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2년 '신동아'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비트의 도시
최재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한 컷 짜리 만화가 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컴퓨터 앞에 있다. 세련된(?) 한 마리는 의자에 앉아서 앞 발을 컴퓨터 키보드에 얹고 있고, 순박한(?) 다른 한 마리는 여느 강아지처럼 바닥에 얌전히 앉아 있다. 모니터에는 무언가 잔뜩 쓰여져 있는데 아마도 채팅에서 벌어지는 대화 내용으로 짐작된다. 세련된 강아지가 순박한 강아지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서는 네가 강아지인 줄 아무도 몰라.”
이 만화가 실린 페이지 바로 옆 페이지에는 “나의 이름은 wjm@mit.edu이며 (그 밖에도 많은 가명이 있지만) 전자세계의 한량이다. 나는 인터넷에서 죽치고 산다”라는 선언문이 쓰여져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위 이-메일 주소에서 짐작했겠지만, 미국 MIT 대학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MIT 건축 및 계획 대학의 학장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William J. Mitchell. 1944년 호주에서 출생한 그는 멜보른 대학교에서 건축학사 학위를 받고,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환경설계학 석사, 그리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예술석사를 받은 후 UCLA와 하바드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다가 MIT 학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대단한 학자이다. 그의 전공 분야인 디자인 이론과 건축, 도시설계에서의 컴퓨터 응용 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대가이기도 하다. 미첼 교수의 그간의 저작을 살펴보면 “컴퓨터 보조 건축설계” (Computer-Aided Architectural Design, 1977), “건축의 논리” (The Logic of Architecture, 1990), “재구성된 눈: 탈사진시대의 시각적 진리” (The Reconfigured Eye: Visual Truth in the Post-Photographic Era, 1992) 등 제목만 봐도 심오한 학문의 경지가 엿보인다.
그러던 그가 1995년 “비트의 도시”라는 책을 내면서 유쾌한 변신을 꾀한다. 근엄한 학자에서 전자 한량으로. 물론 이것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오는 개인과 사회의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미첼 교수가 짐짓 유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트의 도시”는 비트(bit)라고 불리는 전자 신호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정보가 우리의 생활 전반을 가히 혁명적으로 바꾸어가는 와중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아날로그(디지털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물리적 실체로 이루어지는 세계) 방식의 건축과 도시가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먼저 디지털 정보화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제1장 ‘광케이블 깔기(Pulling Glass)’에서 시작하여, 시공을 초월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을 둘째 장에서 ‘전자 아고라(Electronic Agora)’라는 제목으로 다루며, 하이테크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과 신체의 접합을 3장 ‘사이보그 시민(Cyborg Citizens) 시민’에서 이야기 한다. 이어서, 네번째 장인 ‘재조합건축(Recombinant Architecture)’에서 사이보그로 바뀌는 우리의 신체를 담을 건물에 관한 예측을 하고, 도시의 변화는 5장 ‘소프트 도시(Soft Cites)’에서 다루고 있다. 6장 ‘비트산업(Bit Biz)’에서는 디지털 정보를 생산하고 변형하고 배포하고 소비하는 비트 산업을 소개하고, 마지막 장인 7장 ‘좋은 비트 얻기(Getting to the Good Bits)’에서 비트가 우리의 풍요롭고 다양한 삶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로 끝을 맺게 된다.
이러한 낙관적인 견해는 사실 미첼 교수가 이 책에서 쓰고 있는 유희적인 분위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블레이드 런너(Blade Runner)”나 “매트릭스(Matrix)” 같은 머지 않은 미래를 다루었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암울한 미래가 아닌,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좀 더 편리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우리의 미래를 기분 좋게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의 유려한 문체(번역본의 문체도 다행히 그런 편이다)와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되어 읽은 이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은 채 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해 준다. 그와 같이 미래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가진,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그저 쉽게 읽어가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정말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트 또는 디지털의 혁명에 대해 또 인터넷의 사회적 영향 등에 대해 정말 진지한 생각과 고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은 그저 미래 도시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관광책자와도 같이 느껴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미국 버클리 대학의 정보사회학자인 마뉴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의 “The Internet Galaxy” (2001년 11월)이나 “The Rise of Network Society” (2000년 7월) 등의 책을 읽기를 권한다).
다시 “비트의 도시”로 돌아와서 , 처음엔 이 책이 건축이나 도시에 관련된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생각했었지만,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 보니, 오늘의 건축가나 도시계획가가 새로이 배워 그들의 미래 실무에 써먹을만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첼교수 스스로 고백했듯이 이 책은 미래 건축/도시에 대한 “走馬看山(windshield survey)”격인 안내이기 때문이다 (走車看市라고 써야 맞을지 모른다. 윈드쉴드는 자동차 앞유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산 대신 도시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이 책은 오히려 비트, 디지털, 사이버, 정보화 등의 새로운 개념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일반 사람들이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그런 교양서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런 책은 “비트의 도시” 말고도 몇 권 더 있다.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도 있고 역시 MIT의 교수인 니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라는 책도 있다. 모두들 디지털 혁명이 우리의 삶, 특히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지에 대한 예측을 아주 낙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첼 교수의 “비트의 도시”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미래의 멋진 모습을 일방적으로 설파하는 다른 두 책과는 달리 “비트의 도시”에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공간들(주택, 서점, 박물관, 극장, 미술관, 학교, 병원, 은행 등)의 옛 모습 또는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것이 비트 시대의 도래로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친절히, 마치도 관광가이드가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하듯, 그리고 때로는 흥미로운 일화를 들어서 재미있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금 길지만 다음에 들은 하나의 예에서 미첼 교수가 선택한 주제와 사용한 어휘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눈높이를 낮추어 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왜 은행을 털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유명한 권총강도의 대가 윌리 서튼은 이렇게 대꾸하였다. “거기에 돈이 있으니까.”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의 강도는 더 이상 금고도 안 털고 은행원도 위협하지 않는다… (중략) 이제는 돈도 사이버스페이스안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디지털 정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1993년 4월 코네티커트주 하트포드 부근의 버클랜드 힐스 상가에서 대담무쌍한 한 무리의 포스트모던 절도광들이 후지쓰 모델 7020 자동현금지급기를 훔쳐다가 뉴저지의 한 은행에서 가동시켰다. 쇼핑객들이 이 절도 당한 기계에 카드를 넣자 기계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자동적으로 기록한 다음 거래 불능이라는 쪽지를 내보냈다. 나중의 이 희대의 첨단 강도들은 이렇게 알아낸 번호를 수록한 가짜 은행 카드를 이용하여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에서 버젓이 현금을 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희철의 번역으로 김영사에서 출판된 “비트의 도시”에서 인용함.)
독자들께서는 사이버 화폐의 도입에 대해서 이토록 극적(?)인 설명을 해 주는 경우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는지? “비트의 도시”에는 이렇듯 풍부한 예화와 친절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미첼 교수는 비트와 건축/도시의 관계만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다. 비록 아주 간략하기는 해도 정보화 시대의 사회적 함의를 다루기도 했고 (정보의 접근이 사회계급에 따라 달라질 위험이 있다), 이 책의 가장 끝에는 우리가 미래의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우리 등을 토닥거려 주는 아량도 베풀어 주고 있다. 이 책은 아래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 글도 여기에서 끝을 맺기로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비트권의 앞날에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니 마셜 맥루한이 1960년대에 경고한 TV로 인해 파편화 된 세계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그곳에다 우리는 지구 마을을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