지어진 국립 민속박물관 건물과 80년대에 지어진 국립 현대미술관 건물을 살펴 보면 재미있는 차이점들이 들어난다.
1972년 경복궁 한쪽 구석에 전국의 유명 전통 건축물을 복제하여 이리저리 섞어 배치한 건축물이 새로 들어섰다. 건립 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되었고, 현재는 민속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5층 건물이 중앙에 놓여있고, 그 옆에 전북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이 있는데, 이들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오르는 계단은 틀림없이 경주 불국사에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그런가 하면 기단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된 난간은 영낙없는 경복궁 근정전 기단을 둘러싼 난간이다. 이 밖에도 필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모사품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건축사에 길이 빛날 보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는데도 이것을 쳐다보는 필자에게 아무런 감흥이 와주질 않는다. 그 대신 최진실의 귀, 하희라의 입술, 채시라의 눈 등을 컴퓨터로 합성하여 만든 우리 나라 최고 가상미인(假想美人)의 얼굴을 보고 적지않이 실망했던 기억이 되살아 날 뿐이다. 그 얼굴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아무런 생명을 발견할 수 없는 죽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역시 최진실의 귀는 최진실의 얼굴에 어울리는 귀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귀한 동물이라도 자신의 삶터를 떠나 어느 부자집 거실에 박제로 진열되었을 때는 그 존재가치가 없어지듯, 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도 그것이 놓여있었던 장소를 떠나 또 다른 고유의 장소에서 옮겨진 다른 아름다운 건축물 옆에 서있어 보아야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법주사 팔상전은 속리산 깊은 계곡 바닥에서 주위의 산세에 대담하게 반항이라도 하듯 오층의 높이로 버티고 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것인데, 이것이 불국사 청운교 기단 위에 덩그라니 얹혀져 있으니 오히려 초라하기까지 하다. 결국 이 건물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되살리려는 70년대 초의 시대적 분위기가 낳은 졸작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오죽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을 이 건물에서 조선총독부로 쓰여졌던 건물로 옮겼을까. 물론 이렇게 한 까닭에는 다른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80년대 후반 과천에는 현대미술관 건물이 신축되었다. 20여년 전에 세워진 민속박물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전통에 대한 감각으로 이 건물을 지었더라면 보나마나 여나믄 개의 기둥들이 큰 기와지붕을 받치고 있는 목조건물의 모습을 지켰을 터다. 실제로 70년대 초에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을 보면 그 무거운 돌집이 목조건물식의 거대한 지붕과 기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대미술관 건물은 전통건축의 주제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언뜻 보기에 중세 유럽의 어느 성곽을 보는 것 같다. 건물 정면에 연못이 있고 그 너머 계단을 올라가면서 좌우로 잘 정돈된 잔디 정원이 보인다. 영낙없는 서양식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이 건물의 비밀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내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전시실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중간중간에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그 밖으로 조그만 내정(內庭)들이 다소곳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옛집에도 내정이 있었다. 봄가을 그늘 진 대청마루나 건넌방에 앉아 햇빛 쏟아지는 내정을 바라보는 맛, 또 비오는 여름날에 대청에 앉아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내정 한 구석 감나무 잎이 빗방울에 파르르 떠는 모양을 지켜보는 맛이 바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이다. 이 맛을 이곳 현대미술관에서 다시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다. 밖에서 본 서양식 건물이 안에 들어오면 이토록 동양적인 공간을 주고 있다는 것은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김태수씨가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전통의 외양에 집착하지 않고 전통을 공간적으로 풀어나가 한국적 건축에 가까이 다가간 그의 솜씨에 찬사를 보낸다.
현대미술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큰 로비가 있는데 이 로비를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이 우리의 눈은 강렬한 빛이 춤추며 쏟아지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는 무려 1003개의 텔레비전이 층층이 쌓여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다 (1986년 현대미술관이 10월 03일에 개관됨을 기념하기 위해서 1003개라고 한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이라는 작품인데, 크고 작은 텔레비전에서 각기 다른 영상이 춤을 춘다. 마치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사(人間事)를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1003개의 화면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지각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더구나 각 화면의 영상이 무슨 줄거리나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눈앞에서 번쩍거릴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눈을 가늘게 뜨고 거대한 탑이 주는 색깔의 변화와 운동감을 즐기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 될 법하다.
필자 세대는 한 대의 텔레비전을 거실에 켜놓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에 훨씬 더 익숙해져 있다. 뉴스시간도 그렇고 미니시리즈 시간도 그렇다. 그런데 조금 더 젊은 세대들은 비디오게임이나 컴퓨터에 익숙해져서인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 놓고는 책도 보고 전화를 거는 등 딴청을 부리기도 한다. 텔레비전의 화면과 소리는 이들에게는 그저 액자 속의 그림이요 배경음악일 뿐이다. 그런데 「다다익선」은 한술 더 떠 1003대의 텔레비전으로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채 말이다. 「다다익선」은 우리가 가지는 상식을 거부한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긴 한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 전달되는 줄거리도 없다. 텔레비전을 한대 놓고 그 앞에 앉아 보는 것이 아니라, 무려 1003대를 높이 쌓아놓고 그 주위의 램프를 타고 오르내리면 그저 흘낏 보던지 말던지 그것은 관람객의 자유이다.
예술적 감흥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상식이 알게 모르게 깨지게 될 때에도 우리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얼굴이 신비스러운 것은 눈썹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영화란 으레 카메라의 클로즈업이나 패닝 기법, 빠른 장면전환 등을 쓰는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아득하게 먼 논두렁에서 시작하여 남녀 세 명의 주인공들이 흥에 겨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을 부르며 카메라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그 긴 장면을 단 일초도 빼놓지 않고, 카메라 앵글도 고정시킨 채 그대로 보여주는 「서편제」라는 영화도 있다.
현대미술관의 서양적 외관이 동양적 내부 공간으로 반전(反轉)되는 것. 또 한대의 텔레비전에서 주어지는 줄거리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상식적인 의례(依例)를 1003대의 텔레비전에서 소리 없이 쏟아내는 동시다발적 장면으로 뒤엎어 버리는 백남준의 「다다익선」. 이 모두가 예술적 감흥의 소재가 된다. 이에 비해 민속박물관(구 국립중앙박물관)은 엄청나게 상식적이다. 박물관이니 옛것을 모아 놓는 곳이고, 그러니 건물 자체도 전통적이어야 하고, 전통적인 건물은 옛날 건물을 그대로 복원해 놓으면 된다는 상식 말이다. 이보다는 세계 여러 나라의 건물과 자연경관 모형을 조잡하게나마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거대한 「실내」공간에 모아놓은 롯데월드 어드벤쳐가 차라리 더욱 감동적이다.
서울의 볼거리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시립미술관도 짓고 있고,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 종합전시회관도 짓고 있다. 이것들도 현대미술관과 같이 상식이 깨어지는 신선한 충격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will my husband cheat again
go what makes married men ch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