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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병원
서울의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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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오후 6:21:28
| 조회수 :
2349
|
공개
지난 육백여 년 동안 서울의 구석구석에서 거의 한시도 빠짐없이 계속 진행되어 온 일이 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아기의 탄생은 부모나 주위 사람들에게는 기쁘고 경이로운 순간이지만, 태어난 아기의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고통스럽고도 혼란스러운 순간이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홉 달을 보내는 동안 아기는 따뜻한 물 속에서 편안하게 둥둥 떠있었으며, 탯줄을 통해 엄마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물 밖 세계로 쫓겨난다. 게다가 이제껏 생명줄이었던 탯줄은 무지막지하게 잘려져 나간다. 손가락 끝을 문틈에 찧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돌만큼 아픈데, 신체의 일부가 잘리니 얼마나 아플까. 그뿐이랴, 바로 이 순간부터는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못하던 호흡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코와 입을 벌리고 공기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빨아들이고 내뱉는다. 낚시 바늘에 찔린 채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져 팔딱거리는 물고기가 겪는 고통을 갓 태어난 아기도 겪는다.
아늑하고 어둑하던 주위도 갑자기 환해지고 간신히 떠지는 눈을 통해서 빛이 아프도록 쏟아져 들어온다. 기껏해야 엄마의 규칙적인 심장박동만 듣던 귀를 통해서도 온갖 이상스러운 소리가 들어온다. 태어난 지 십초도 채 지나지 않아 아기는 이렇듯 엄청난 고통과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기는 발버둥을 치며 울음을 쏟아낸다. 어른들은 아랑곳 없이 이 아기를 어른들의 사회로 끌어드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몸무게를 달고 키를 재서 종이 위에 적어넣는다. 갓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아기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몇 개의 숫자들인 셈이다. 이러한 숫자들은 앞으로 이 아기를 평생 괴롭힐 것이다. 시험성적, 월급봉투, 좋건 싫건 달고 다녀야 하는 주민등록번호, 골치 아픈 전화번호 등. 발목에는 엄마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가 붙는다. 물론 며칠 후면 아기는 자기의 이름을 갖게 된다. 어찌되었던 이 순간부터 아기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서보다는 이름 석자와 주민등록번호로 확인되는 사회의 부속품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사회의 질서는 무자비하다. 고통과 혼란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남녀 성 구분에 따라 파랑색이나 분홍색 옷을 입힌다. 아직 잘 펴지지도 않는 아기의 팔을 잡아당겨 옷소매에 꿰어 넣는다. 그리고는 아기를 바구니에 놓아 신생아실로 옮긴다. 신생아실에는 같은 처지의 아기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생긴 바구니 속에서 오(伍)와 열(列)을 가지런히 맞춘 채 누워있다.
고통과 혼란 속에서 발버둥치는 우리 아기들이 내 아기 네 아기 할 것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질서정연하게 정렬된 바구니의 행렬 속에서 첫날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 아기들의 앞날은 계속 이럴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질서는 그저 남과 같이 행동하고,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기를 요구한다. 국민학교 조회 때 줄 맞추어 서고, 줄 맞추어 지어진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휴가철 고속도로에 줄지어 꼼짝 못하는 자동차 속에서 조금씩 늙어가는 것이다. 급기야는 「줄」만 잘 서면 성공도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줄의 시작은 이렇듯 병원 신생아실에서 시작된다.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가 하면 바로 그 병원 다른 쪽 구석에서는 하나의 생명이 스러져간다. 서울역 앞에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 사람이 경찰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다.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들, 이런 저런 의료기구와 약품을 들고 이리저리 뛰는 의사와 간호사들, 속수무책인 채로 환자 침대 주위를 맴도는 가족들로 응급실의 분위기는 아주 혼란스럽다. 방금 도착해 들것에 묶여 응급실로 옮겨져 가는 이 응급환자도 갓 태어난 아이만큼이나 고통과 혼란에 빠져있다. 몸을 심하게 다쳐 고통스러운데다가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는 말이다.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맥박을 재보고, 링거를 꼽는 등 아주 급한 응급처치가 끝나면 환자는 들것에서 침대로 옮겨진다. 이때 다시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으로 시작되는「사회질서」가 그림자처럼 쫓아온다. 이른바 입원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오와 열을 맞추어 줄지어 놓인 침대 위에 눕혀져 응급환자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몸부림친다. 자연의 혼돈과 인공의 질서가 공존하는 곳, 그곳이 바로 병원 응급실이다.
