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 : 푸른솔경로당

시와 건축 | 2012-02-25 오후 6:46:05 | 조회수 : 3404 | 공개



 

건축에서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 : 푸른솔경로당



                                                                                                                                                이동언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니체는 은유에는 "죽은 은유"와 "살아있는 은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죽은 은유란 너무 오래 되어 식상하게 된, 수명이 다된 은유를 이야기하고 살아있는 은유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싱싱하고 풋풋한 맛을 지닌 은유를 말한다. 먼저 가수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가사 를 보자. "언제나 찾아오는/부두의 이별이/…/눈앞에 바다를 핑계로 헤어지나/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남자는 다른 항구로 떠나야하므로 여자와 헤어져야만 한다. 이 가사도 처음에는 살아있는 은유였다. 대중가요의 되풀이 되는 속성으로 인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공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가사는 말하자면 죽은 은유가 되었다.

 서림은 그의 시 '독한 꽃'에서 읊조린다. '이 도시에서/그녀에게 시는/ 푸른 숲이다. 이슬방울 맺히는/…/그녀에게 시는/ 둥글고 부드러운 빵이다. 폭신폭신한 이불이다/발기한 남근이다/무기이다. 약이다. 술이다/그녀는 시로 숨을 쉰다./…/한밤중 詩의 살을 뜯어먹는다./머리통부터 발바닥까지/부스러기 남김없이 아작아작 씹어/배를 채운다. 먹어도 먹어도/금새 허기지는 배를 달랜다. 속인다./詩로 덮고 잔다./그녀는 詩로 오르가즘에 오른다./…/그녀에게 詩는 황산같은/시어머니 학대에 저항하는 무기,/미친 듯 불뽐는 자동소총이다./싯퍼렇게 벼린 식칼이다. 마마보이/남편과의 불화를 견디는/신경안정제이다. 쎄고 쎈 양주이다./중년의 골수 파고드는 허무의 늪/건너가는 조각배이다. 노도 돛도 없는/가랑잎 배이다. 꿈이 없어/싸나운 꿈자리로 하얗게 설치는/그녀에게, 詩는 독한 수면제이다./싸나운 꿈을 먹고 피는/독한 꽃이다.'

 이 詩에서 은유가 싱싱하고 풋풋하고 생기 넘친다. 살아있는 은유가 북적거린다. 몇 개 예를 들어보자. 그녀에게 詩는 "둥글고 부드러운 빵이다. 푹신푹신한 이불이다." 詩의 부드러움에 대한 생생한 은유다. 그러다 다시 詩는 "발기한 남근이다 무기이다"로 강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서림의 '독한 꽃'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살아있는 은유를 체험할 수 있다.

 


기존 범위 넘어서는 상상이 필요
 

그럼 은유의 건축적 사례를 보자. 부산의 경우, 은유적으로 부산을 빗대는 것이 파도, 바람, 갈매기, 푸른색, 배 등이다. 한의원 라나베(푸른 바다 위 은빛 배 이미지), 부산전시컨벤션센터(배 이미지), 남구 문현동 시티플라자(바람 이미지), 노보텔앰배서더부산(파도 이미지의 푸른색), 자갈치시장(갈매기). 물론 이들은 부산이라는 역동적 움직임의 세계를 고착화시켜 재현(갈매기의 모습) 또는 추상(갈매기의 추상)으로 전환시킨 것들이다.

 재현이 건축적으로 전환된 경우, 이를 재현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재현을 추상화시켜 표현할 수도 있다. 재현으로나 재현의 추상으로 건축물에 표출되면서 은유가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경우 죽은 은유로 본다. 재현이나 재현의 추상이 건축과 결합하여 은유가 될 경우 당연히 죽은 은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재현이나 추상 속에 건축가의 의도나 새로운 정서가 개입되어 있으면 살아있는 은유로 볼 수 있다. 의도나 정서가 개입해 재현이나 추상을 새롭게 해석하기 때문.

