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전통

시와 건축 | 2012-02-02 오후 4:34:48 | 조회수 : 1586 | 공개




건축과 전통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동언
 


주위의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감성이 자극 되었을 때, 즉 일상성 속에 차단관계가 이루어졌을 때 감성이 휙- 하고 지나간다. 일상은 감성이 에포케 즉 차단이 일어나지 않고 잘 흘러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감성이 생채기 그리고 우주적 풀무와 만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진실로 포착의 순간이다. 오래된 것들 즉 생채기들이 윤회의 사슬을 박차고 나오는 절대절명의 시각이다. 시인이란오래된 것들이 무엇인가를 통해 자신의 감성과 우주의 풀무를 만나 새롭게 거듭날 때 이를 언어로 제련하는 연금술사이다.
생채기’에 따르면 건축가를 포함하여 예술가는 확실히 오래된 것들을 그 윤회의 사슬을 끊어내고 구원하는 작업을 하는 자임에 틀림없다.
// 숲에 가서 나무 가시에 긁혔다. 돌아와서 그걸 들여다본다. 순간, 선연하게 신선하다. (숲 냄새, 초록 공기의 폭발, 깊은 나무들, 싱글거리는 흙, 메아리와도 같은 하늘……) 우리는 살다가 어떻든 무슨 생채기가 날 일이다. 팔이든 다리이든 가슴이든 생채기가 난데로 열리는 서늘한 팽창…… 지평선의 숨결, 둥글게 피어나는 땅, 초록 세계관, 생바람결……//
 

생채기는 말한다
네 속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관습이여
네 속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잔인의 굴레여
피가 흐르고 있다 모든 다람쥐 쳇바퀴여
 
그렇다면 시의 언어는 우리의 생채기이니
그건 실로 우주적 풀무가 아니겠느냐

 
 예술가인 건축가는 전통, 새로움, 관습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자이다. 즉 상기의 글에 동조하는 건축가는 안다. 이 우주가 고정되고 습관적인 낡은 만남을 지속하고자 함을. “하기 위하여”라는 단기목표를 수단으로 일회적 만남을 공고히 하려 함을. 참으로 ‘서늘한 팽창’을 막는 것은 바로 ‘관습’과 ‘잔인의 굴레’, ‘다람쥐 쳇바퀴’ 등의 습성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적으로 흐르는 우리의 피다. 이 시스템적 피에 어쩌다가 차단현상이 일어나면 기의 흐름이 고이면서 우리의 삶이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차단이 일어나면 우리의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한다. 글이 산문이 되면 단기목표 또는 단견에 둘러싸여 시스템화 됨으로써 삶의 궁극적 목표가 숨어 버린다. 건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여야 할 건축의 지향점이 단견에 둘러싸여 일상이란 이름 아래 숨겨져 있다. ‘네 속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고 되뇌는 시인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결국은 관습, 잔인의 굴레, 다람쥐 쳇바퀴 등의 희생물이 되고 말 것인가 두려워한다.
 궁극적으로 건축은 ‘서늘한 팽창’을 장기목표로 하여 도구적 실천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 결합은 원인-결과의 단기 목표들과는 달리 지독히 이타적이다. 뜨거운 팽창이 아니라 서늘한 팽창이다. 이타적 사고는 진정한 지혜의 갈구이므로 서늘한 팽창임에 틀림없다. 생채기는 볼 수 있다 관습이나 잔인의 굴레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를. 위의 시에 따르면 건축의 언어는 관습과 잔인의 굴레 등을 넘어서 생채기 난 데로 열리는 서늘한 팽창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관습, 잔인의 굴레, 모든 다람쥐 쳇바퀴 등이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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