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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주상복합 건물
서울의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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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3 오후 11:09:36
| 조회수 :
4899
|
공개
옛날 임금은 출퇴근을 하지 않고도 정사(政事)를 볼 수 있었다. 창덕궁(昌德宮)의 어느 내전(內殿)에서 잠을 깨고,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으로 옮겨 가서 만조백관과 함께 나랏일을 논의했을 것이다. 정1품에서 종9품까지의 신하들은 물론 출퇴근을 해야했다. 창덕궁 근처 가회방, 안국방 등지에서 아침이면 궁으로 향하는 문무대신들의 가마 행렬이 줄을 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오늘날의 우리 대통령도 출퇴근을 하지 않는다. 청와대는 그의 집이자 일터이다. 그러고보면 지체가 높은 사람들은 이렇듯 집과 일터를 한 장소에 같이 두는 소위 직주일체형(職住一體型)의 생활을 하는 것 같다. 기실 요즈음과 같이 서울의 출퇴근길이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는 직주일체형의 삶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 각지에 주상복합건물(住商複合建物)이 속속 들어서거나 계획되고 있다.
주상복합건물이란 한 건물에 아파트, 사무실, 근린상가, 체육시설 등을 같이 넣는 복합용도 건물이다. 대개 고층부에는 아파트가 들어선다. 지하층에는 수영장, 볼링장 등 레져․스포츠시설이, 저층부에는 상가, 중층부에는 회사 사무실 등이 자리잡는다. 물론 「한 건물에서 직-주(職-住)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차세대 주거타운」이라는 현란한 광고문안이 으례히 따라 붙는다.
알고보면 이 주상복합건물이라는 것이 우리 서울시민에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선례가 있다는 말이다.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1960년대 말 서울에는 명물이 많이 탄생하고 있었다. 군사정권에서 시작된 3공 정부는 서울의 민심을 얻기 위하여 가시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대규모 건설공사를 여러가지 시작했다. 여의도 개발도 이즈음의 일이고, 괴물같은 청계천 고가도로도 이 때 놓아졌다. 종묘 앞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남산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동부 도심을 동서로 나누어버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도 생겨났는데, 이것들이 바로 세운상가로 불리어지는 일련의 주상복합건물군이다. 요즈음과 마찬가지로 세운상가에도 고층부에는 아파트가 있었고 저층부에는 상가 및 사무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요즈음 같이 건물이 일자형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넓은 저층부에 좁고 높은 타워를 얹은 형상이었다.
세운상가를 세울 당시의 의도는 상당히 미래지향적이었다. 우선 도시정비 차원에서 보면, 이 지역의 불량주택을 정리하여 어차피 동대문 시장과 연계된 서울의 중심상권으로 떠오를 종로4가 지역을 재개발하자는 의도였다. 게다가 장차 서울의 도심이 업무나 상업시설로 바뀜에 따라 야간의 도심 공동화 현상이 일어날 것이 예측되기도 하고, 출퇴근 교통난도 예상되니 여기에 거주기능을 추가하여 한꺼번에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야심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 더하여 건축적으로도 꽤 재미있는 시도가 있었는데, 건물 저층부 옥상을 보행인의 공간으로 남겨두고 이것들을 육교로 연결하여 청계천로나 을지로를 건너지 않고도 종묘에서 남산 기슭까지 이어지는 쾌적한 보행자 광장을 제공한다는 발상이었다.
돌이켜보면 공공의 복지를 상당히 염두에 둔 기특한(?) 계획이었는데 이것이 그만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단적인 예로 세워진지 27년이 흐른 지금, 고층부의 아파트에 들어가 실제로 살고 있는 가구가 하나도 없다.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저층부의 상업기능이 고층부의 주거기능을 완전히 몰아내어 버린 것이다. 현재는 아파트 부분이 중소기업의 사무실이나 전자상가의 부품창고, 조립공장 등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파트 부분은 원래 약 30평의 크기로 꽤 넉넉한 공간이었고 그래서 당시 중산층들이 입주하였었다. 비교적 고급 주거단지로 남아있던 세운상가 아파트에도 70년대, 80년대의 경제성장의 바람은 불었고, 호황 속에 전자상들은 팔 물건을 쌓아놓을 곳이 없어 우선 4층 보행자 통로를 창고로 쓰기 시작했을 것이며, 급기야는 윗층 아파트들을 전자제품 조립공장이나 사무실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들 「악화」들로 인해 아파트 주거환경은 급격하게 나빠진다. 조립공장의 직원들은 밤새 아파트 복도를 들락거리고 라디오 소리는 끊기질 않으며, 점심 때 배달시켜 먹은 자장면 빈그릇이 여기저기 널려 있게 된다. 쾌적한 보행자 광장에는 야바위꾼과 불량배들이 들끓었다. 60년대의 기준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주차장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무지막지하게 들이미는 상가의 용달차와 아귀다툼을 해가며 차를 주차시킬 수 없었던 주민들은 하나 둘 강남의 아파트 단지로 이사갈 수밖에 없게된다.
