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 동상이몽: 일반 대중과 전문가에 대한 관점 비교

Essays | 2012-01-10 오후 5:44:05 | 조회수 : 3332 | 공개

* 이 글은 2002년 '이상건축'에 기고한 글입니다.

전원주택 동상이몽: 일반 대중과 전문가에 대한 관점 비교
 
 
최재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市’田’園
 
위의 단어는 지난 8월의 어느 주말 신문 사이에 접혀 들어온 아파트 분양광고지에 주먹만한 글씨로 박아놓은 광고용 카피다. 도시와 전원이라는 문자 그대로 서로 상반된 개념을 지닌 단어 둘을 대담하게 하나로 묶어버린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 알고 있는 전원 속의 도시, 즉 전원도시도 아니고, 도시전원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도시와 전원 두 가지를 아파트 단지에서 한꺼번에 다 차지하고 싶은 일반 대중의 입맛을 직설적으로 표현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 말로 우리네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주거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주택의 일반 소비자들은 이들이 선호하는 주거 형태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들이 가장 원하는 주거형태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57%가 단독주택을 선호한다고 주장했지만,[1] 실제로는 이들은 아파트를 원했고 그래서 아파트에 대한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요즘에 와서는 그냥 단독주택이 아니라 전원주택을 선호한다고 하고 있다. 1999년 7월 4일자 한겨레 신문에서는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주민 114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46.9%가 전원주택을 선호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40.3%는 아파트에 그냥 살고 싶다고 했고, 일반 단독주택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10.6%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이 도시의 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꿈은 전원생활이되 현실적으로는 도시생활이 더욱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의 “도시전원”이라는 말이 어쩌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말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전원주택의 꿈 – 일반 대중의 몫
 
누구든지 각기 어떤 집에 살고 싶다 하는 꿈이 있다. 영어문화권에는 “Dream House”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이것이 꿈이기에 현실과는 거리가 있기도 하다. 미국주거의 사회적 역사를 연구한 라이트(Wright)는 사회, 문화적 이상의 표현수단으로서의 주거를 논의하면서 미국주거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주목한다.[2]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미국주거의 역사는 미국 중산층의 희망의 역사이자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물질화 역사이지만, 라이트는 중산층의 삶과 그들의 주거 속에서 지속적이고도 줄기찬 맹목적성 -- 즉,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가장 이상적인 주택에 대한 환상 -- 을 발견한다. 우리에게도 가장 이상적인 주택에 대한 꿈이 있었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했다.

필자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 등에 업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구전민요를 들으며 잠이 들던 적이 많이 있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계수나무를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 초가삼간 집을 지어, 양친부모 모셔다가 / 천년만년 살고지고"라는 노래 구절이 참 푸근하고 좋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소위 전후 재건세대인 필자는 60년대 들어 외치기 시작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을 들으며 성장하게 되었고, 70년대 초반에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저 푸른 초원 위에 / 그림 같은 집을 짓고 / 사랑하는 우리 님과 / 한백년 살고 싶어"라는 가사로 된 대중가요를 신나게 따라 부르게 되었다.

집을 노래하는 이 두 노래말을 서로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패턴이 발견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집을 안치는 터가 다르다. 할머니 세대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꿈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에서 이루겠다는 소극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필자 세대로 오면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게 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지만, 미국 영화를 보며 부러워하던 "저 푸른 초원"을 찾아서 거기 살겠다는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6,70년대에 들어 미국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집의 규모도 "초가삼간"에서 "그림 같은 집"으로 바뀐다. 땅에 엎드린 듯 낮은 초가지붕에 방 두 칸, 부엌 한 칸 뿐인 초가삼간에서 살고 싶은 할머니 세대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한다.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우리 세대는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추구한다. 60년대의 슬로건 같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노래 속의 집에 사는 가족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할머니 세대는 "양친부모"를 모셔다가 효도를 다하며 사는 옛날의 대가족제도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70년대는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함께 오붓하게 사는 핵가족제도를 노래한다.

노래에 나타나는 시간의 개념도 재미있다. "천년만년" 길이길이 대를 이어가는 가문(家門)을 추구하는 대가족제도가 있었는가 하면, "한 백년"의 당대(當代) 만큼이라도 재미있게 살아보자는 제법 야무진(?) 꿈을 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달리하는 두 노래에도 공통되는 것이 있다. 목가적이며 전원적인 삶에 대한 꿈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고는 있으되 꿈은 저기 저 달 속 계수나무 밑에 또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살고 싶어 한다. 이에 더해 “메아리 소리 해맑은 / 오솔길을 따라 / 산새들 노래 즐거운 / 옹달샘 터에 / 장미꽃 넝쿨 우거진 / 그런 집에 살아요”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6,70년대를 지나가며 성숙된 자연에의 향수 또는 동경이 8,90년대의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전원주택이라고 하는 신드롬을 낳게 된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만불을 넘으면 전원주택에 대한 수요가 생긴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존재한다).

