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서울 압구정동 풍속도

서울의 삶터 | 2012-01-03 오후 11:23:43 | 조회수 : 4092 | 공개

겨울 밤 8시의 압구정동 거리로 가보자.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 내려 땅 위로 올라서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대백화점 건물이다. 수천개의 전구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큰 크리스마스 트리가 눈부신 빛을 내고 있다. 겨울 밤의 찬 공기와 오렌지색의 밝음이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경쾌하게 그러나 세련된 몸짓으로 트리 밑을 지나치는 젊은 남녀들이 왠지 멋있어 보인다.

동호대교 교각 밑을 지나 압구정로를 따라 계속 동쪽으로 걷는다. 찻길 왼쪽으로 현대와 한양아파트 단지가 계속된다. 70년대 들어 시작된 강남 아파트 붐의 선두주자들이다. 강북에서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어지면 나오는 허허벌판 위에 지어진 현대아파트는 1975년, 한양은 1977년 첫 입주를 시작했다. 당시의 압구정로는 이름도 없이 차먼지 풀풀 날리는 왕복 4차선 「동네길」이었고, 아파트 건너편으로는 누런 타일을 붙인 2층 「동네건물」에 복덕방, 중국집, 과일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거치며 우리는 급격한 경제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고, 우리의 압구정동의 거리 풍경도 따라 바뀌기 시작했다. 서류봉투를 들고 버스를 내리던 40대의 과장이 십수년이 지난 이제는 머리 희끗희끗한 중견간부가 되어 그랜져를 타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좋아라 먹던 막내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어 중국집 대신 들어선 커피전문점에서 홍콩 뮤직비디오를 쳐다보고 있다. 복부인들이 들락거리던 복덕방은 골프샵으로 바뀌어 그만큼 세련되어진 아주머니들을 상대하고 있다. 과일가게 자리에는 최신 유행의(?)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 1층은 옷가게, 2층은 미장원, 3층은 성형외과가 차지하고 있다.

압구정동의 거리는 밤이 되면 더욱 활기가 돈다. 네온싸인이 켜지고 줄지어 붙어서 있는 쇼윈도에서 나오는 불빛이 저마다 개성있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을 비추어 준다.

좀더 걸으면 노랗고 빨간 색의 맥도널드 햄버거 집이 나타나고, 이내 네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캐주얼한 옷을 파는 가게들이 주욱 계속된다. 대각선 방향으로는 아주 비싼 수입품만을 취급한다는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다. 같은 백화점이라도 이곳은 현대 백화점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현대 백화점은 건물 자체가 현대적인 느낌을 주고, 또 건물 앞의 번쩍거리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다소 들뜬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다. 그런데 갤러리아 백화점은 석조건물(石造建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콘크리트 건물에 석판(石版)으로 옷을 입혀 석조건물의 고전적인 맛을 내고 있다. 때가 때인지라 크리스마스 장식등을 붙여놓기는 했으되 아주 절제를 한 것도 느껴진다. 기껏해야 아치형의 입구와 건물 모서리 부분만을 전구로 장식했을 뿐이다. 어쩐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여기는 비싼 물건만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만은 아닐 성 싶다.

네거리에서 청담동 쪽으로 걸음을 계속해 보면 이제까지의 보아오던 거리 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이른바 로데오 거리. 이제껏 압구정동 거리를 메우던 오가는 행인의 발걸음이 갑자기 끊어진다. 대신 청담동과 압구정동을 향하는 차들의 빨간색 후미등만 줄을 잇는다. 네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른 수 있을까 싶은 정도이다.

그런데도 이 거리도 어둡지만은 않다. 거리 양쪽으로 늘어선 고급의류점들의 쇼윈도우에 환히 불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지나며 보아줄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전기를 아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우리 세대는 한편 조바심이 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도 잘 살게되었으니 뭐 어떠랴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 이 가게들이 불을 밝혀 놓은 것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이 고급의류점들은 밤이고 낮이고 간에 가게 앞 길을 걸어 지나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입을 옷을 팔지 않는다.

이 로데오 거리의 건물들은 거개가 다 고전주의 양식의 석조건물을 흉내내고 있다 (이것은 거리 초입 갤러리아 백화점에서부터 시작된다). 3층에서 5층 높이의 건물 2,3층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쇼윈도우를 뚫어 놓았거나 아니면 큰 간판사진을 붙여 놓았다. 왠만한 극장화면 같이 큰 사진 속에는 실물의 20배는 됨직한 미남미녀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건물 1층에 놓이게 되는 쇼윈도우가 2층 이상의 높이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여기 고급의류점들은 보행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이 거리를 오가는 부류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람들이 밤에 쇼핑을 하지는 않는다. 저녁 8시 현재 이 가게들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저 불을 밝혀 놓아 가게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낮에 다시 이 거리를 와 보면 더욱 재미있다. 낮에는 그래도 이 거리를 걸어 지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간혹 가게 쇼윈도우를 들여다 보는 이도 있다. 그런데 쇼윈도우가 높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고급 옷을 걸친 마네킹을 올려 보아야 한다. 물론 일층 쇼윈도우를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보도는 낮고 가게 건물은 약간 높기 때문에 가뜩이나 키가 큰 마네킹을 역시 올려다 보아야 한다.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키도 작아보이고, 걸치고 있는 옷도 그저 그런 옷이다. 그러니 우리가 상대적으로 왜소해 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유리벽 안에는 고급 의상과 그에 걸맞는 멋진 마네킹, 그리고 부드러운 조명. 그런데 밖에는 볼품 없는 우리들. 혹 한번쯤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옷이 있더라도 감히 가게 안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 의류점의 실제 고객인 귀부인 한명이 흰색 소나타를 타고 여기 도착한다. 밍크코트를 입은채 자동차에서 미끄러지듯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유리에 비친다. 우아한 그 모습에 내심 만족해 한다. 그리고는 눈부시듯 쳐다보고 있는 우리같은 보통사람의 곁을 무심히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귀부인은 어젯밤 차를 타고 이 가게 앞을 지나면서 2층 쇼윈도우에 새로 진열된 야회복을 놓치지 않고 보아 두었었다. 이제 자신이 그 야회복을 입고 석조건물 2층 발코니에 서서 그 밑을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내려다 보는 중세유럽 어느 성에 사는 귀족부인이 되는 상상에 빠진다. 로데오 거리의 의류점은 일상생활의 옷을 파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미지」를 판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거리를 배경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의 이미지. 2층 발코니에 선 귀족부인의 이미지.

결국, 고급의류점 건물 안과 밖에 위치한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의 심리, 벌어지는 사건들, 마네킹과 같은 소품들, 높은 쇼윈도우, 이 모두가 절묘한 상호작용을 이루어 이 건물에 들어가는, 아니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미화 시켜주고 있다. 이것은 이 가게 건물의 상업적 성격, 즉 고객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목적을 감안한다면 큰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만원이 넘는 옷이 잘 팔리는 것은 옷 그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렇듯 「건축적 연출」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찌되었든 서울의 건축은 잘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 이미지 출처: 갤러리아 백화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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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첨부파일
갤러리아 홈페이지.jpg (90K)

댓글 : 2
벨제붑   2012-01-16 09:20 [ Modify ]  [ Delete ]
정말 새로운 관점이네요. 이번 주말에 압구정동 거리를 한번 걸어봐야겠습니다.
준경   2012-01-05 11:34 [ Modify ]  [ Delete ]
압구정을 지나갈 때가 종종 있지만 늘 당연하게 여기던 풍경이었는데,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되니까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