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기술

대한인터넷방송 | 2013-04-28 오후 5:11:18 | 조회수 : 1517 | 공개

빠르게 등장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기술들은 시대를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실패한 것들이다. 하지만 업계에 끼친 영향은 선명하다. 빠르게 선보인다고 성공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들을 둘러보며 현실을  점검해보자 <  대한인터넷방송  영상사업단  제공  >. 

 


1977: 큐브(QUBE)
30년도 넘은 과거에 오하이오 콜럼버스의 TV 시청자들 몇몇은 TV의 미래를 경험했다. 바로 워너 케이블의 인터랙티브 서비스였던 큐브다. 큐브 박스를 보유한 시청자는 30개의 채널(경쟁사보다 10개 이상 많다)을 서청할 수 있었으며 특별 리모콘으로 인터랙티브 기능 몇몇도 이용할 수 있었다. 편당 지불 방식의 유료 영화를 감상하거나, 설문조사에 응답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도 있었다. 또 경매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심지어 비디오 게임도 가능했다.

큐브가 TV를 바꾸지 못했던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큐브 시범 서비스에 드는 비용이 소비자들로부터 받는 금액을 넘어섰다. 1983년 워너 케이블은 8억 7,500만 달러의 부채를 보유했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의 파트너십 연장에 실패했다..


1987: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DAT)
1987년 소니는 DAT 형식을 선보였다. 아날로그 테이프를 대체할 신기술로 각광받았다. 디지털 오디오의 음질과 쉬운 녹음이라는 혁신적인 기능을 갖췄던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실패했다.

오디오 전문가들은 DAT를 빠르게 수용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가격이 줄곧 부담스러웠다. 이후 디지털 오디오의 대세는 이후 CD가 차지했다. DAT의 보다 흥미로운 영향 중 하나는 디지털 복사를 방지하기 위해 음악 업계의 행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DAT 복사를 막기 위해 초기 DRM 기술을 이용하도록 한 법안을 제출한 이는 바로 앨 고어였다.

 


1987: 하이퍼카드 80년대 말 모든 맥 컴퓨터에는 하이퍼카드가 따라왔다. 이 프로그램은 사용자가 개인별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클릭할 수 있는 버튼에 의해 조합된 일종의 '스택'(stacks)를 구성할 수 있게 해줬다. 오늘 날의 웹 사이트와 페이지 모음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물론 하이퍼카드는 사용자 컴퓨터 내부에 국한된 것이다.

하이퍼카드는 잠시 호응을 받았지만 이 개념이 네트워크와 만나면서 컴퓨터 내부에 국한된 하이퍼카드는 빠르게 시대에 뒤쳐졌다. 이 소프트웨어 개발한 빌 앳킨슨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애플에 근무하던 시절 박스-중심적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만약 내가 썬과 같은 네트워크-중심적 문화에서 성장했다면 하이퍼카드는 아마도 최초의 웹 브라우저가 됐을지 모른다.".


1991: 필립스 CD-I
CD는 음악을 저장하기에도 좋지만 상호작용적 교육 콘텐츠나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담기에도 좋다. 이러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필립스는 CD-I 콘솔을 출시했다. 회사로서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실패했다. 필립스가 광고 공세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CD-I가 기존 게임 콘솔이나 미디어 플레이어에 대항하기에 완성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CD-I가 구현했던 기능 중 대다수는 이후 셋톱박스가 아닌 PC에서 구현됐다.


1992: 고퍼(Gopher)
1992년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게 도와주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다. 필자 또한 이 기술을 통해 대학 강좌 일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고 각종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퍼'라고 불렸던 기술이었다.

HTTP와 유사한 시기에 배포된 고퍼는 인터넷 상의 문서를 조직화하고 찾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기법이었다. FTP 브라우저와 유사한 외관으로 파일과 폴더 리스트를 보여줄 수 있었다. 1993년 이 프로토콜을 개발한 미네소타 대학은 고퍼에 대해 요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했고 사용자들은 순식간에 떠났다.

 


1993: 애플 뉴튼
뉴튼(Newton)은 시대를 너무 앞서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다. 오늘 날 뉴튼의 후계자들이 전세계를 누비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특히 아쉬움을 남기는 제품이다.

뉴튼이 실패한 이유는 한두 개가 아니다. 너무 컸고 비쌌으며 필기 인식 소프트웨어는 완성도가 부족했다. 하지만 현재의 PDA와 스마트폰은 사실상 뉴튼이 보여준 폼팩터를 이어받고 있다고 무방하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뉴튼의 필기인식 소프트웨어가 맥 OS X으로 포팅된 바 있다는 사실이다. '잉크웰'(Inkwell)이라고 알려진 소프트웨어였다.

 

 


1999: 라이브저널(LiveJournal)
블로깅과 소셜네트워킹을 결합시켰던 라이브저널이 낙오한 이유를 짚어내기는 쉽지 않다. 1999년 시작된 라이브저널은 200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기업으로도 성공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웹 2.0 시대의 거물이 되지 못했다. 추정컨텐 경영상의 오류와 지나치게 열정적인 사용자 기반 때문이었다.

2005년 무버블타입(MovableType) 블로깅 소프트웨어 업체인 식스 어파트가 라이브저널을 인수했으며 2년 후 이들은 러시아 기업 SUP에 매각됐다. 위키피디아 라이브저널 페이지를 참고하면 라이브저널에의 광고 문제로 일어났던 해프닝들을 살펴볼 수 있다.

 


2003: 데인저 힙톱(Danger Hiptop)
데인저 힙톱이 최초의 스마트폰은 아니다. 최초의 스마트폰이라는 영예는 아마도 팜 트레오에게 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데이터 힙톱은 초기 경쟁자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필자가 이를 처음 사용했던 2005년, 이 기기의 미려한 모바일 브라우저에 충격을 받았었다. 이 기기는 또 패리스 힐튼과 같은 몇몇 유명인의 사랑도 받았었으며 사용자 데이터를 클라우드에 저장하는 혁신적인 면도 보여줬었다.

 

 


2003: 프렌즈터
2003년의 그레이드 프렌딩(Great Friending)을 기억하는가? 모든 이들이 프렌즈터 친구 요청을 발송하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프렌즈터 열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프렌즈터는 아직도 있다. 2011년 프렌즈터는 일종의 소셜 게이밍 사이트로 변모했으며 아시아권에서 제법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다행인 사실은 프렌즈터가 과거의 사용자 계정 및 친구 리스트를 삭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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