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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남산 서울타워에서 본 서울
서울의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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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29 오후 6:22:54
| 조회수 :
3512
|
공개
도시는 선(線)이라 했듯이, 우리는 도시를 선으로 이해하고 산다. 각자의 출근길을 한번 생각해 보자. 집 앞 도로에 들어서서 일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길을 따라 가며, 이 출근길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에 익숙해져 있다. 집 앞 길 첫번째 신호등 네거리 우측에는 치과병원 간판이 있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새로 지은 예쁜 건물이 있는데 일층은 은행이고 2,3층은 무슨 미술학원이다. 한참을 더 가면 잠실 롯데월드 건물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좌회전하면 거리 양쪽으로 아파트 건물들이 보이다가는 오른쪽으로 종합경기장도 나오고, 무역센터 건물도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릴 수가 있다. 이렇듯 매일 다니는 출근길의 거리 풍경은 길의 진행방향에 따라 순서에 맞추어 다 외고 있다. 그렇지만 이 길에서 조금만 들어서면 뒷골목들에 펼쳐지는 동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누가 무엇을 하고 먹고살고 있는지, 이 동네와 우리 동네는 어떤 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는지.
어느 길을 가던지 우리는 길이라는 선을 따라 서울을 이해한다. 그 이해라는 것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작해야 가끔 들쳐보는 서울시 지도에서야 서울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이 「W」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울시 지도를 놓고 찬찬히 살펴보지 않고는 그 유명한 부와 쾌락의 동네 압구정동이 이「W」자의 가운데 위로 솟은 부분(그래서 누군가의 지독한 풍자를 빌리자면 벌린 다리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우리는 그저 압구정동을 압구정로의 값비싼 아파트 건물과, 그 뒷골목에 늘어선 유흥업소나 옷가게들이 이루는 거리풍경으로만 인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거대도시 서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지라 서울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땅 위에 붙어서, 그것도 이리저리 꼬불꼬불 나있는 길을 따라서, 길 양쪽의 건물들을 통해서 보이는 서울을 서울로 알고 지낸다.
그렇지만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남산 꼭대기, 게다가 그 위의 서울타워의 전망대에 올라보면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울은 길과 건물로 이루어진 線들의 조합으로서가 아니라 전체적 자연경관과 독특한 경제, 사회, 역사적 성격을 지닌 다양한 동네의 조합으로의 실체를 드러낸다. 좀 더 찬찬히 살펴보자.
서울타워 전망대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조선 왕조의 새로운 도읍지 한양이 들어섰던 부분이 보인다. 600여 년 전 서울은 4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서 시작되었다.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北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南 주작(朱雀)인 목멱산(지금의 남산), 東 청룡(靑龍)의 낙타산(지금의 낙산), 그리고 西 백호(白虎) 인왕산을 이어 성벽을 쌓고 그 중간에 네개의 대문을 지어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지인 한양을 건설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시조인 이성계도 여기 남산에 올라 당대 최고권력자로서 한 눈에 들어오는 한양 땅을 내려다보았을 터다. 그리고는 신도시 한양이 중심이 되어 아래 위로 펼쳐지는 삼천리 조선 땅의 앞날을 꿈꾸었으리라.『백악의 봉우리 밑에는 정전(正殿 - 경복궁)을 짓고, 그 오른쪽에는 종묘를, 왼쪽으로는 사직을 지으라. 저기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지금의 청계천)이 보이느냐? 저 개울을 따라 길(지금의 종로)을 내도록 하라.』
이성계가 섰던 자리에 우리가 서서 옛 한양을 내려다 본다. 물론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작해야 정도(定都) 당시에도 있었던 광화문이 보일 뿐이다. 그 뒤로 경복궁의 건물 지붕들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욱 눈에 뜨이는 것는 몇년 전 완공된 신축 청와대 건물이다. 옛날 임금이 기거하던 경복궁 보다 더 높은 곳에 지어 그야말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고권력자의 거처이자 집무실이다.
600년 전 역모를 하여 나라를 차지하던, 30년 전 쿠데타를 하여 군사독재자가 되던, 최근의 민선 대통령이 되던, 지난 여섯 세기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통치자가 사는 곳이다. 사실 이 곳은 북악의 잘 생긴 봉우리 밑에서 左 청룡 낙산과 右 백호 인왕산의 보필을 받는 천하의 명당자리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바뀌었으되 변치 않고 남아있는 것은 서울의 빼어난 자연 경관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자꾸 변해간다. 북악이나 인왕은 그래도 청와대에서 가까운지라 철저한 보안이 유지되어 자연 그대로의 푸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들 보다 조금 낮기도 하려니와 청와대에서 멀리 떨어진 낙산은 이제 산의 모습이 완전히 망가뜨려졌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던 60년대에 낙산에는 도시빈민층이 정착을 시작하여 달동네가 들어섰고, 설상가상으로 그 악명 높은 시민아파트도 건축되었다. 그리하다 보니 나지막한 낙산은 조금씩 깎여질 수밖에 없었고, 綠地는 흔적조차 없다. 지금 여기 서울타워에서 내려다보니 낙산은 그저 조그마한 달동네 언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양의 좌청룡이던 낙산 청룡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을까.
