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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서울의 명소
서울의 삶터
|
2011-12-27 오후 2:32:45
| 조회수 :
3104
|
공개
무릇 도시에는 명소(名所)가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다. 뉴욕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다.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고 개선문도 있다. 누구든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증명사진(?) 한장을 찍어야 성에 찬다. 파리의 에펠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명소가 명소인 까닭은 이들이 다른 장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엄청난 크기에다가 자유를 상징하는 멋진 횃불이 있고,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골탑으로 그 구조체(構造體)가 이루는 기계적인 아름다움이 압권이다. 인조물(人造物)의 장엄함뿐만 아니라 자연의 웅장함도 명소가 될 수 있다. 멀리는 유럽의 알프스산맥, 가까이는 백두산 천지도 명소이다.
그런데 정도 600년의 역사를 맞는 서울의 명소로는 무엇이 있을까. 서울에도 자연의 웅장함이나 인조물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흔히들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을 서울 제일의 명소로 들곤 한다. 남대문은 물론 이조 5백년 도읍지의 관문으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현재의 남대문을 바라보자. 주변의 고층건물들에 눌리고, 지나는 자동차의 매연가스에 찌들려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파리의 개선문 같이 주변 반경 100미터 내에 개선문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더라면 남대문도 나름대로의 위용을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동대문도 같은 이유로 애처로운 모습을 지닌채 종로에 남아있고, 서대문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남산 꼭대기의 서울타워는 어떤가. 탑이란 평지에서 높이 솟아올라야 제 맛이 나는 법인데 서울타워는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탑이라는 의미가 반감되고 있다. 이것은 그저 서울을 관망하기 편한 높은 전망대요, 효율 높은 송신 안테나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형태도 그렇다.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없이 콘크리트 전봇대를 삼사십배 튀겨놓은 듯한 모습에 그저 관망대 하나 얹어놓은 모습이다. 게다가 서울타워까지 가려면 마음을 모질게 먹고 한시간여를 등줄기에 땀이 흐르도록 걸어 올라가거나, 굳이 승용차를 타고 올라야 한다. 차를 가지고 올라가면 주차시킬 곳이 마땅찮아 짜증이 난다. 서울 시민 누구나가 일상의 삶 속에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은 이미 명소가 아니다.
63빌딩도 유명하다. 듣자하니 시골에서 버스를 전세 내어 이곳을 구경하러 오기까지 한다고 한다. 여의도의 동쪽 끝에 우뚝 서있는 이 빌딩은 기실 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건물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아침 햇살을 받아 밝게 빛을 낼 때나, 오후 석양을 반사하여 황금빛을 낼 때면 특히 그렇다. 그런데 이 건물이 그나마 이렇게 멋질 수 있는 다 까닭이 있다. 이 건물은 서울 도심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하늘을 혼자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하지만 제법 우아한 곡선의 건물이 아침의 파란 하늘이나 저녁의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볼거리가 된다는 말이다. 만일 이 63빌딩이 을지로 입구쯤에서 다른 고층 건물들과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으면 이러한 느낌을 전혀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는 하늘이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층건물의 건물들 틈에 파묻혀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넓게 트인 한강은 63빌딩에게는 매우 중요한 조경요소가 된다. 한강이 있었고 그 중간에 놓인 여의도의 한쪽 끝에 서있기 때문에 63빌딩은 하늘을 자기의 배경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인구 천백만의 서울은 포화상태이다. 조금 평탄한 땅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고층의 오피스빌딩, 백화점 빌딩, 아파트群 등. 게다가 600년전의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자리를 고르다보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도읍지로 택했다. 北으로 북한산, 南으로는 남산과 강 너머 관악산, 東으로 낙산, 또 西로는 인왕산. 그나마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이 병풍 같은 산자락과 고층 빌딩의 숲에 숨통을 뚫어 시야가 트인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듣기로는 세계의 거대도시를 관통하는 江 중에서 우리의 한강만큼 폭이 넓고 물이 많은 강이 없다고 한다. 그 유명한 파리의 세느江은 중랑천에 물이 불었을 때 정도밖에는 되지 못한다. 그러니 사실은 한강 자체가 서울의 명소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강변에 주욱 늘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들과 강 위로 지나는 스무개 가까운 다리들의 볼썽 사나운 모습이 한강의 경관을 다 망쳐버렸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하며 한강을 건넌다. 아니면 시속 5킬로미터로 지체되는 끝없는 자동차의 행렬에 파묻혀 좁은 차안에서 짜증을 내며 한강을 건넌다. 우리의 한강은 빨리 건너가버려야 하는, 보다 효율적인 방법으로 정복해버려야 하는 장애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강이 있으면 그 앞 야산에 정자를 지어 강을 관조하는 여유를 즐길 줄 알았다. 굳이 강을 건너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나룻배를 타고 노젓는 소리를 들으며 강을 건넜다. 서울의 명물인 천혜의 한강을 이제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그저 바라보고 좋아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여유가 없더라도 그 많은 다리 중 하나쯤은 천천히 걸어서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 전체를 인도교로만 쓰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안되면 다리 하나를 새로 놓아서라도 차는 못다니게 하고 사람들만 걸어 건너게 하면 좋겠다. 햇빛 따스한 일요일 오후 세살박이 아이를 걸리고 한살박이는 유모차에 태워 파란 강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자. 옆의 다리 위로 지나는 전철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도록 하자. 다리 중간에 걸터앉아 낚시대를 들일 수 있어도 좋겠다. 폭이 이킬로미터쯤 되는 한강을 걸어 건너다 보면 다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 그러면 중간에 쉴 수 있는 찻집도 다리 위에 열고, 책방도 한개쯤 두자. 어떠랴 다리 중간 교각 위로 3층짜리 소규모 백화점이 하나쯤 있은들. 한강을 걸어 건너는 한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1994년의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기념 사업 이후 서울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었다. 전시회도 열리고 학술세미나도 열렸다. 조선총독부 건물도 멋지게 파괴되기도 했다. 이런 일과성의 이벤트말고, 무언가 오래 남을 수 있는 서울의 삶터를 만들어 보자. 세계에서 몇번째로 인구가 많은 거대도시. 세계에서 몇번째로 오래된 고대도시. 이 도시에 명소다운 명소를 만들자. 백년전 세워놓은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을 찾는 이들의 증명사진 배경이 되듯이, 지금부터 100년 후 정도 700주년을 맞을 우리 후손들이, 또 서울을 찾는 모든 이들이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어야 하는 그런 서울의 명소를 만들자.
* 이미지 출처: 사진1-N 서울타워 홈페이지 포토갤러리, 사진2- ilsimsa7266님의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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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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