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봉천동 달동네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20:48 | 조회수 : 8940 | 공개

우리는 가끔 "댁이 어디십니까"라는 물음에 접하게 된다. 묻는 사람이 내 집에 찾아올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내가 사는 수준을 가늠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때 "압구정동 삽니다"하면 "아이구 좋은 동네 사시는군요"라는 대답과 함께 상대방의 기가 한풀 꺾이는 것을 보게 된다. 서울의 그만그만한 변두리 주택지역을 대면 "너도 대충 그 정도구나" 식의 상대방의 표정을 대하게 된다. 이때 봉천동이나 사당동 쯤 나오면 상대방의 태도는 또 다르다.

언제부턴가 「달동네」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다.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불량주거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에는 달동네가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봉천동(奉天洞)이다. 문자 그대로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동네이다. 남부순환도로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겨울에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도록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 그제야 봉천동 달동네에 이른다. 1967, 68년 강북의 무악재 일대의 불량주거지 철거민과 금호동 지역의 수재민들이 당시 시유지(市有地)였던 이곳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동네이다.

30년 전의 달동네 (그 당시는 판자촌으로 불리웠다) 무악재에 살던 사람들이 봉천동으로 옮긴 것 같이, 서울의 달동네는 항상 그 위치를 바꾼다. 제법 정착이 된 강북 판자촌과 달동네에는 이른바 도심재개발이 시작되고 중산층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하는 수 없이 밀려나는 달동네 원주민들은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강을 건넌다. 당시 아무도 살지 않는 산꼭대기에 다다르면 짐을 풀고 새로운 달동네를 만든다. 60년대 중반, 중구 충무로 남산 일대의 판자집들이 헐리면서 사당동에 달동네가 생겼고, 용산구 한남동과 서빙고동이 재개발되면서 신림동에 달동네가 생겨났다.

최근에는 사당동과 신림동에도 재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달동네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입자들은 천문학적 숫자가 붙는 아파트 가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울의 새로운 변두리 산꼭대기에 다시 터를 잡을 것이다. 비가 오면 질척거리기는 하지만 사람이 다닐 수 있을만한 길을 낼 것이고, 집을 지을 것이다. 다음 선거철까지는 길이 포장 될 것이고, 버스 노선도 하나쯤 생길 터이다. 또 요행히 이 지역 국회의원이 공약을 지켜준다면 상하수도 시설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살만한 동네가 되면 다시 재개발의 바람이 불 것이고, 달동네 주민은 한번 더 짐을 싸게 될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서울의 구석구석에 새 동네를 끊임없이 개척해내는 「서울의 프론티어」들인 것이다.

이들에 비해 신도시 중산층 입주자들은 나약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울의 집값이 비싸다고 서울을 아예 포기해 버리고, 잘 닦인 고속도로를 타고 신도시 분당으로 일산으로 간다. 이곳은 정부가 마련해 준 도시의 하부구조 (가로망, 전기, 상하수도 등) 위에 주택업자가 아파트를 미리 지어놓은 곳이다. 근처에 공원도 있고 상가도 들어서 있다. 이사 간 다음 날부터 서울에서의 삶과 거의 같은 삶이 아무런 제약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달동네의 프론티어들은 새로운 산꼭대기로 이사 간 날부터 길을 내고 집을 짓어야 한다. 산에 가보면 누구나가 다 알겠지만 산길이라는 것은 산자락에서 산꼭대기까지 일직선으로 나있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 되면 길이 너무 가파르게 되어 사람도 오르내리기 어렵고 더구나 차량이 통행하기는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그 대신 길은 산허리를 꼬불꼬불 돌아 조금씩 그 높이를 더해간다.

