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자의 역사(歷史)

기본카테고리 | 2013-10-14 오전 11:44:20 | 조회수 : 1818 | 공개

남는 자의 역사(歷史)

정 인 택

 

별 이룬 것 없이 또 한해를 보낸다는 희한에 잠시 젖는다. 왜 이 변화 없는 자리에 나는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일까? 왜 어디론가 훌훌 털고 떠나지 못하는가 하는 치기어린 생각이 예순의 중간의 나이에도 불현듯 솟아오른다.

 

그래서 세상은 애초부터 떠나는 자와 남는 자들로 나뉘어져 있는 듯하다. 떠나는 자들은 대개 남달리 큰 꿈을 품고 지금 처한 곳보다 더 넓은 곳으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남은 자들은 떠날 엄두를 못 내거나 큰 것을 향한 꿈을 포기한 채 눌러 앉아 있었다. 그래서 떠나는 자들은 대개 똑똑하고 진취적으로 보이는 반면에 남는 자들은 무기력한 듯 보였다.

 

나도 뒤질세라 떠나는 무리에 끼여 일찍 집을 떠났다. 서울에 와서 보니 과연 예측한대로 주변에는 유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지방의 노란 자위만 쏙 뽑아온 듯하다. 나는 서울에 와서도 계속 떠났다. 떠나면서 떠나는 자만이 적극적으로 새 역사를 이뤄낸다는 어릴 때부터의 신념을 재확인했다.

 

그러던 내가 세월과 함께 철이 들면서 역사는 꼭 떠나는 자만의 소유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큰일을 해낼 듯이 가족을 뒤로 버려두고 객지로 훌쩍 떠나버린 우리들의 아버지보다 묵묵히 그 가장을 기다리며 한 세월을 홀로 온갖 고생을 무릎 쓰고 자식들을 사람답게 길러낸 어머니가 자신도 모르는 새 가정의 참 역사를 일으킨 주역이란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면서 부터였다.

 

또 있었다. 1900년대 초부터 남미로 대거 이주한 일본인들이 아무도 가지 않은 농촌에 터를 잡고 s마아서 3~4대가 흐른 뒤 가장 신용 있는 이민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그래서 페루에서는 일본계 대통령까지 나오는 기적 같은 역사를 이뤄냈다. 그 덕에 동양계 농업이민의 문호가 한때 활짝 열렸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양계들은 도착하자말자 모두 도시로 뿔뿔이 떠나버려서 얼마 후 이민의 길이 막혀버린 것도 한 사례다.

남아서 한 우물을 팔 때 거기 세월이 편을 들고 결국 역사의 흔적이 묻어났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무언가 이룰 것 같았지만 그것은 잠시 빈 소리만 지르다 떠나버릴 뿐 결국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연약해 보이던 낙수조각들이 세월을 꿰어 돌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그것이 사람의 역사였다. 역사는 세월의 모음이었고 세월은 그 자리에 ‘오래 남는 자’들의 자취였다.

 

이스라엘 민화(民話)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 그루의 나무가 떠나는 꿈을 꾸고 예루살렘 언덕에 서 있었다. 첫째 나무는 떠나서 호화로운 왕궁의 보석함이 되길 꿈 꿨고, 둘째 나무도 지중해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범선의 돛대가 되길 원했으며, 셋째 나무는 역시 떠나서 큰 성전의 대들보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들은 떠나지 못했다. 첫째 나무는 남아서 보석함 대신 베들레햄 말구유통이 되었고 둘째 나무도 남아서 갈릴리 바다의 초라한 어선이 됐으며 셋째 나무 역시 남아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로 섰다.”

 

그 당시 겉보기엔 자신들의 꿈과 거리가 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남는 듯 보였지만 결국 세 나무는 끝까지 한자리에 남아 자기도 모르는 새 예수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역사의 주역(主役)들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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