2000년 9월 동아일보는 전원주택에서 사는 모대학 허교수의 집을 소개했다.[3] “벽난로와 수영장, 작은 정자까지 갖춘 널찍한 잔디 정원”이라는 부제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는 전원주택과 그 속에서의 행복한 삶의 표준을 보여주고 있다. 좀 길더라도 기사를 인용해 보자.
 
(전략) 통일로 변에서 약 3㎞ 떨어진 허교수의 집까지 가는 동안 포장, 비포장 도로가 반복해 등장하면서 구불구불한 언덕과 내리막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문 겸 자동차 진입로인 나무터널을 지나자마자 잔디밭과 울창한 나무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전원주택을 보자 절로 부러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중략)
아래쪽으로 맑은 곡릉천이 유유히 흐르고 산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 조금만 움직이면 학교까지 금세 닿을 수 있게 해주는 통일로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학교까지는 40분, 광화문까지도 50분이면 넉넉하다. 잔디 정원에 자리잡고 있는 오두막 수영장 우마차 조각품 등은 가족 모두에게 급한 마음을 한 박자 쉬게 해주는 쉼터가 돼주었고 함께 가꾸는 텃밭은 땅과 땀의 소중함을 배우게 했다.  (중략)

“온 가족이 벽난로 앞에 모이면 훈훈한 온기가 돌아요. 이것이 바로 가족사랑이죠. 혼자 있을 때 커피 한 잔을 들며 불꽃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여간한 재미가 아닙니다.” 지금은 20대가 돼버린 아들 딸에게도 벽난로는 엄마 아빠와 함께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밤을 지샌 추억의 보물창고다.

겨울에 벽난로가 있다면 여름엔 정자와 오두막이 있다. 이 곳에서 모처럼 찾아오는 벗들과 차 한잔 나누거나 바비큐 파티를 열기도 한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와 잔디 위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어울리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는 게 허교수의 설명. 또 자그마한 수영장과 널찍한 잔디밭, 좁은 다락방도 자식들이 누구의 간섭 없이 마음껏 뛰놀았던 어린 시절의 해방구였다.  (후략)
 
허교수의 꿈 같은 삶을 우리 모두는 부러워한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주말마다 서울 외곽지역으로 나가서 땅을 보러 다니고 풍광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머리 속으로 그야말로 ‘드림 하우스’를 짓는다.

그런데 허교수의 집과 생활을 잘 들여다 보면 무언가 빠진 것이 있는 듯하다. 위 기사에서는 이상하게도 집 밖 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하기사 집 안에 수영장과 정자, 오두막까지 갖추어 놓았으니 집을 나서 마을에 갈 일이 없다. 그저 차를 타고 통일로로 해서 40분 만에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차로 귀가하여 “대문 겸 자동차 진입로인 나무터널을 지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내 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삶은 사실은 아주 도시적인, 그것도 매우 아파트적인 삶이다. 우리 주위의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단지내 조경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기실 그렇지도 못하지만) 퇴근 길 우리는 차를 내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철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다. 일단 집에 들어서면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출근 길에 나설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아파트 철제 문 안쪽에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갖은 치장과 모든 편의 시설은 모두 주호 안쪽 소위 “전용면적”에 설치하여 놓았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단지 내 녹지가 있음에도 발코니에 이중창을 달고 화분을 들여놓고 심지어는 미니 분수대까지 만들어 개인 정원을 만들기까지 하랴. 이에 비해, 아파트 단지의 공용공간 – 조경공간이나 보차도, 놀이터를 포함해서 – 은 철저히 무시당한다. 주민 중 아무도 공용공간을 자신의 공간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다. 이곳은 그저 차나 주차하고 지나다니는 공간일 뿐이다. 주거생활의 대부분은 주호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아파트 주호의 자기 완결성은 우리나라 아파트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용면적 비율이 높을수록 좋은 아파트로 선호되는 것이나, 아파트 단지의 고밀화를 추구함에 따라 옥외 공공 공간 환경의 악화와 내부 전용공간 환경의 악화 두가지 대안 중에서 전자를 택하며 동시에 전용공간의 거주성을 지켜왔고, 결국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는 옥외 공간 환경이 열악해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이다.[4]

그런데 동일한 현상이 전원주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아까 허교수의 전원주택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원주택 울타리 안에 모든 것이 제공되고 있다. 추운 겨울날 동네 마당에 군불을 때며 이웃과 어울리는 대신 집 안에 만들어 놓은 벽난로를 즐기며, 더운 여름날 동네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대신 집 안에 만들어 놓은 수영장을 즐기고, 어스름 무렵 어른들이 동네 어귀 정자에 모여 모깃불을 피워놓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울타리 안 잔디밭 한편에 지어 놓은 정자에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낸다.