이들 중 몇몇은 살아남아 내일 아침 중환자실로 옮겨지지만, 나머지 몇몇은 이 응급실에서 숨을 거두고야 만다. 이들이 옮겨지는 곳 역시 병원의 한 부분으로 영안실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영안실은 예외없이 병원건물의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한다. 대개 지하실에 있거나 따로 떨어진 독채를 사용하게 된다. 아마도 특히나 응급실과는 가장 먼 쪽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데, 이곳에 가보아도 혼란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하다.
병원 영안실에는 대여섯군데의 분향소가 배치되어있다. 각각의 분향소 제일 안쪽에는 망자(亡者)의 영정이 놓인다. 그 뒤로, 또 옆으로는 살아생전 망자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이었는가를 과시라도 해야된다는 양「어디 아무개」가 보낸 화환들이 도열해 있다. 그 앞에서 망자의 직계가족이 처연한 모습으로 조문객을 맞는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잘 정돈된 모습이다. 그런데 분향과 조문을 마친 손님들은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교자상을 둘러앉아 술잔을 주고받는다. 망자의 친구들, 맏아들 친구들, 둘째 아들 동창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니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여러 패로 나뉘어 앉아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상가(喪家) 식구들이 안주와 술을 나르느라 바삐 움직인다.
분향소 한편 구석에서 가끔씩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보니 화투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뿐이랴. 고교 동창이 상을 당해야 그 시절 친구들 얼굴을 볼 수 있다며 서로 반가워하며 명함을 주고 받는 이들도 눈에 뜨인다. 바로 옆 분향소의 망자는 기독교인이었던 모양인지, 한무리의 신도들이 모여 나직한 음성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매캐한 담배연기, 시큼한 술냄새, 향 냄새가 웃음 소리, 찬송가 소리와 함께 지하 영안실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지칠대로 지친 유족들은 떠난 이를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내일모레 발인날까지 계속될 이 혼란스러운 영안실 분위기에 압도당해 망연자실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혼잡한 상가 풍경은 우리네 고유의 풍습이다. 상가에 몰려가 떠들썩하게 시간을 보내주어야만 유족들이 지나친 슬픔에 잠겨 그네들마저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배려라고 한다. 평소 그토록 사회질서를 강요하더니 상가에서만큼은 일부러 혼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망자는 영안실 뒤편 냉동실에 조용히 누워있다. 그야말로 영원한 휴식, 영면(永眠)에 들어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있듯이, 이제 망자는 자연의 질서에 귀의하여 온갖 생의 걱정을 뒤로 한 채 평화로움 속에서 쉬고 있다. 같은 병원에서도 영안실의 혼돈과 질서는 신생아실이나 응급실의 그것과는 다르다. 후자에서는 자연의 혼돈에 인공의 질서가 뒤섞여있다면, 전자에서는 인공의 혼돈 속에 돌이킬 수 없는 대자연의 질서가 말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육백여 년 전이나 오늘이나 서울의 어느 구석에서는 혼돈과 질서가 뒤섞인 채로 생명이 태어나고 스러져간다. 이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서 우리는 서울을 우리의 삶터로 삼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미지출처- 사진1- 네이버 뉴스(세계일보-2006.11.20), 사진2- 네이버 블로그 "늘푸른 산후조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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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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