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개교 1백년 교동초등학교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15:51 | 조회수 : 4548 | 공개

1894년의 서울은 아주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일본, 러시아 등의 외세는 물밀듯 들어오고 있었으며 조선은 나름대로 독립성을 유지하느라 발버둥을 치는 시기였다. 그해 갑오경장이 일어났고, 이른바 「민비시해」 사건이 벌어진 것도 1894년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말고도 1894년에는 나름대로 새로운 역사가 하나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그제껏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 외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른바 서양식의 교육이 시작되는데, 아이로니컬 하게도 이 최초의 국민학교는 당시 쇄국주의를 대표하던 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 바로 옆에 세워지게 된다. 「교동왕실학교」로 불리워진 이 학교는 처음에는 왕실의 자녀들을 위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듬해 「관립고등소학교」로 개칭되고 1906년에는 「관립 교동소학교」로 바뀌게 되어 일반인도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교동국민학교」의 전신이다. 이곳을 한번 찾아 가보자.

교동국민학교는 서울 강북의 도심에 있다. 근처에는 탑골공원, 운현궁, 종묘, 비원이 있고, 조금 멀리에는 창경궁, 경복궁 등도 있다. 한마디로 유서깊은 곳에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백여년전 동학운동의 중심지였던 천도교 본부가 바로 길 건너에 있고, 또 근처에는 원불교 본부도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결코 넓지 않은 운동장이 있고 그 북쪽으로 4층의 校舍가 서있다. 운동장에서 서면 동쪽 담장 너머의 한옥 기와지붕들이 눈에 뜨인다. 인구가 불어나고 있는 강남에 속속 들어서는 수많은 국민학교 운동장 건너편으로는 고층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에 비해, 낮으막하고 검은 색의 한옥지붕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는 해도 「오래된」 동네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신선한」 감동이다.

물론 그 너머로는 고층건물들이 많이 솟아있다. 그런데 그 중 한 건물의 꼭대기에는 「종로사우나」라는 표시를 크게 달아놓은 것이 학교 운동장에서 아주 잘 보인다. 옆으로 호텔 간판도 몇개 눈에 뜨인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가며 매일 쳐다보게 되는 간판이다.
그밖에 운동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백년된 국민학교에서나 일년된 강남의 국민학교에서나 똑같은 것들이다. 그네, 시소 등 몇가지 놀이기구들이 한쪽 가에 설치되어 있고, 교사 정면 한복판에는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이 올라가시는 단이 하나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느 국민학교에 가더라도 볼 수 있는 획일화된 풍경이리라.

교사 안으로 들어서 보더라도 이 획일성은 계속된다. 건물 길이 방향으로 좁고 긴 복도가 있고 이것을 따라 교실이 줄지어 붙어있다. 이것 역시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교실배치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교실이나 복도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요즈음 같이 목조건물이 귀한 때, 이 또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어릴 때 다니던 국민학교도 목조건물이었다. 낮 동안 수많은 아이들이 오가며 밟아대느라 눌리고 뒤틀려 삐걱거리던 나무바닥이 밤이 되면 제자리로 돌아오느라 이상한 소리를 내곤 했다. 이것이 「우리 학교에는 밤에 귀신이 나온다」라는 소문을 낳게 되었는데, 물론 낮에는 이 귀신이 숨어있었으니 어린 우리들은 그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귀신 이야기말고도 오래 된 국민학교들은 으례 비슷한 전설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학교 마루 밑에는 용 또는 천년묵은 두꺼비가 살고 있었는데 몇십년 전에 용감한 수위아저씨가 이 용을(두꺼비를) 잡아 죽여버렸기 때문에 이 용이(두꺼비가) 앙갚음하느라 우리 학교는 소풍갈 때마다 비가 온다는 그런 전설이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된 요즈음 국민학교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긴 해도, 두꺼비나 용 보다는 영화 속의 쥬라기 공룡과 텔리비젼 만화 속의 로보트에 더 친숙한 우리 아이들이다보니 행여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섭섭하다는 느낌이다.

