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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경 이제
Es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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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6 오전 8:40:58
| 조회수 :
2874
|
공개
* 이 글은 1995년 '플러스'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집구경 二題
최재필
명지대 건축학과
필자는 최근 이사를 했다. 누구나가 다
수긍하겠지만, 살던 집을 원하는 값으로
팔고 다른 집을 골라 역시 원하는 값에 사고, 그곳으로 나의 삶터를 송두리째 옮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 살던 집을 복덕방에 내놓은 것에서부터 새로 산 집으로 이사를 끝내기까지 두달 반이 걸렸는데, 그 동안은 이런저런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낙이 있었다면 비록 아파트에 국한되기는 했지만 남의 집을 여러 채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참에 플러스에서 필자에게 최근에 지어진 주택 두 채를 보고 그 느낌을 이야기해 달라는 청탁을 해 왔다. 이왕 나선 집 구경, 필자가 보던 아파트가 아니라 건축가가 설계한 단독주택을 구경해 보라니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마고 응낙을 했다.
아파트와 단독주택은 여러가지로 다른 점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필자가 흥미로와 했던 것은 집에 필요한 여러가지 공간 만들어 내기에 대한 접근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파트는 25평, 30평 등으로 정해지는 크기의 직사각형 상자곽을 두부 모 썰 듯 잘라내서 거실 놓고, 침실 놓고, 부엌 붙이고, 화장실 우겨넣는 방식으로 공간구성이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단독주택은 상자곽의 제한 없이도 얼마던지 공간배치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집터의 모양에 따르는 제한이 따른다. 이런저런 자유와 제한을 가지고 건축가가 설계해 낸 집은 우리가 흔히 보는 상자곽 모양의 집장사 단독주택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김흥수의 자명당, 이일훈의 궁리채 구경에 나섰다.
자명당 구경
세검정 부근, 북한산을 북쪽으로 보는 조그만 언덕 위로 주택가가 하나 있다. 차 두대가 간신히 비껴갈만큼 좁은 길을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이 주택가의 어느 막다른 골목길 끝에 자명당이 얌전하게 숨어있다. 막다른 골목길은 언제 보아도 새삼스럽다. 강남의 새로운 동네 길들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격자형을 이룬다. 아무리 길을 따라 끝없이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보아도 종착점이 없다. 그런데 여기 이 막다른 골목길은 종착점이 있다. 하루의 숨가쁜 일과에서 지친 가장이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젠 집에 다왔다는 편안함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어 좋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막히기는 커녕 뚫린 골목길조차 없다. 그러니 골목길 양쪽으로 남의 집 밥짓는 냄새, 불켜진 창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지나치는 재미가 없다. 그저 건물 코 앞에 바싹 붙어있는 주차장에 차를 놓고 장롱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창고문 같은 현관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파트이다.
자명당은 배치도에서 볼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ㄷ"자를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는 높이를 달리하여 구분한 앞마당(아랫마당)과 중정(윗마당)이 있다. 그런데 대문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좀 특이하다. 보통 집 같으면 대문에서 마당을 질러 현관으로 가게 될 터인데, 자명당에서는 마당 옆 담장을 따라 걸어 들어가서 바깥채 구석을 돌고, 또 한번 더 돌아서 현관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어찌보면 아까 걸어왔던 좁은 골목길이 집 담장 안에서도 계속되는 느낌이다. 현관을 들어서서도 안방까지 가려면 몇번이나 꺾어져야 한다.
