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보여주는 문화
서울의 삶터
| 2011-12-27 오후 5: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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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텔리비젼에 나오는 광고를 가만히 살펴보면 옛날에 보던 제품소개 광고와는 달리 무슨 줄거리가 있거나 멋진 이미지를 전달해 주고 있어 보기에 무척 재미있다. 콜라나 사이다 등의 청량음료 광고를 예로 들어보자. 예전 같으면 콜라가 얼마나 시원하고 맛이 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얼음에 재어 놓았다가 갓 꺼낸 콜라병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그것을 유리잔에 따르면 싸아하고 올라오는 거품을 보여주었을 터다. 그런데 요즈음 광고에서는 순진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용기를 내어 예쁜 미소를 짓는 여자아이에게 사이다 캔 하나를 건네주고는 뒤돌아 서서 스스로 대견해하며 기뻐하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할아버지와 손자가 각기 콜라를 손에 쥐고 나란히 서서 흥겨웁게 걸어가는 모습을 비추어 준다. 팔려는 제품의 소개보다는 그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단순한 제품소개로부터 제품소비에 관련된 멋진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의 변화는 텔리비젼 광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요즈음 서울거리에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 패스트푸드 체인점과 커피전문점에도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이 두 장소와 예전에 서울시민들이 자주 찾았던, 그러나 요즈음 들어 그 자취를 감추어 가는 통닭집이나 다방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통닭집은 가게 앞면이 벽체나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고 단지 작은 창문을 통해 통닭을 막대에 꿰어 굽는 것을 보여준다. ࡔ여기서 닭을 구워 팔고 있으니 들어와서 사 잡수시오ࡕ라는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 밖에서 가게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아 누가, 몇명이서 어떻게 닭을 먹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순한 제품소개에 그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햄버거나 튀긴 닭 등을 파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은 그렇지 않다. 이 가게들은 앞면이 투명한 판유리로 되어 있어 가게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그 안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햄버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더군다나 실내 조명이 아주 밝아서 먹고 있는 햄버거나 닭 조각은 물론, 사람들의 행복하고 유쾌한 표정까지도 그대로 보인다. 제품의 소개뿐만 아니라 제품의 소비로 인해 창출되는 행복감까지도 생생히 전달되는 것이다. 절묘한 광고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재치있는 광고술로만 여길 수는 없다. 기실 가게 안의 젊은이들은 밖에서 들여다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고 속의 모델역할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통닭집을 찾는 나이 든 사람들과는 달리 서양에서 들여온 패스트푸드 체인점을 찾는, 서구문화에 좀더 친숙한 젊은이들이어서 그럴까.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이제 나이 든 사람들의 다방과 젊은이들의 커피전문점도 한번 비교해 보자. 다방의 실내는 대체로 어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한쪽 구석에는 텔리비젼이 켜져 있다. 다방 안 여기저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실내가 어두운 탓인지 주위 사람들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동행한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거나, 딱히 나눌 이야기가 없거나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텔리비젼에 눈을 주고 있다. 여기서 텔리비젼은 지하철 열차 속에 줄지어 붙어있는 광고들과 같은 용도로 쓰인다. 혼잡한 차내에서 주변 사람들과 어색한 눈초리를 교환하느니 차라리 외우다시피 여러번 본 광고라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다방 내부를 휘휘 둘러보다가 다른 이와 눈이 마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텔리비젼 프로의 내용에 상관 없이라도 거기에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 편한 것이다.
커피전문점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실내가 밝다. 전면의 투명한 판유리를 통해 밖의 환한 빛이 들어오기도 하고 실내조명도 워낙 밝다. 그러니 가게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다 잘 보이고, 가게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잘 보인다. 거꾸로, 가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잘 살펴 볼 수 있을 것이요, 가게 밖의 사람들도 날 잘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곳의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남이 무슨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 내 모양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는지. 공중의 장소에서 서로를 보고 보여주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 구경도 재미있고 또 누가 날 보아주는 일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다. 햄버거 집에서 또 커피전문점에서 누가 날 찬찬히 뜯어보아도 그것으로 인해 나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말에는 영어의 「프라이버시」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어휘가 없다. 英韓사전을 찾아보면 「러브」는 사랑이요, 「조이」는 기쁨이지만 「프라이버시」는 그대로 프라이버시로 쓰여있던지 아니면 「남의 눈을 피함, 은거, 은둔」 등으로 다소 장황하게 그러나 모호하게 설명되고 있다. 5천년을 지켜 내려오는 순수한 우리말에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 문화는 「뵐」 낯이 없다든가, 잘 「보여야」 일이 성사가 된다든가 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남의 눈에 나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 문화이다. 또 우리네 탈춤판과 서양의 연극공연장을 비교해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먼저 서양의 연극장을 보면 극장내부 전면에 무대가 있고 관객은 불이 꺼진 관람석에서 조명이 비치는 무대를 향해 잠자코 앉아 배우들의 일방적인 연기를 보게 된다. 관객은 누구에게도 노출이 되지 않는다.
우리네 탈춤판은 환한 옥외에서 벌어지는데 관객은 탈춤패를 원형으로 빙 둘러싸고 앉는다. 무대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이쪽의 관객은 탈춤패 건너 저쪽의 관객을 볼 수가 있다. 건너편 관객이 ࡔ얼싸!ࡕ 소리를 내고 어깨짓을 하며 흥겨워하는 것을 보며 나도 절로 그 흥에 동참하는 것이다. 탈을 쓴 춤패들도 관객의 반응을 보아가며 탈춤의 완급을 조절하고 즉흥적인 대사를 집어넣기도 한다. 내가 흥이 나는 것을 탈춤패에게 보여주어야 그들도 더욱 흥이 나서 춤판은 점점 더 재미를 더해 가는 것이다. 결국 춤패와 관객 사이, 관객과 관객 사이의 교호작용(交互作用)의 상승으로 춤판은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나 커피전문점은 이들 장소의 서구적인 이름이나 판매방식 때문에 「서구화」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개방감(開放感) 또는 교호작용(交互作用)이라는 우리네 전통적 정서를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멋」을 지닌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통닭집이나 다방보다는 훨씬 한국적이다. 서울은 눈코 뜰새 없이 바삐 변해 가는 국제도시이다. 그런 와중에도 잘 살펴보면 우리 고유의 것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또 되살아남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래도 서울은 「살만한」 도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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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