 건축은 일반언어와 달라서 그 언어가 진부하게 되었을지라도 어떤 방식으로 재현화시키는가에, 추상화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파도를 건물에 은유적으로 표현할 경우 재현적 방식에 따르면 파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우는 진부한 혹은 죽은 은유로 볼 수 있으나 건축가의 의도나 우리 전통의 새로운 정서를 표현할 경우 살아있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논의할 점은 건축에서 은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서림의 '독한 꽃'에서 詩에 대한 정의가 많이 등장한다. 정의란 곧 은유다. 시는 푸른 숲, 빵, 이불, 남근, 무기, 약, 술 등이다. 다시 말해 시에 대한 정의는 무한대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건축이 시라면 건축에 대한 정의도 시에 대한 정의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시에서 시 대신에 건축을 집어넣어도 될 법하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시나 건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경안정제, 양주 등도 시로 될 수 있는데 그것들이 건축으로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전형적 건축물만 건축으로 간주해오던 우리에게 이점은 큰 충격을 준다. 건축이 수면제도, 독한 꽃도 될 수 있음은 기존의 건축적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 건축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존의 건축적 범위를 넘어서는 상상이다.

 
 

전통예술 조각보를 건물에 입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집단적 결정에 얽매여 개개인의 개성을 놓쳐버리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건축,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좁게 해석해 왔나? 거리를 나가보라. 비슷비슷한 건물이 줄을 이루고 있다. 명백한 상상력 부족이다. 양주와 건축, 신경안정제와 건축, 수면제와 건축,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라는 의문의 시대가 지나갔다. 건축이 양주가 되고, 신경안정제가 되고 수면제가 되는 그런 시대에 이제는 도달했음을 감지한다. 가령 건축이 신경안정제라면 건축이 형태상으로 신경안정제에서 유추되고 기능적으로 신경안정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하면 된다. 이 경우 건축가의 의도나 정서가 들어가면 명백히 살아있는 은유다. 이제 구체적인 작픔으로 설명해보자.

 최근 우리 것에 관한 은유적 작품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부산 건축에 나타났다. 건축에서의 '조각보'의 재현이다. 이 점에서 조서영(서원건축사사무소 대표)은 주목해야할 건축가다. 조각보는 대체 무엇인가? '조각보는 상보, 옷보, 예술보 등이 있다. 조각보는 옛날 서민들이 쓰다 남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촘촘히 바느질하여 만든 것으로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세련되면서도 색색이 조화를 이뤄낸 예술적 기량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인터넷 백과사전에서).

 건축가 조서영의 조각보 작업은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해 1회성 사건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우리 건축의 문제는 이 조각보를 건축에서 여태 다시 활성화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의 몬드리안이나 클레 등의 회화작품과 일견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100여 년 앞서 제작된 우리의 조각보가 색채구성이 보다 자유롭고 순수하다. 이미 100여 년 전에 몬드리안, 클레를 앞서갔던 우리 선조의 피는 다 어디에 갔는가? 우리 전통을 귀하게 생각하고 잠재되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 현대에 맞게끔 다시 활성화하여야 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경구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떡잎을 자세히 들어다 보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건축가 조서영의 돋보이는 상상력
 

고건축을 유심히 보면 우리 전통건축의 과거-현재-미래가 보인다는 말로 바꿔도 무방하리라. 예민하고 상상력 있는 관찰이야 말로 전통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첩경. 이런 의미에서 비록 조각보를 건축에 재현시킨 것에 불과하지만 건축은 '조각보'라는 은유를 사용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웃의 각종 알록달록한 색깔로부터 조각보를 생각해낸 건축가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경로당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조각보로 덮고 기다리는 것도 동시에 생각했단다.

 이 경로당은 상당한 쾌적감이 있다. 노인들이 지내기엔 딱 적당한 공간이다. 이러한 쾌적감에 더하여 창조적 쾌감이 있어야 한다. 창조적 쾌감은 살아있는 은유에서 일어난다. 이 작업 하나로는 그녀의 의도 파악이 어렵다. 향후 조각보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업들 속에서 건축가의 의도성이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 하나로만 보면 건축가 조서영은 적어도 상상력만은 어떤 건축가에게도 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조각보의 건축적 재현이 과연 우리 전통정서의 재창조적 반영이라 볼 수 있을까? 건축가가 조각보의 패턴을 연구하면서 평면, 형태, 매스 배열 등에의 적용 및 주변성의 반영에 지속적이면서 창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녀의 은유는 분명히 의도나 정서가 들어가 살아있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의 단계에서는 건축가 조서영의 '건축은 조각보이다'라는 전제만은 확실히 살아있는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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