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6년 '이상건축'이라는 건축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웃 돌아보기
최재필
명지대 건축학과
건축가 김인철의 다가구 주택 “블루스 하우스”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3년전 필자가 어느 신문에 썼던 글이 생각났다.
옛날에는 집에서 혼례식을 올리거나 아이를 낳았다. 이제는 아무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일생의 大事를 집을 떠나 예식장에서 치루고 또 병원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세태가 많이 바뀐 것을 느끼게 된다.... (중략)
先人들은 사람의 일생을 「生․老․病․死」의 네 글자로 요약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나이를 먹고 병들어 마침내는 생을 마감한다는 말이다. 옛날 한옥에서는 이 인생의 네가지 단계가 모두 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은 한옥 건너방에서 태어난다 (生). 아이가 자라 나이가 차면 혼인을 하는데 혼례식은 집의 대청마루 또는 마당에서 치루게 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자식을 낳고, 때가 되면 마루 건너 안방을 물려받는다.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나면 어느덧 인생을 돌이켜보는 시기를 맞는다. 회갑잔치나 회혼식 역시 집에서 치루어진다. 일가친척과 친지들이 대청과 마당에 모인다. 자식들의 절을 받노라면 눈길이 안방 문지방에 닿는다. 어릴 때 걸음마를 배우다 걸려 넘어지곤 하던 문지방에는 이제 손주녀석의 과자부스러기가 떨어져 있다. 이렇게 지나간 육십년 인생의 흔적이 집안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老).
나이를 어쩔 수 없어 점차 기동이 불편해지고, 마침내는 병이 든다. 하루종일 안방에 누워 자식들의 수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히 눈길이 천장에 가 멈춘다. 한 세대전 자신의 부모 역시 이 천장 아래에서 숨을 거두었고, 자신도 곧 그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病). 자식들의 울음소리 속에서, 눈에 익은 안방 천장을 마지막으로 한번 쳐다보고는 숨을 거둔다 (死). 대청마루와 마당에 다시 일가친척과 친지가 모이고, 며칠 후 상여는 대문을 나선다. 건너방에서 시작된 삶은 마루 건너 안방에서 끝을 맺는다.
이제 오늘의 집과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은 병원 분만실에서 태어난다. 삶의 첫 순간을 집 밖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生). 어른이 되어서 결혼은 예식장에서 한다. 물론 회갑잔치도 집안에서가 아니라 요리집에서 치루게 된다 (老). 중한 병이 나면 병원 입원실에서 누워지내고 (病), 결국 숨을 거두는 장소도 병원의 중환자실이 된다 (死). 일가친척들도 병원 영안실에 모인다. 생노병사의 대사가 예외없이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략)
서울신문 (‘93.10.9.) "서울의 삶터: 생로병사 공간서 재산증식수단으로"
블루스 하우스는 원룸시스템 15호를 모아 놓은 임대용 다가구 주택이다. 학생, 독신 회사원, 또는 아이가 아직 없는 신혼부부들이 잠시 들어와 살다가 몇 년 후 훌쩍 떠나게 되는 집이다. 그러니 이곳은 일평생을 살며 추억을 쌓아 나가는 곳이 될 수가 없다. 생로병사의 대사는 커녕 삶의 조그만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집. 밖에서 일이 끝나면 좁은 길에 똑같은 모습으로 줄지어 선 하이츠 빌라를 지나, 백조 빌라를 지나, 내가 묵는 아트 빌라에 이른다. 주동 현관을 지나 곧바로 어두운 계단을 올라 마주치게 되는 회색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세상 밖과 인연을 끊고, 조그만 방에서 밥 해 먹고 (또는 커피나 소주 한 잔 들고는) TV보다가 잠을 잔다. 그러다 학생은 졸업을 하고, 독신 회사원은 결혼을 하고, 신혼부부는 아이를 가지면서 아무 미련 없이 이 곳을 뜬다. 그리고는 그만이다. 다시는 이 집을 찾을 리 없겠건만 십년 후 묵은 앨범을 정리해 보아도 이 집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찾기 어려울 터이다.
그런데 건축가 김인철은 이러한 임대용 다가구 주택의 도시적 익명성에 조그만 반란을 가한다. 우선 철저한 익명성을 주는 다가구 주택의 일반적인 형태와 재료를 무시해 버린다. 그 대신 비대칭의 입면, 강렬한 색상의 드라이비트 벽체와 옥상의 빨간색 철제 프레임, 정면의 구멍 뚫린 가벽 등으로 추억 거리를 만든다. 집구경 할 때 그가 필자에게 은밀하게 해 준 말대로 (혹은 그의 희망대로) 여기 살았던 사람이 십수년 후 제법 철이 든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집이 네가 만들어진 집이야”라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으려면 십수년 후, 서울의 여느 동네라도 다 그리 되듯, 전혀 딴 판인 동네가 되어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루스 하우스에서는 이런 특이한 형태보다는 김인철이 이 집에 들어가 살게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이웃 돌아보기”가 더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된다. 1층에 차를 대놓고 나면 이 집 어느 층에 살던 나는 내 집에 가기 위해서 길을 한번 더 걸어야 한다. 그것도 곧바른 길이 아니라 이리저리 꺾인 길과 계단이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돌며 내 시선은 동서남북 여기저기를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코너를 돌 때마다, 계단을 오를 때 마다 내 눈 앞에는 창문이 하나씩 나타나 그 너머로 동네가 보인다. 앞 단독주택의 정원에 널린 빨래도 보이고 옆 다가구 주택 후면 발코니 속에 쌓아 둔 잡동사니, 이웃의 삶의 흔적도 보인다. 옥상층에 나서기 직전에 마주치는 개구부에는 어느 집 기와지붕이 꽉 들어차 있다. 그 지붕 밑 사람들의 삶이 눈에 선하다. 퇴근 해서 파자마 바람이 된 가장이 TV 앞에 비스듬히 누워있고 그 옆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엎드려 만화책을 보고 있다. 아내는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인다.
내가 임시로 사는 집, 머지않아 떠날 집은 추억이 없는 집이다. “어릴 때 걸음마를 배우다 걸려 넘어지곤 하던 문지방에서 이제 손주녀석의 과자부스러기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렇듯 내 방을 오가며 둘러보는 이웃의 삶의 모습은 비록 내 것은 아니지만 십수년 후 아이를 데리고 다시 찾아왔을 때 마치 나의 모습이었던양 내 가슴 속에서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그간 오가며 만나서 친하게 된 아래층 무역회사 다니는 박선배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잔을 나누면서 옆 벽체에 난 구멍을 통해 앞집 여대생을 훔쳐 보며 낄낄대는 이런 사람 사는 맛도 느끼게 되리라.
한정된 대지 위에서 용적율 다 찾아 살려야 하자니 한 층에 원룸 시스템 4가구씩 집어 넣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원룸이기 때문에 전면 폭이 좁아 건물 한 켜에 두 가구가 들어가야 하는데 계단실을 양쪽으로 내자니 원룸 평수가 줄어든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복도가 늘어나는 접근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길’의 개념을 도입하고 건물 한 면에 3개 층을 다 접근하는 복도에 직각으로 나는 일방향의 긴 옥외계단을 두어 이것이 ‘이웃 돌아보기’라는 전체 콘셉트를 몰아 가게끔 하자.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제한을 뛰어 넘는 콘셉트의 창조. 이것이 건축의 맛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