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종로거리

서울의 삶터 | 2011-12-29 오후 6:23:40 | 조회수 : 8245 | 공개

건물의 수명은 과연 몇년이나 됩니까? 그런데 이 빌딩을 적어도 내 증손자까지는 대물림하고 싶은데... 건물 하나 지어놓으면 그래도 한 50년은 서있겠지요?

건축을 전공한 필자는 가끔 이런 식의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건물이 수명이 다해 무너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대답해 주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 언젠가 와우 아파트 건물이 무너진 것은 부실공사가 원인이었지 수명이 다했던 것은 아니다. 경복궁 앞 광화문이 80년전에 일제에 의해 헐린 것도 수명이 다해 무너져 내릴 염려 때문이 아니었다. 몇 년 전 헐린 조선총독부 건물도 앞으로 백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것을 허물어 버렸다.

우리는 서울의 건물들을 수명 때문에 허물고 다시 짓지는 않는다. 다만 경제적 또는 상징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마포 아파트는 경제적 가치에 (재개발은 돈이 되는 사업이기 때문에), 광화문은 상징적 가치에 (조선 왕조를 몰락시킨다는) 희생이 된 예이다.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헐어 버린 조선총독부 건물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옛날에는 건물들을 요즘 같이 쉽게 허물고 다시 짓지는 않았었다. 화재가 나거나 큰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지난 일세기 동안 서울의 건물들은 큰 수난기를 겪었다. 일제는 좀 더 철저한 식민지 통치를 위해 서울의 도시구조를 완전히 바꾸려 했고, 그 와중에 수많은 옛 건축물들이 사라져 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은 서울의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여기서 간신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건물들, 또 종전 직후에서 60년대를 지나기까지 어렵사리 지어진 초라한(?) 건물들은 이제 경제발전의 깃발 아래 쑥쑥 올라가는 고층건물의 자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불도저에 밀리고 말게 된다.

그래서 서린동, 무교동의 낙지 골목이 없어지고, 을지로 재개발사업으로 장교동의 한옥들이 사라져 갔다. 광화문 네거리의 한 모퉁이에 서서 이국 여배우의 요염한 얼굴이 그려진 간판을 내세워, 그 앞 엄숙한 얼굴의 충무공 동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던 국제극장도 이제는 없어졌다. 그 대신 이런 건물 자리에는 경제발전의 상징으로서 또한 재개발의 실질적 이득을 위해서 고층 오피스빌딩들이 들어선 것이다. 이것이 90년대를 보내는 우리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근처 보신각 네거리에서 동쪽으로 삼일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종로2가라고 부르는 길에 가보자. 조금 나이든 사람들은 모두 이 거리의 옛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다. 보신각 건너편에는 그 유명한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또 그 서쪽 건너편에는 신신백화점이라 불리웠던 2층의 원시적인(?) 쇼핑몰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신신백화점은 진작 허물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 거창하게 들어서 있다. 그 남쪽으로는 영풍빌딩이 멋지게 세워졌다. 물론 1937년 건립 당시 르네상스풍의 양식 건물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추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화신 백화점도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그 자리에는 기묘한 모습의 삼성생명 본점 건물이 들어서버렸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작된 재개발의 물결이 이곳 종각 네거리까지는 진출한 모양인데 다행스럽게도 여기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화신백화점 자리에서 동쪽으로 계속 걸어서 탑골공원을 만날 때까지 북쪽편 종로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1968년 완공된 8층의 YMCA 건물이다. 길 건너도 마찬가지이다. 지었다하면 이삼십층인 요즘 세상에 십층 이상의 건물을 볼 수가 없다니 참 신기하다. 서울의 심장인 종로구, 이 종로구의 노른자위 종로 2가에 삼십년 전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거리의 풍경은 6,70년대의 풍경과 같지는 않다. 적어도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의 눈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십년 전 대학교 뺏지를 달고 종로거리를 거닐 때 보이던, 우중충한 콘크리트에 누렇고 푸르뎅뎅한 타일을 붙였던 건물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 대신 건물 바깥 면 전체에 유리를 덮고 거기 커다란 그림을 그려놓은 건물이 있는가 하면, 유럽풍의 화려한 장식과 박공 창문들을 낸 건물도 보인다. 햄버거 가게의 전면 판유리는 압구정동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새 건물들을 지어 놓았나? 그렇지 않다. 단순히 옛날 건물에 요즈음 감각에 맞추어 새 옷을 입혀 놓았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건물들이 지어질 때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스무살 전후의 우리의 자식들도 옛날의 나와 같이 이 종로거리를 걸으며, 이 건물들이 마치 자신들만을 위해 새로이 지어진 건물인양 희희낙낙 들락거릴 수 있는 것이다.

