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전쟁기념관

서울의 삶터 | 2011-12-29 오후 6:24:16 | 조회수 : 3207 | 공개

우리는 무슨 일을 벌이던지 크게 벌여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연전에 미국의 저명한 주거문화학자와 함께 온양의 전통주거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그는 차창 왼쪽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분당 신도시의 고층 아파트 숲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Whatever the Koreans do, they do it big and fast (한국사람들은 무엇을 하던지 거창하게, 빨리도 하는구나)」 하기사 고작 5년의 기간 내에 허허벌판의 땅이 인구 40만의 도시로 변하는 것은 지구 상 어디에서고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분당이나 일산 신도시뿐이랴. 그전에도 상계동 아파트단지가 있었고, 포항제철소나 울산 조선소 등도 그렇다.

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큰 것을 만들어 낼 때에 서두르기만 하고 미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결국에는 큰 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크게 또 빨리」에 가치를 두는 것일까. 20세기 초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과 동족간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황폐해진 땅과 굶주린 사회를 물려받은 우리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싸우며 건설」(60년대 재건 구호)도 하고,「새벽종」(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울리면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우리는 조금은 성공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큰 판들을 벌린다. 88 올림픽을 위해 잠실벌에는 엄청난 운동경기장 시설이 들어섰고, 90년대에는 비록 우리끼리의 잔치로 끝나기는 했어도 대전 EXPO도 개최했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자는 분위기가 일어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그래서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대규모로, 그것도 단 시일에 건립하게 된다 (기획에서 준공까지 3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보니 공사 중에 불도 나고 공사 후에는 지붕에 물이 새기도 한다. 개관 첫 해에는 백만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가더니 이듬해부터는 고작 몇만의 관람객만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지난 6월 10일에는 전쟁기념관이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독립기념관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수난을 되새기며 또 이를 극복해낸 우리의 용기와 지혜를 기리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전쟁기념관 또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이 건물을 보면 세종로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금새 알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보다 큰 전쟁기념관은 무언가 좀 이상하다. 물론 근처에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이「거창하게 그러나 신속하게」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쟁기념관 건물의 모양은 조선총독부 건물이나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물이나 다를 바가 없이 권위주의적이다. 이런 건물들은 예외 없이 그 모양이 좌우로 대칭을 이루고 표면 재료도 육중한 화강석을 쓰며, 그냥 땅 위에 서 있으면 초라해 진다는 듯이 최소한 1층 높이의 기단 위에 놓여있게 된다. 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상징하는 전쟁기념관이 왜 이토록 권위주의적이어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마 전쟁기념관이 자리잡은 용산 일대는 나름대로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 위치에 관한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 옛날 병자호란 때는 몽고군이 침입하여 여기에 진을 친 적이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군 본영이 여기 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도 역시 이곳에 본부를 두었고 계속하여 한국전쟁을 거치며 오늘날까지도 이곳에는 미8군 기지가 있다. 물론 우리 국방부도 여기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육군본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이곳은 외세의 침략과 그에 따른 외국군대의 주둔을 겪어 온 곳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전쟁기념관이 여기에 위치하는 것은 역사적 연결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전쟁기념관을 둘러보면서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념관은 기념관이 아니라 저급한 군사 박물관이라는 사실이다. 기념관은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한 장소나 건물이다. 미국의 수도 와싱턴에 가보면 Lincoln Memorial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링컨 기념관이다. 그런데 이 기념관은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속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링컨 대통령의 조각 하나가 있고, 기념관 안쪽 벽체에는 남북전쟁 당시 행했다는 그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문이 陰刻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건물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링컨의 엄숙한 얼굴을 보며 그의 연설문을 눈으로 좇으며 그가 품었던 민주주의와 평등주의의 이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는 월남전을 기념하기 위한 Vietnam Memorial도 있다. 이것은 건물도 아니고, 단지 검은 대리석으로 V자 형태의 나지막한 담을 만들어 놓고 그 표면에 월남전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리석 표면에 새겨진 자신의 동료, 아들, 남편, 아버지의 이름을 손으로 더듬어 보고 눈물을 흘린다. 전쟁은 끝이 났으되 전쟁의 쓰라린 체험은 이곳에서 계속 된다.

그런데 우리의 전쟁기념관(영어로는「War Memorial」로 되어있다)은 만평 가까이 되는 실내외 전시공간에 만삼천여점에 이르는 전쟁에 관련하여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물품들을 모아 보여주고 있다. 원시시대 전쟁에서 쓰인 돌도끼에서부터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쓰던 치약, 소말리아에 파견되었던 우리 간호장교 계급장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기념관은 옛날의 일을 가슴으로 되새기는 곳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전쟁기념관은 이런 체험을 전달해 주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장비실이란 이름을 붙인 커다란 방 천정에 매달아 놓은 비행기, 헬리콥터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방산장비실이란 방에 가득 늘어놓은 국산 총알, 대포알과 전차 부속품에서 우리는 이 땅 위를 스쳐지나간 전쟁에 관한 그 무엇을 돌이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건물은 차라리 국군 홍보관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옳을 것 같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그렇다면 과연 이 전쟁기념관에서는 보고 느낄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전쟁기념관 건물은 「ㄷ」자 형태로 되어있다. 가운데 건물은 이제껏 이야기한 홍보용 전시물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그 양 옆은 回廊이 된다. 줄지어선 이 회랑 기둥들에는 따로 검은 대리석 판을 붙여놓았는데 그 표면에는 1946년 創軍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전사자 십오만오천여명의 전사자 이름을 노란색으로 새겨 놓았다. 마치도 미국 월남전 기념관의 검은 대리석 벽면을 연상케 하여 이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런대로 전사자 각자의 아쉬운 삶이 노란색으로 조그맣게 새겨진 이름 위에 집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새삼 숙연해 짐을 어쩔 수가 없다.

회랑 기둥 사이로 옥외 전시장이 보인다. 한국전쟁 때 쓰인 유엔군의 수송기도 보이고 소련제 야포와 탱크도 있다. 아이들은 기를 쓰고 이것들에 기어올라간다. 탱크 포신 위에 걸터앉고는 밑에서 쳐다보고 있는 부모를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며 손가락으로는 V자를 그려 흔든다. 부모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대포나 탱크 위에 올라가 놀 수 있는 시끄럽고 유쾌한 옥외 전시장의 세상은 이쪽의 조용하고 숙연한 회랑의 기둥에 이름이 새겨진 이들이 만들어 준 세상이다. 이 두 세상의 비교야말로 전쟁기념관이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할 주제가 된다.

무엇이든 크게 단시일 내에 만들어야 하는 우리지만, 전쟁기념관 만큼은 가운데 「홍보관」은 빼버리고, 이 전사자 추모 회랑과 어린이 놀이터화한 옥외전시장만 조그맣게 갖추어 놓았더라면. 또 해가 갈수록 대리석 위의 이름은 그 수를 더해가고, 옆 놀이터에서 놀던 어린아이는 자라 이제 자신의 전우의 이름을 여기서 더듬어 보며 자신의 아이가 대포 위에 올라가 노는 것을 지켜보게 되듯, 오랜 시간을 두고 세대에를 이어가며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전쟁기념관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이미지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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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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