서울타워에서 동쪽을 향해 보면 바로 아래 자유센터와 신라호텔이 모습이 보이고, 조금 더 동쪽으로 금호동 달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직선 거리로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사람이 남든 길을 따라서는 몇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초호화판 호텔과 달동네의 상대적 위치는 地上에서는 쉽게 느낄 수가 없다.
달동네 한 쪽에 올망졸망 들어선 불량주택들을 헤치고 재개발 고층 아파트가 군림하는 자세로 불쑥 솟아 나와 있다. 이 또한 서울의 기쁘고 슬픈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준다. 이 달동네와 고층 아파트 너머로 한강이 흐르고 한강변에는 88올림픽 도로와 동부간선도로가 보인다. 워낙 부족한 도로를 값싸게 만들려니 누구의 땅도 아닌 한강변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만들어 놓은 도심 고속도로들이다. 시민들이 걸어서 강변에 다가갈 수는 없어 섭섭하기는 하지만 어쩌랴. 교통지옥을 겪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악몽의 성수대교가 가로지르는 한강 너머로는 잠실벌이 펼쳐진다.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남개발의 현장. 멀리 성남시에 이르기까지 아파트들이 끝도 없이 계속된다.
서울타워의 정남향으로는 멀리 웅장한 관악산의 전경이 보인다. 타워 바로 밑으로는 이태원과 해방촌, 미8군 기지가 있고, 남쪽으로 갈수록 동작대교를 지나 국립묘지가 있고 그너머 봉천동이 아스라히 보인다. 이렇게 이태원과 국립묘지, 봉천동을 꿰뚫어 보니 서울의 나이테가 느껴진다. 600년전에는 남산이 서울의 끝이었다. 현대에 들어서 우리는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치게 되고, 곧이어 한국전쟁을 겪는다. 이때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자리잡고 살기 시작한 해방촌으로 서울은 한겹의 나이테를 추가한다. 물론 이때 미군이 들어오면서 이태원이라는 동네가 지금과도 같은 분위기와 모습으로 자리잡게 된다. 전쟁이 끝이 나면서 한강 건너에는 국립묘지라는 전몰장병들의 안식처가 마련된다. 이때만 해도 강 건너 국립묘지쯤 되면 서울의 남쪽 끝, 나무로 치자면 외피(外皮)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나무가 그렇듯 서울이라는 도시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한때 외피였던 부분은 다시 나이테로 흔적을 남기며 계속 성장을 해간다. 60년대 후반 강북 무악재 부분이 재개발되면서 쫓겨온 저소득층은 국립묘지를 지나 봉천동 산기슭에 다시 무허가 시멘트 블록집을 지으며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다시 새로운 외피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외피도 오래 갈 수는 없었다. 80년대를 지나며 엄청나게 불어난 서울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우리는 관악산 너머 과천이라는 신도시도 만들어 내고, 그것도 모자라자 이제는 남쪽 더 멀리 분당이라는 한촌(閑村)에 엄청나게 큰 도시를 하나 만들어 나이테를 하나 더했다. 여기 서울타워에서 보면 이 분당 신도시에 빼곡히 들어선 고층아파트들의 꼭대기가 산등성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강남의 중산층들이 좀 더 큰 평수의 (그래서 좀 더 투자가치가 높은) 아파트를 찾아 너도나도 분양받아 옮겨가 산다는 분당 아파트. 주위에 푸른 산도 많고 가운데 녹지도 많다는 분당 신도시. 그래서 그런지 이 분당 아파트들이 산 너머 하늘에 떠 있는 듯, 하늘나라의 반짝이는 도시인양 느껴진다.
시멘트 블록집의 봉천동 달동네와 콘크리트 아파트의 분당 신도시. 같이 하늘에 가깝고, 같은 시멘트로 지어지고, 같은 서울의 나이테를 이루지만, 서로에게는 너무나 먼 동네들이다. 서울은 이렇게 한 몸체 안에 천태만별의 삶을 담고 있다.
남산 서울타워에서 바라 본 서울. 지상에서 서로 비비고 살 때는 모르던 서울의 구조적 애환이 하늘 위에서 바라보니 이렇게도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포토갤러리-kgmimi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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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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