결국 세운상가의 실패는 상업기능이 너무 강한 지역에 어설프게 주거기능을 섞으려는 순진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물론 아파트 주민들이 오늘날의 아파트 주민 같이 플랑카드도 내걸고 반상회를 통해 아파트 가격도 담합을 하는 등 매섭게 대처했으면 괜찮았을 터지만, 아파트라는 주거의 개념조차 생경했던 그 당시 주민들 역시 순진했었던 것이다.
60년대 말 세운상가와 더불어 종로3가에도 낙원상가 아파트라 불리는 주상복합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낙원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을 건물 지하로 넣고, 1층부분은 기둥으로만 처리하여 차도를 내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것 처럼 재동 네거리에서 종로3가 네거리로의 숨통이 트인 것이다. 요즘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비싼 땅에 아파트를 지으며 1층을 공용도로로 내어주다니. 고층부 아파트에도 재미있는 공간이 있었다. 건물 주변으로 아파트를 배치하고 가운데는 5,6층 높이로 휑하니 뚫린 중정을 둔 것이다. 어차피 1층을 차도로 할애한 터라 아이들이 놀 공간이 없으니, 건물 안이 윙윙 울려 시끄럽더라도 아이들의 공간을 대범하게 마련해 주자는 의도였었다. 이렇듯 60년대의 주상복합건물은 공공의 이익을 충실히 지켜나간 순진한 서울의 명소였다.
이에 비하면 요즈음의 주상복합건물들은 철저하게 상업적이요 자기중심적다. 우선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게 된 경위부터가 그렇다. 말로는 직주일체형, 편리한 근린생활패턴 운운하지만, 이 주상복합건물이 개발업자에게 최대한의 이윤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주택건설촉진법에 의하면 한 건물에서 비주거용 비율이 절반을 넘고, 주거용 아파트가 1백 가구 미만이면 분양가격에 규제가 없어지고, 아파트 청약순위제 또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옛 공군사관학교 자리를 보라매 시민공원으로 남겨두는가 싶더니 어느새 여기에 주상복합타운이 생기고 너도나도 주상복합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최근 한 업체가 지상 37층 건물에 89평짜리 초호화판 아파트를 분양하기 시작했다는데 평당 분양가가 8백30만원이니 아파트 한 채에 7억4천만원이나 된다. 그야말로 임금님, 대통령도 부럽지 않을 계층이 들어가 사는 아파트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상복합건물은 세운상가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을 것이다. 입주자들은 적어도 한 건물 내에서만큼은 우리끼리, 남의 눈치보지 않고 초호화판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주변 환경을 철저하게 통제할 것이다.건물의 주거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완벽하게 차단이 되어 경비원이 있거나 무슨 신용카드 같은 것을 기계에 밀어 넣어야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입주자말고는 아무도 여기 들어올 수가 없다. 수입 자동차도 지하 주차장에 곧바로 넣으니 남에 눈에 띄지 않고, 지하수퍼에서 수입 쌀을 사서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배달시키니 이도 남에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입주자끼리는 서로 이해가 되니 상관이 없다. 그러니 건물 주위에 법으로 요구되는 녹지 같은 것도 울타리를 쳐놓고 경비원으로 하여금 24시간 지키게 할 것이 뻔하다. 근처 신대방동 「원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복합건물이니 어린이 놀이터, 노인정 등도 모두 건물 속에 들어있어 오로지 입주자 가족만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사회에 주는 것 없이 지역사회의 눈만 피하기에 좋은 것이 요즈음의 고급 주상복합건물이라면 이것은 필자의 지나친 편견일까.
*이미지출처: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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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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