교동국민학교의 현 교사는 1921년에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2층밖에 없는 벽돌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일제의 농촌 경제수탈이 가속화되면서 수많은 이농민들이 서울로 이주할 때였는데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7년 후인 1928년 한 층을 더 올려 3층 건물이 된다. 이 당시 100만이던 서울의 인구는 그로부터 50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1977년 교동국민학교 건물은 한 층이 더해져서 현재의 4층 건물이 되었다. 이 당시에는 소위 콩나물 교실이라하여 한 반에 80명씩을 넣어도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수업을 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63년에 학생수가 525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고 그곳에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강북 도심에는 상주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대적 상황을 충실히 반영해 온 교동국민학교는 이때도 예외는 아니어서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여 현재는 학생수가 단 512명이라고 한다. 증축을 거듭하면서 늘어났던 교실은 하나 둘 서예실, 미술실 등의 특수교실로 그 용도가 바뀌게 되었다. 강남개발의 붐을 타고 재빨리 짐을 챙겨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강북 도심 상업지역에 남아 사는 집의 아이들이 누리게 된 넉넉한 공간과 다양한 특수교실이 왠지 보기가 좋다.

마지막으로 교실 내부를 보면 앞쪽으로 칠판과 교단, 교탁이 있고 선생님 책상 옆에는 풍금이 놓여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교실 풍경이다. 물론 새로이 들어선 것들도 있다. 텔리비젼이 한대 놓여있고, 천장에는 선풍기도 달려있다. 조개탄 난로 대신 도시가스 스토브도 벽에 몇개가 붙어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선풍기와 도시가스 난방은 불과 5년 전에 들여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일하는 회사 사무실, 은행, 심지어 동네 분식집에도 에어콘이 정착되는 시기에 그제야 국민학교 교실에 선풍기가 놓여진 것이며, 아파트는 물론이요 단독주택에도 보일러가 다 보급된 후에야 도시가스 난방이 들어온 것이다. 지역개발과 인구증감 등의 시대적 상황에 민감한 국민학교가 편의시설면에서는 시대조류에 민감하기는 커녕 이십년을 뒤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책걸상은 칠판을 향해 오와 열을 맞추어 놓여있다. 국민학교 교실에서 하루 다섯시간 이상을 보내는 아이들은 앞 자리에 앉은 아이의 뒷통수를 쳐다보고 자란다. 물론 내 뒷통수를 뒤에 앉은 아이에게 보여주며 자란다. 사실은 이런 식의 인간관계는 아주 부자연스럽다.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교류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야 상대방의 눈을 보거나, 표정을 살피기도 할 수 있어 서로의 관계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학교 교실에서는 아이들끼리의 만남에서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교단 앞에 선 담임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의 관계만이 강조된다. 토론식이 아닌 주입식 교육이 편한 그런 배열일 수밖에 없다. 우리도 옛날 이렇게 자라난 사람들이니 이런 식의 삶이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반포나 잠실벌에서 볼 수 있는 남쪽 방향으로 줄지어 서있는 아파트에서 살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다. 나는 내 앞동 아파트 건물의 후면을 보며 살고, 내 뒷동 사람들은 내 아파트 뒷면을 보고 산다. 서로 주고받는 삶이 아니라 받을 사람 따로 줄 사람 따로 있는 우리네 삶이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면 지나치게 냉소적인 견해가 될까.

오는 9월 18일 교동국민학교는 개교 백주년 기념행사를 치룬다고 한다. 모든 것이 새로이 나타나고 또 빨리 사라져가는 우리네 서울의 삶이다. 왕궁은 공원이 되었고, 잠실 나룻터는 아파트촌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나마 백년을 지켜내려오고도 아직도 건강한 교동국민학교에 찬사를 보낸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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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댓글 : 1
안의순   2012-01-04 16:35 [ Modify ]  [ Delete ]
서울신문 "폐교 위기서 명품학교로… 서울 교동초교의 부활" 2011-02-22  25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222025006

십몇 년의 세월 동안, 500명이던 학생 수가 100명이 되었고 신입생이 이제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모든 것이 빨리 변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