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슈퍼보드'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본 건축
이동언 부산대 건축학과 교수
우리나라에는 일반인들에게 건축을 쉽게 알리는 글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독자들을 위해서 간략히 건축이 무엇인가를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빗대어 설명할까 한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1990년 말부터 KBS-2TV에서 방영했던 어린이용 만화영화로 시청률 1위까지 올랐던 인기프로그램이다. 여기에는 함축적인 의미를 띠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오정, 저팔계, 손오공, 삼장법사가 바로 그들이다. 사오정은 사오정 시리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뭐라고, 뭐라칸대, 다시 한 번 말해 봐"를 되풀이하면서 대화의 내용과 관계없이 전혀 엉뚱한 대답을 즐겨하는 인물이다. 즉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잡귀들과의 싸움에서 간간이 일조를 한다. 저팔계는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는 있으나 그것은 상당히 국지적이다. 자신의 코앞에 닥친 상황만 읽을 뿐이지 더 큰 상황이라는 그림은 읽지 못한다.
손오공은 앞의 두 인물과는 달리 잡귀와 싸우는 상황 상황마다 전체적인 그림을 잘 파악하면서 싸운다. 그는 여기에다 슈퍼보드와 쌍절봉이라는 '신무기'를 소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해독력과 신무기에도 불구하고 왜 끊임없이 잡귀와 싸워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지는 않다. 즉 자신의 삶의 총체적 상황에 대해서는 근원적으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삼장법사는 자신의 삶의 총체적인 그림을 갖고 있는 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사고가 넓고 깊다. 사오정, 저팔계, 손오공의 의미는 삼장법사로부터 나온다. 이들이 하는 행위의 종교적, 도덕적 판단은 결국 삼장법사의 몫이다. 그러나 잡귀에 의하여 국지적으로 벌어지는 임기응변적인 싸움에서는 그는 속수무책이다. 그는 당하고만 있을 뿐이다.
사오정 저팔계 손오공을 넘어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기의 등장인물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건축은 적어도 '삼장법사의 사고'로부터 출발하여야한다. '넓고 깊게' 우리 삶을 맥락적 상황으로 투시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건축을 사오정 식으로 엉뚱하게 설계하고 지을 가능성이 높다.
근교의 높은 산을 올라가 부산이라는 도시와 건축을 한번 보라.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른 건물들 내지 주위의 환경과는 담을 쌓고 잘난 채 머리를 쳐들고 '뭐라고, 뭐라칸대'를 외치고 있음을 본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팔계 수준의 건축'은 더욱 찾기가 힘들다. 국지적이라도 다른 건물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건물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사정이 이럴 진데 손오공 수준으로 공간의 맥락을 그나마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건축물을 발견하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삼장법사 수준의 건축'은 아주 뛰어난 건축가의 작품으로부터 드문드문 발견된다. 건축하는 사람으로서 더 잘해야겠다는 분발감이 엄습해온다.
만약 우리가 삼장법사 수준의 건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법사로서 우리의 삶을 사오정 식으로 제멋대로 조각내어 단편적으로 그리고 즉흥적, 즉각적으로 간파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법사는 손오공과 그의 친구들과는 달리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총체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는 부처님처럼 윤회의 사슬로서 우리의 '일상적' 삶을 관조하고 있으므로 손오공의 행위가 그의 손바닥으로 흡입됨을 안다. 법사는 눈에 드러나는 현상들이나 사건들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단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이런 연유로 임시방편적이고 조건반응적인 행위는 삼간다. 그래서 손오공과 그의 친구들의 눈에는 삼장법사가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 삼장법사는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단순하게 단선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사건이나 현상들과 밑도 끝도 없이 시공간적으로 얼기설기 맞물려 있음을 삼장법사는 안다. 적어도 삼장법사 식의 건축은 '삶이 시공간적 맥락으로 응축되어 해석된 의사소통의 공간'인 것이다.