이렇게 돌고도는 공간의 배치에는 다 까닭이 있다. 자명당 터는 남쪽이 앞집에 의해 막혀져 있고 오히려 북쪽으로 트여 북한산의 경관이 좋다. 이 경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대문에서 건물 뒤로 돌아 현관으로 들어가면서 이 북한산을 바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 앞집과 옆집으로 막힌 터의 단점을 중정을 둠으로써 보완하고, 이 중정을 중심으로 실내 동선도 역시 여러번 꺾어서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북악산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렇듯 산으로 둘러싸인 터에 위치한 자명당의 중심 테마는 역시 조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집도 홑겹이고 구석구석 잘 계산된 개구부를 두어 집안 어디에서고 산을 즐기게 했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의 재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명당은 크게 바깥채와 안채, 두 덩어리로 나뉜다 (사실은 이 집은 평면으로 볼 때는 네개의 마디가 있지만, 실제로 대문에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바깥채의 강렬한 입면 덕택에 바깥채와 안채로만 나뉜 것 처럼 보인다). 바깥채는 순전히 거실의 몫이다. 이 집의 거실에는 아무런 가구가 없다. 마루바닥 끝에 벽난로만이 뎅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집의 거실은 순전히 손님 접대용이다. 이 집 식구들은 안채에 모여 오손도손 재미있게 사는 것 같다.
안채는 현관에서 우측으로 꺾어지며 긴 복도로 펼쳐진다. 이 복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방이 흥미롭게도 할머니 방이다. 할머니 방을 지나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고, 식당과 부엌, 그리고 안방을 연결하는 두번째의 긴 복도가 있다. 이층에 올라가면 바로 서재가 있고 아래로 식당과 부엌이 내려다 보이는 복도를 지나 아이들 방이 있다.
이 집 식구들이 오손도손 사는 모습을 이러한 방 배치에서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할머니 방을 보자. 이 집에서는 할머니가 제일 어른이다. 그런데 왜 이 어른 방을 집안 가장 안쪽에 두지않고 현관 가장 가까이 두었을까? 할머니 방의 문은 거실-현관-부엌/식당-침실을 잇는 복도에 면한 창호지문으로 되어있다. 아이들 오가며 뛰노는 소리, 며느리 부엌에서 딸깍거리는 소리, 집 구경온 아들 친구들 현관에서부터 서재로 올라가며 왁자지껄한 소리가 모두 들린다. 할머니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해도 집안 식구들이 오가는 양을 모니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집안 제일 안쪽에 계시면서 방 바깥 돌아가는 살림살이에서 소외되기보다는 이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에게는 당신의 아들이 가장 귀하고 반갑다. 그렇지만 그 아들은 또한 자기 아내의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몸은 하나요 역할은 세개이다 보면 집안에서 여러가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음악광인 아들이 오디오 세트와 책상을 갖다 놓은 서재는 이층 할머니 방 바로 위에 있다. 서재에 머무는 동안 아들은 할머니와 수직적으로 연결이 된다. 그렇지만 아들이 아내에게 갈 때는 할머니 방 앞을 지나지 않고 층계를 내려 식당을 거쳐 안방으로 가게 된다. 물론 아들이 집 밖을 드나들 때는 할머니 방을 지나며 문안을 드릴 수 있다.
이 집의 구심점은 아까도 언급했듯이 (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게 되는) 거실이 아니다. 이 집의 초점은 식구들이 집안에서 빙빙 돌며 가장 많이 부딪치는 곳, 이층에서 내려오는 계단과 현관에서 오는 복도와, 식당이 만나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이다. 물론 이 공간은 층계 위에서, 또 이층 복도에서도 잘 내려다보이고, 할머니 방에서도 청각적으로 연결이 되는 공간이다. 금상첨화로 이 공간은 앞뒤로 시원스레 뚫려 앞으로 중정이 보이고 뒤로 북한산 자락이 보인다. 이 집의 건축가 김흥수가 강조하는 공간배치의 회유성(回遊性)이 맺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자명당은 노모를 모신 삼십대 초반의 부부와 국민학생 아이들이 "지지고 볶고" 살되 적당한 우회(또는 회유)통로를 두고, 그런 와중에도 집안 구석구석마다 잠시 밖을 내다 보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런 집이다.