건물이란 워낙 튼튼하게 지어지는 것이어서 백년, 이백년을 버틸 수 있다. 다만 이렇듯 필요에 따라 새 옷을 걸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 주위에서 이토록 내구적(耐久的)이면서도 융통성 있는 물건을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 건물은 물건이 아니라 참으로 건실한 忠僕과 같다.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내 필요에 따라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요모조모 바꾸어가며 내게 봉사하는 믿음직한 하인. 이런 하인을 가차없이 내쫓고 좀 더 덩치 큰 (그래서 일을 더 잘할 것만 같아 보이는) 하인을 새로 들이는 요즘의 세태 속에서, 종로 2가의 옛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로 의지하고 서 있는 것이 정말 보기가 좋다.

그렇다. 여기서는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한 건물과 바로 옆 건물은 한치의 틈도 없이 바싹 붙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강남에 새로 생기는 건물들을 보면 이것들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들인데도 서로 사이에 최소 일미터의 틈을 두고 있다. 6,70년대의 종로 시대 이후, 8,90년대의 강남 시대로 접어들면서 바뀐 건축법에서는 건물이 대지 경계선에서 최소한 오십센티미터 이상 떨어져 지어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남의 새 건물들은 모두 홀로 서있다. 그런데 역시 종로의 건물들이 보기가 더 좋다. 건물의 입면은 서로 모여 도시의 병풍을 이룬다. 다양하되 통일감을 주는 그림들을 이어붙여 만든 병풍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종로의 건물들이 만드는 병풍이 바로 그렇다. 강남 건물들은 여기저기 끊어지고 갈라진 병풍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의 거리는 차를 타고 다니다가 여기서 잠깐 차를 세워 들르고 저기서 다시 차를 세워 볼일을 보는 거리이다. 종로 거리와 같이 천천히 걸으며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거리의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종로 거리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갖가지 노점상들도 거리의 재미를 더해준다. 영화배우나 가수의 포스터가 펼쳐져 있기도 하고, 갖가지 모양의 커피잔이 손수레 기둥에 매달려 있는가 하면, 인기가요 카세트 판매대에서는 신나는 리듬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싸구려 목걸이나 머리핀을 파는 손수레에는 여학생들이 몰려들고, 심지어는 농익은 파인애플을 즉석에서 잘라파는 것을 반바지에 어깨 없는 티셔츠 차림의 젊은이들이 길바닥에 털썩 앉아 맛있게 먹고 있다.

종로 2가는 젊은이들의 거리이다. 대로변을 떠나 뒷길로 들어서면 거미줄 같이 얽힌 길에 개성있는 차림의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간혹 차를 타고 여기에 들어서는 용감한 20대 후반의 늙은이들도 있다. 그런데 차가 사람에 막혀 거북이 걸음이다. 차가 사람보다 천천히 가야하는 길이 바로 종로 2가 뒷길이다.

이 뒷길에는 호프집, 분식집, 커피전문점 아니면 노래방이 줄지어 있을 뿐, 그 흔한 옷가게 하나 없다. 철저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분위기이다. 가끔씩 길거리에 전자오락기기도 나와 있다. 순간순간의 재미를 찾아 길을 가던 젊은이들이 즉흥적으로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한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렇다. 『어디로 갈까?』 『오늘 벌써 세번째 켄터키 치킨 집에 들어가네... 』

대학생들이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십년전 바로 이 거리를 배회하던 내 젊은 모습을 가게 유리창에 비추어 보고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다. 삼선개헌과 유신의 암울한 시절, 검은색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는 바로 이 종로 뒷골목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괴로워하는 남자친구. 그 등을 두드려주던 롱스커트와 하얀 양말의 여대생의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이곳 종로 2가의 뒷골목에는 젊은이들의 삶이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며 이어지는 것을 어쩌랴.

뒷골목을 따라 서쪽으로 한참 걸어 가보면 보신각 뒤가 되는데, 엉뚱하게도 주단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 화신백화점 바로 건너 대로변에 있던 이 주단집들이 비록 장소는 보신각 뒤로 옮겨졌지만 이 떠들썩한 젊은이들의 거리 한쪽 끝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주 재미있다. 재미있고 유쾌한 남자친구의 팔짱을 끼고 종로 2가의 뒷골목을 누비던 짧은 바지, 어깨없는 셔츠의 젊은 여대생들. 이들의 젊음도 결국 오륙년을 넘기지 못해 인생의 진짜 짝을 만나야 할 것이며, 결혼식을 앞두고는 이제껏 잘 놀던 동네 해지는 서쪽 끝으막에 있는 주단집에 들러서 한복도 맞추고, 시부모님 금침보료를 마련해 놓아야 하는 것일까.

누가 여기에는 무슨 가게가 들어가고 저기에는 무슨 가게가 들어가라 명령하지 않아도 서울의 구석구석에는 천태만상의 가게들이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들어선다. 600년 전 운종가(雲從街 - 종로의 옛 명칭)에서도 오늘의 鍾路에서도 이러한 가게들 사이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가는 구름같이 흩어져 간다. 그저 남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건실하게 서있는 건물들 뿐이다.
 
*이미지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