달동네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달동네에 처음 생기는 길은 산을 가로질러 오르지 않고 산의 등고선을 따라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달동네의 간선도로격인 이 길은 대개의 경우 市에서 만들어 포장까지 해준다. 그래서 이사짐을 실은 자전거나 용달 트럭이 올라갈 수 있다. 물론 나중에는 연탄배달 손수레도 이 길로 다닌다. 이 간선포장도로는 달동네 이주민이 서울특별시로부터 받는 유일한 혜택이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우선 이 도로를 따라 양쪽으로 집을 줄지어 짓는다. 다음으로 이사오는 주민들은 이 도로에 면한 집들 한켜 뒤로 다시 집을 짓는다. 이때 도로에 면한 집들 사이로 골목길을 내야한다. 그런데 간선도로와 직각이 되는 방향은 산을 가로지르는 방향이어서 이 골목길은 경사가 심하다. 그러니 우선 계단을 서너단 만들고 나서야 그 계단 좌우로 집을 지을 수가 있다. 양쪽 집이 서로 힘을 모아 이 계단을 만든다. 계단이 완성되면 집을 짓는다. 이때 쯤이면 서로 마주보는 집의 식구들은 친한 이웃이 되어있어 집 지을 때 서로 도와줄 수가 있다.

도로에서부터 두번째 켜에도 집이 다 들어서면 이제는 세째 켜에 집을 지어야 한다. 둘째 켜에 있는 계단에 이어 몇 계단을 더 만든 후에 세째켜 집을 짓는다. 시간이 지나면 네째, 다섯째, 심지어는 열째 켜가 여기 더해진다. 이렇게 해서 달동네의 좁고 경사가 심한 계단골목길이 생기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필요에 따라 이어붙여 올린 계단골목길은 볼품이 없다. 강남 중산층 주택가 골목길 같이 곧지도 않고, 계단의 모양이나 크기도 들쑥날쑥하고 높이도 제각기 다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찌 내려갈 수 있으랴 할만큼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이 계단 골목길을 매일 최소 두번씩은 지나는 달동네 주민들은 이 골목길의 의미를 알고 있다. 내가 내집을 지으려고 간선도로에서 들어가는 골목길과 계단을 만들지만, 내 뒤에 이사오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딛고 올라간 곳에서부터 제나름의 계단골목길을 연장시킨다.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은 다시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의 노력은 나뿐만이 아니라 내 뒤의 이웃에게도 삶의 중요한 터전이 된다. 달동네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함께 사는 사회」이다.

또 함께 나누는 꿈도 있다. 옛날 유대인이 시내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을 그렸듯이 달동네 주민들도 「낙토(樂土)」 교회를 세우고, 「풍년」 쌀가게를 찾는다. 열심히 사노라면 언제가는 산아래로 보이는 고층 아파트와 번듯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비우는 집에는 다시 집 한칸 마련을 위해 땀 흘리게 될, 가진 것 없는 젊은 부부나 시골에서 일거리를 찾아 무작정 올라온 가족이 다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른 아침의 봉천동.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젊은 가장이 출근을 한다. 아기를 업은 부인이 배웅을 나왔다가 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면, 가장은 좁고 경사급한 골목길을 내려간다. 가장의 발걸음은 가볍다. 내리막 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야 언젠가는 그곳으로 이사할 것 아닌가. 저녁에 가장은 피곤에 지친 발걸음으로 계단골목길을 오른다. 오르막 길이지만 이웃과 함께 내 스스로가 공들여 만든 골목길이어서 힘이 드는 줄 모른다.

달동네 불량주거지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이나 사회성이 불량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 사회가 임의로 규정한 물리적 환경의 수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진 용어일 뿐이다. 오히려, 턱없이 가파른 산허리를 요령있게 다듬어내어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골목길을 만들고, 비록 허드렛 것이지만 시멘트블록과 양철조각, 판자를 꼼꼼히 맞추어 나가면서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이룩하는 봉천동 달동네 주민들의 삶의 지혜야말로 과소비와 개인주의에 병든 압구정동 아파트 주민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닐까.


* 이미지 출처: skhan7님의 네이버 블로그
--------------------------------------------------------------------------------------------------------------------------------
'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댓글 : 1
다은   2012-01-06 15:36 [ Modify ]  [ Delete ]
글을 읽으면서 옛날 사진을 보는 입장에서 달동네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매력을 지닌 곳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