궁리채 구경
경춘가도를 신나게 달리다가 강촌역쪽으로 꼬부라져 철길을 건너 강촌 매운탕집도 지나고 구멍가게도 지나서 좀 더 달려가다 보면 나무 몇 그루 심겨진 공터가 나온다. 여기서 논두렁 비포장도로로 들어서면 농가 몇채가 모여있는데 그 사이로 차 한대 간신히 지나갈만한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을 오르면 나무 사이로 작은 돌집 하나가 보인다 (사실은 돌집이 아니라 돌을 붙인 집이다). 이 집이 바로 궁리채이다.
궁리채는 서울 어느 회사의 중역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시골 땅에다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지은 집이다. 남들처럼 주말 별장으로 지은 집이 아니고 자기와 가족들이 실제로 살 집이라 한다. 이 집은 외로운 맛이 있다. 서울에서의 부대끼는 시간을 보내고 퇴근해서 달리고 달려 어둑해질 무렵, 간신히 마지막 오솔길에 들어서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아련히 비쳐들어오는 "우리 가족만"의 집이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연면적 30평에 방이 두개밖에 없는 집이다. 이 집은 옆으로 도랑이 하나 흐르는 80여평의 작은 계곡에 폭 파묻혀 있다. 이 집도 상자곽 모양의 아파트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집을 설계한 이일훈은 "채나눔"을 즐겨하는 건축가이다. 채나눔이란 아파트와 같이 박스 하나로도 구성될 수 있는 집을 여러 채로 나누어 놓는 그의 독특한 설계방법론이다. 작은 집일 수록 채나눔을 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하는데, 이 집도 예외는 아니다. 궁리채는 모두 세 채로 구성되어 있다. 현관과 거실을 묶어 한 채, 안방과 아이방이 한 채, 부엌 겸 식당이 또 하나의 채가 된다. 각각의 채는 가운데 걸쳐진 투명한 브릿지로 연결이 되어, 위에서 보면 "H"자를 이루고 있다.
30평이 채 못되는 집을 세 채로 나누어 놓으니 각 채는 홑겹이 된다. 그 뿐이랴, 집의 내부와 내부 사이로 외부공간이 끼어들게 된다. 집채 사이에 끼어든 외부공간은 그대로 앞, 뒷마당을 이룬다. 이 마당은 그냥 마당이 아니다. 집 안 여기저기 뚫어 놓은 개구부를 통해 마당이 실내로 들어온다. 이 개구부들도 그냥 무심하게 뚫어 놓은 것이 아니다. 작은 집을 여러 채로 나누고 잘 계산된 개구부를 놓아 기회 닿는대로 외부 조망을 끌여들여 (눈 가는 곳마다 계곡의 나무가 보인다) 실제보다 커 보이는 집을 만들려 함이다.
이집 식구는 부부와 고등학생 아들 둘이다. 네 식구가 화장실 양쪽으로 놓인 방 둘을 가지고 쓰는 부분이 바로 안채이다. 자명당의 안채가 할머니 따로, 부부 따로, 아이들 따로 사는 "따로살이 안채"라면, 궁리채의 안채는 "모듬살이 안채"이다. 식사 시간이 되면 일층에서, 이층 이쪽 저쪽에서 각기 모여드는 자명당과는 달리, 궁리채의 식구들은 식사 시간에 방 두개에서 동시에 나와 같은 복도를 통해 우르르 식당으로 모인다. 자명당식의 우회통로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집의 규모가 작으니 여러 갈래의 통로를 만들 수도, 그러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 집에서는 의도적으로 식구들의 움직임을 묶어놓는 대신, 그 통로 군데군데에 나름대로의 재미를 준 흔적이 보인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거실인데 안채로 가려면 거실 한 구석에서 시작되는 브릿지를 건너가야 한다. 브릿지의 거실 쪽 끝은 좁고, 안채 쪽 끝은 넓다. 무릇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나가는 것이 그 반대로 하는 것보다 쉬울진대, 이 집은 식구들에게 "우리 모듬살이 안채로 들어오시오"라는 메세지를 전달해 준다. 마침 브릿지 안채쪽 끝에 뚫린 넓은 개구부 때문에라도 안채 쪽이 거실 쪽 보다 더 밝아보이기도 한다.