어떻게 건축적 시각을 가질 수 있나
삼장법사 식으로 우리나라를 파악한다면 우리나라란 단순히 객관화 될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속에는 수 천 수 만년 동안의 우리의 삶과 밀착되어 만들어진 시공간적 맥락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이처럼 시공간적인 맥락으로 넓고 깊게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뚜렷한 건축적 시각을 갖게 될 것이고 손오공과 그의 친구들 수준의 건축의 한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독자들에게 천리안의, 또렷한 건축적 안목을 제공하여 넓고 깊게 건축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음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를 통해 독자들이 자신들 속에 살아있는 '명쾌한 눈'을 발견할 것을 마음 졸이면서 기대한다.
'청도읍 뒷들 예비군 훈련장/교육 나온 조교, 땡볕에 지친 듯/담배물고 이서국 남방식 고인돌밑에다 /길게 오줌을 갈길 때, 오줌은 땅 밑에서/꿈틀거리는 이서국* 산과 개천을 그린다//개천을 첨벙첨벙 단숨에 뛰어 건너/이서국 부족장 큰아들, 부라린 눈에 청동검 빼어들고/압독국** 장수와 엉겨붙어 뒹군다 곰처럼./적의 침과 땀이 이마의 겨드랑에 묻어 내리고/이윽고 긴 세형동검(細形銅劍)에 찔린 적장 옆구리./튕겨나와 산당화처럼 흩어진 핏방울,/비린내 풍기며 쓰러지는, 확실한 적에게/끈끈한 애정이/고인돌에 올라앉은 조교 무료하게 거총하여/구름 봉우리 끝에 고정시킨 M16,/가늠쇠로 들어온 마네킹 하나/「통일전망대」***에서 본 북쪽 병사 얼굴/열심히 지껄이고 먹고 자고 겁도 많으나,/유효사거리만큼 비례하여 체온이 전달되지 않는/명백한 증오가 없는 만큼 꼭 같이 잔인하게 사살될//고인돌 밑에서 청동검 꺼내어 조교는 휘두르고 싶다, 적과 가까이 서로, /적의 단 입내로 적을 느끼고/적의 독기 오른 눈으로 적임을 확인하며'
*이서국: 경북 청도군 일대에 있던 고대 부족국가.
**압독국: 경북 경산군 압량 일대에 있던 고대 부족국가.
***「통일전망대」: 북한의 여러 가지모습을 보도했던 MBC-TV프로.
(서림, '靑桐劍-伊西國'(청동검-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시집 '伊西國으로 들어가다'긿2003년 아트선재미술관 펴냄, 30~31쪽)
'청도읍 뒷들 예비군 훈련장의 고인돌 밑의 오줌'에서 이서국의 부족장 큰아들의 청동검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혜안은 놀랍다. M16, 이서국, 청도, MBC-TV의 '통일전망대', 마네킹 등을 시공간적으로 하나로 묶어내는 시인의 상상은 더욱 놀랍다. 이처럼 시공간적으로 삶의 맥락을 응축시켜 사물들을 얼기설기 묶어내고 그것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통풍구를 내는 시인의 능력은 참으로 경탄할 만하다. 우리가 만약 주위의 것들을 읽어내는 이런 혜안을 갖고 있다면 사오정, 저팔계, 손오공 수준의 건축이 무엇인지 하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넓고 깊은 혜안이 신기술을 만날 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명심하여야 할 점이 있다. 사오정, 저팔계, 손오공의 능력을 단편적이고 국지적이라고 해서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중구난방의 행위도 결국은 삼장법사의 넓고 깊은 생각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삼장법사도 손오공과 그의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오정의 독나방, 저팔계의 바주카포, 손오공의 슈퍼보드와 쌍절봉을 그냥 그대로 두었다면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장법사의 넓고 깊은 혜안에 의해 이 '신무기'(high-technology)들이 빛을 발한다. 이와 유사하게 건축가의 넓고 깊은 혜안에 의해 건축공학이란 신기술도 빛이 날 것이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넓고 깊은 인간의 생각은 무엇인가'로 바꾸어질 수 있다.
[출처] 국제신문 , 이동언 교수의 '건축, 시로 쓰다' <1> '날아라, 슈퍼보드' 등장인물을 통해 본 건축 , 2010-06-21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