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속의 협상

기본카테고리 | 2016-08-22 오후 2:10:37 | 조회수 : 1171 | 공개

              위기 속의 협상

 

1971년 8월 23일 오후 2시경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는 버스 한 대와 군경의 교전이

있었다. 곧 바로 버스 내에서 폭발음과 동시에 폭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의

무장공비로 알았으나 바로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알려졌다.

사고 후 당시 정래혁 국방장관과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일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기습 침투한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에 보복의 차원에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기획하여 ‘오류동 정보

부대’인 공군 2325전대 소속의 북파공작원 훈련을 시작하였다. 정예 31명으로 684부대를

신설하고 훈련은 영화로도 알려진 서해 무의도 인근에 있는 실미도 이었다.

북파공작원(HID: Headquarters Intelligence Department)이란 어떤 부대원인지는 군 복무

를 마친 사람이라면 잘 알려져 있는 요원들이다.

필자가 근무했던 기관의 지역본부장 재임 시 이들 북파공작원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적이 있었다.

2000년 11월 3일 북파공작원 출신 요원들이 국군정보사령부 앞에서 북파공작원들의 처우

개선과 보상요구 시위가 있었다. 이날 이 후 다음 해까지 서울 한 복판에서는 북파공작원

출신자 들이 대형 프로판 가스통에 불을 붙여 과격한 시위가 지속 되었었다. 물론 지방에서

도 소규모 북파공작원 출신자들의 모임에서 자신들의 생계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가 지속 되

었다.

2002년 6월 어느 날 보유 토지 관리인에게서 “본부장님 큰 일 났습니다. 검정색 옷을 입

은 정체불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도끼로 보유 토지 담장을 부수고 있습니다.” 라는 다급한

전화가 왔다. 대응치 말고 즉시 피하라고 지시한 직 후, 곧바로 지역시내에 소재한 정보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그들의 존재가 북파공작원 출신이니 대처를 신중히 하고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벌써 정보기관에는 포착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바로 행동에 옮기는 습관이 몸에 베여 있으니

각별히 몸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고 조언해 주었다.

현 상황을 즉시 본사 사장께 보고하였다. 당시 사장은 군 장성출신으로 북파공작원에 대해

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입장이라 시간적 배려차원에서 사장으로 두 가지만 지시하고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본사의 재가(裁可)없이 본부장이 판단하여 결정하고 시행하라는 전권

위임을 받았다. 두 가지는 사회적 무리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직원들이 다치지 않게 하라는

지시였다. 책임감이 강하게 느껴지면서 양쪽 어깨는 엄청나게 무거워졌다.

얼마 지나니 누군가가 본부장 면담 요청을 해왔다고 한다. 각 부의 부장들이 본부장실에 모

였다. 어떻게 대처 할 것이냐가 문제였다. 일부 부장들은 본부장은 피하고 지금 본부장이 외부

출장 중임을 내세워 시간을 벌면서 북파공작원 요원들을 설득하자는 의견이었다.

그 것은 아니다. 부장들은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판단한다는 사장님과의 약속을 모르고 있

다. 북파공작원들을 만나기로하고 본부장 실로 방문하라고 했다. 사실 염려되기도 하고 위

축 되기도 하면서 무슨 일로 본부장 면담을 요청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원래 민원인이 방문하면 일서서 맞이하여야한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앉

은 상태로 맞이하기로 생각했다. 본부장이 그들만큼 몸집이 크지도 않고 얼굴도 억세어 보

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앉아서 들어오는 요원들 한사람 씩 날카롭게 시선으로 제압할

판단이었다.

견장과 휘장을 요란스럽게 붙인 검정색 제복을 착용한 5명의 건장한 민원인이 도착하였다.

계획대로 앉은 상태에서 시선으로 제압했다.

그 들의 요구사항은 우리 기관의 지역본부가 보유하고 있는 해운대 해수욕장 앞의 부지를

여름 한철에 비치파라솔과 튜브 대여 장으로 무상 사용하게 해 달라는 요구였다.

보유한 토지는 해운대의 구 극동호텔 부지로 건물은 모두 철거하고 나대지이면서 해수욕장

에 접해있어서 그들은 수익사업으로 점찍어 놓았던 것 같다.

공공기관에서 보유한 토지는 적법절차 없이 무단 사용이 안 되며 문서로 타당한 사유를 기

록한 문서로 요청토록 하였다. 그러나 그 들은 막무가내다.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담보로

국가의 주요임무를 담당했던 요원들을 국가기관에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보상차원에서

사용하겠다는 강한 주장을 내세웠다. 무조건 허락을 해달라는 강압적 결론을 그들 스스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통보하고 내일 결과를 받으러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최종 책임자로써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한 결과 ‘국유지 무단 점유’ 명목으로 검찰에 고발

장을 접수하도록 총무부장에게 지시하였다. 부장 들이 펄쩍 뛴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격이라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다시 생각해야 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시간 즈음 그들이 검찰에 고발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눈에 불을 켜

고 와서는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 상대에게 위축 된 모습을 보이거나 겁을 먹으면

안 된다. 심리적으로 그들을 제압을 하여 진정시키고

본부장이 지시한 검찰 고발에 대한 의도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들 중 선

임자가 무엇인가 인지하고는 아무런 난동 없이 돌아갔다. 나의 의도대로 요원들이 따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부지를 사용하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큰 일이 없이 조용히 물

러난 사실에 직원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하면 우선 공직자로서 최소한 직무유기는 아닌 것이다. 본부장을 포함

한 관련 업무직원이 행정적인 조치에 의한 어려움은 받지 않는다. 검찰에 고발하면 즉시 사

건조사가 일어나지 않고 접수된 순서대로 피고발인, 고발인 소환 등 일련의 절차가 진행 되

는 동안 기간의 여유가 있으며 그 동안 북파공작원들도 막무가내로 저러니 물리적 충돌도

없이 그들이 목적하는 금전적 성과(成果)는 얻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상생의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검찰에 고발했던 것이다.

북파공작원들은 의리가 있었다. 여름 한 철 부지활용을 다 하고 보유 토지 울타리 원상복구

를 스스로 다 하였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 일에 알게 된 일이지

만 검찰에 고발된 그들은 벌금형으로 벌금을 내고 그 건은 마무리되었다고 들었다.

바로 이것이 성공적인 협상이다. 사회적 무리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직원들은 아무도 다치

지 않았고 북파공작원들은 비록 불법이긴 하였지만 본인들의 생계를 위한 단기적인 수익을

얻었다. 국가를 위해 위험한 업무의 군 생활을 간접적이지만 보상을 받은 셈이다.

협상은 항상 상대가 있는 법이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성과를 얻어 가는 것이 최상의 협

상인 것이다. 내 것만 주장 한다면 그 것은 협상이 아니라 결렬이 되는 것이다.

마주보고 밀고 당기고를 하지 않더라도 멋지게 격을 갖춘 공간이 아니라도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이 협상장이며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고 받아들여지면 그 것이 자연스러운 성공적인 협

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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