이 브릿지 밑으로는 땅을 낮게 파내고 앞․뒷마당을 연결하는 계단식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브릿지가 외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브릿지는 좌우면이 다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다. 집 밖에서 거실로 들어와 브릿지를 건너 안채로 가는데 좌우로 흘낏 바깥 세상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도 내가 들볶였던 바깥 세상이다. 이제 나는 신발을 벗은채 맨발의 쾌적한 기분으로 공중에 떠있는 다리 위를 건너 휴식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작은 집도 궁리를 잘 해서 설계를 하면 실제 이상으로 크고 재미있는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집이 바로 이 궁리채이다.
집 구경 소감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집밖에서의 익명성과 집안에서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똑같은 형태의 상자곽 주호(住戶)가 상하좌우로 쌓여 내집, 네집은 오직 회색 철문의 동호수판으로만 구별되는 아파트는 익명성이 보장된다. 요즘같이 복잡한 세상에 적당히 군중 속에 묻혀 살기에 딱 좋다. 집안에 들어서면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과 부엌과 화장실이 촘촘히 붙어 있고 그래서 식구들은 집안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 열 걸음 이상 걸을 필요도 없다. 거실과 부엌 사이 통로에 서면 모든 방이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다는 말이다. 피곤에 지친 식구들에게 아주 효율적인 공간배치이다.
이에 비해 단독주택은 개성과 멋을 추구한다. 자명당이나 궁리채가 바로 그렇다. 둘 다 독특한 모양의 집터에 적절히 안배된 내외부 공간을 통해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두 작품 다 조망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명당이 실제로 집터 주위의 경관을 고려했다면, 궁리채는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 사이의 시각적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둘 다 잘 계산된 개구부를 통해서 목표하는 조망을 최대한 살리고 있는 것이다. 김흥수, 이일훈 이 두 작가들은 우리네 전통주거의 특징인 목가구조(木架構造)에서 기본으로 얻어지는 무수히 많은 개구부들의 성격을 내부에서 외부로의 관조(觀照)로 규정짓고 그것을 오늘에 되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자명당의 회유(回遊)나 궁리채는 채나눔은 아파트에서는 불가능한 멋부리기이다. 대문에서 안방까지 직선거리의 네배나 되는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을 돌고돌며 그때마다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의 경치를 바라보는 자명당. 서른평 작은 집에 거실채, 방채, 부엌채를 두고 이것들을 공중에 떠있는 다리로 연결해 놓고 맨발로 건너다니게 한 궁리채. 이 두 집은 맛이 있는 집이다.
건축과 2학년 1학기쯤 건축계획 강의시간에 듣던 "주택에서는 동선을 짧게 효율적으로"라는 강령(綱領)이 있다. 이런 강령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집은 원초적 삶의 장소이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나는 내 집에서 재미를 느끼고 싶다. 여기 자명당이나 궁리채에서와 같이 돌고돌아 닿게되는 이 방 저 방에서 나는 집의 숨결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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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경
댓글 :
3
개
수영
2012-01-3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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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불편하더라도 나는 내집에서 재미를 느끼고 싶다" 완전 공감합니다! 저도 재미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이제부터
2012-01-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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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래된 한옥형 주택에 산지가 너무 오래되서 이제 잘 지어진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해왔었는데~~ 교수님 글을 읽어보니 저희집이 꽤나 좋아보이네요!!ㅋㅋ 대신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ㅠㅠ
다은
2012-01-0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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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는데 가끔 거실창을 내다보면 앞 동건물의 베란다 창문만 가득 보여서 답답할때가 많아요. 현관으로 들어가면서 북한산이 보이는 그런 멋진 집에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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