결국 일반 대중이 꿈꾸는 전원주택은 전원 속의 도시형 아파트에 다름 아니다. 내 집안에 모든 편의시설을 다 갖추어 놓은 아파트와 같은 집을 자연 속에 심어 놓고 나는 그 자연을 쾌적한 집안에서 보고 즐기자는 것이다. 내 집 밖 동네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파트 살 때에도 그랬다. 그저 차를 타고 와서 주차장에 놓고는 아파트로 올라와 버리면 아파트 단지 내의 공용공간에 대해서는 내 몰라라 해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전원주택의 악몽 – 전문가의 몫
 
근래 대한건축학회 논문집에 발표된 논문들을 살펴 보면 주택 전문가들은 일반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전원주택에 대한 꿈이 잘 못 되었다고 경고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원주택은 우선 앞서 언급했듯이 그 주택이 들어설 지역의 자연환경을 그저 관망대상으로만 삼고 있을 뿐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전원주택단지가 영세업체들의 개별적이고 산발적 방식으로 개발되었고, 법적인 규제를 피한 단계적인 개발방식을 택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부조화와 공공시설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발표된 연구 논문 몇 개를 부분적으로 인용해 보자:
 
대지의 형상을 무시한 채 경제적인 논리만을 따른 배치계획은 전원주택단지의 대표적인 장점이 될 수 있는 공용시설에 대한 배려 없이 오직 주위의 녹지만을 이용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환경이 절대적으로 열악해질 위험까지 있다.[5]
 
도시 주거단지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로 녹지 구릉지에 개발되고 있으나, 경사지는 옹벽처리 등을 통해 소극적으로 극복하고 있을 뿐[이다][6]
 
단지의 규모가 작으므로 공용면적율이나 사용에 제한을 받으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외부의 인접 산간지역 등을 공용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위의 방식으로 개발될 경우 인접 대지에 단계적으로 주택 단지가 들어설 가능성이 커 결국 단지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녹지를 확보하지 못할 위험이 많다.[7]
 
단지계획수법이 다양하지 못하여 단지형태가 단순하게 조성되었고, 단조로운 단지경관을 만들게 되었으며, 국적불명의 주택군을 형성하는 등, 주거환경이 산만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도시형 주택을 전원에 심는 식의 개발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8]
 
전원주택의 계획에는 새로운 주거 양식으로서의 주거문화를 정립하여야 하는 건축의 사회적 책임수행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을 보면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 없이 진행됨으로써 주변환경과의 부조화, 인프라시설 부족, 공용공간 부족, 지역의 특성이 배제된 개발 등으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자연의 쾌적성을 지켜야 할 전원주택이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 실정을 볼 수 있다.[9]
 
주택 전문가들은 위에서 보다시피 전원주택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양상을 입을 모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 대중의 장미빛 꿈과는 매우 다른 악몽으로 읽혀진다. 같은 전원주택을 놓고 다른 꿈을 꾸는 이른바 동상이몽이다.
 
건축가의 꿈?
 
이상건축의 이번 달 특집은 전원주택에 관한 것이다. 전원주택에 대한 논고가 실릴 예정이고 실무 건축가들의 토론과 건축가별 개별 사례도 다루어질 예정이라 한다. 이 글에서는 일반 대중과 주택전문가가 한 자리에 누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간략히 다루어 보았다. 이제 이 자리에 실무 건축가들도 눕게 되는 것 같다. 일반 대중과 주택 전문가 사이에 누운 우리 실무 건축가들은 과연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끝>

분양광고. “도시전원” 전혀 새로운 조어. 매력적이고 좋은, 그러나 전혀 상반되는 개념의 단어 두개를 붙여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전략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1] 1993년 서울시민 종합여론조사. 서울시정공보담당관, 1993년.
[2] Wright, Gwendolyn. Building the dream: A social history of housing in America. Cambridge, MA: MIT Press, 1981.
[3] 동아일보 기사. 2000년 9월 17일.
[4] 공동주택연구회. 한국 공동주택계획의 역사. 서울: 세진사, pp.272-280.
[5] 김진균, 최원준, 이금진. “국내외 전원주택단지의 특성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15권 8호, 1999년 8월, pp.59-68.
[6] 김진균, 최원준, 이금진. 위의 논문.
[7] 김진균, 최원준, 이금진. 위의 논문.
[8] 박민성, 이재훈. “전원주택의 입주후 평가연구.” 대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19권 1호, 1999년 4월, pp.411-416.
[9] 신만석, 박인석. “수도권 전원주택단지의 개발실태 및 개선방향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학술발표논문집 18권 2호, 1998년 10월, pp.29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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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
팥찐빵   2012-01-17 18:30 [ Modify ]  [ Delete ]
생각지 못한 부분에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해준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JKang   2012-01-13 10:13 [ Modify ]  [ Delete ]
너무나도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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