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눌함의 참 서늘한 깊이-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주택
이동언 부산대 건축학과 교수
서림의 시 '내 사랑하는 국문학적 얼굴들'은 외모와 정신세계의 폭과 넓이는 반드시 서로 정비례하지 않음을 암시적으로 빗대고 있다.
'내가 다닌 대학에는 많은/국문학적 얼굴들이 있다. 그중/국어학 교수 얼굴들이 흔한 가장/고상하고 원만하고 이른바 正品이다. 그다음/고전문학 교수 얼굴들이 약간은/축 늘어지거나 모가 나거나 /그렇게 조금씩 비뚤어 졌는데,/이것도 막말로 정품에서 그리 크게/벗어나지 않는다./…/ 현대문학 교수 얼굴들은, 딱 깨놓고 말해서/이건 교수 얼굴이 아니다./짓눌려서 짜부라지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이건 참말로 /영 교수 얼굴이 아니다./… 짜부라진 현대문학적 얼굴들이/진짜 얼굴로 다가 오는 거 있지/ 나이 40 넘어서니까 그게 바로/ 내 얼굴인 거 있지, 막 껴안아주고 싶은 거 있지,/…/그보다 더한 국문학적 얼굴이 있는 거 있지,/ 그게 박재삼이나 김수영 같은 얼굴인데,/중풍병에 걸려 손을 덜덜 떠는/ 말라비틀어진 명태 같은 박재삼 얼굴이나/내 시에조차도 침을 뱉아버릴 것 같은/독하기가 왜고추 같은 김수영 얼굴이/진짜 진짜, 진짜 얼굴로 다가오는 거 있지,/막, 눈물나게, 다가오는 거 있지.'
평범한 시골집의 놀라운 오케스트라
시인은 나이 40 이후 사람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밝힌다. 그 시각 덕에 그는 안과 밖이 모순된 국문학과 교수들을 발견했다. 그는 정품 같은 첫 인상을 갖는 교수가 진짜 교수처럼 '보이고 있을 뿐'임을 에둘러 밝히고 있다. 진짜 교수처럼 보이지 않는 교수가 오히려 진짜 교수로서 시인을 감동시킴을 알 수 있다. 건축에서도, 시각이 달라짐에 따라 명품처럼 느껴지던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으로 판명날 경우 우리의 섭섭함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이 명품으로 판정났을 때 그 감격! 하물며 사람이 그렇게 될 때야말로 형용할 수 없으리라. 여기 그 감격이 있다.
얼핏 보면 보잘 것 없는 전형적인 시골이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보면 다른 세상이다. 대지는 다양한 지형적 층을 가진 곳이다. 서쪽을 보면 낙동강과 산들이 겹쳐내며 만드는 낙조가 아름다운 곳이다. 대지에 서면 멀리 낙동강 너머 김해의 산들, 강, 철로, 습지, 국도, 구릉지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은 지도상의 등고선 마냥 일정한 켜를 가지고 존재한다.
이것들은 거동하기 불편한 50대 초반, 미술을 전공한 부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축복된 경관인 것처럼 보인다. 신체적으로 어눌한 그들에게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때에 따라 상상으로 경관상 오케스트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부부는 몇 개씩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김해 산들 중 가장 큰 산이 지휘자가 된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상상적 관현악 뒤편에는 육체적으로 어눌한 50대 초반의, 부부의 기억과 꿈이 뒤섞여 있었다. 관현악, 기억, 상상, 꿈이 어우러지는 곡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곡이었다. 대지와 주위가 시공간 상으로 얼기설기 엮임으로서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말로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비 오는 날에는 이러한 음들이 낙수줄에 끊임없이 녹아내렸다. 세계를 접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낙수 소리는 바로 이 세계의 소리였다. 이 세계의 소리 뒤편에 부부의 신체상의 어눌함의 깊이가 붙어있었다. 그 어눌함으로 인해 아름다운 곡이 깊이감을 더했다.
김명건 건축가가 선물한 공간 삼중주
건축주 부부만을 위한 공간의 삼중주가 집안에서 들린다. 거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켜, 출입구-현관-복도-중정(中庭긿집안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마당)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켜, 침실-주방-식당-침실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켜, 달리 이야기하면 공적영역-중간영역-사적영역으로 결합된 공간의 3중주, 이것이 주택에서 삶의 리듬을 경쾌하게 해주는 요소다. 삶의 리듬을 경쾌하게 해주는 근본적 바탕은 바로 그들의 육체적 결함의 극복 후 경쾌감이었다. 그것은 어려움을 이겨낸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 세계에 접촉하기 힘든 그들에게 부산의 건축가 김명건(다움건축 대표)은 세상의 각종 소리를 내는 여러 개의 악기를 선사했다. 중정이라는 타악기, 낙수줄이라는 금관악기, 데크라는 현악기. 건축가는 박재삼과 김수영의 정신세계 못지않은 것을 부부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음악만으로 살 수 없는 법. 부부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사이의 동선과 공간의 활용방식에 대한 철두철미한 건축가의 분석이 뒤따랐다.
이 건물은 크게 대지의 결에 따라 방문객들을 위한 공간과 부부만을 위한 공간이란 두 가지 상이한 성격의 두 매스(덩어리)로 나뉜다. 이 매스를 나누는 것은 커다란 노출콘크리트의 벽과 중정이다. 누마루와 유리를 통해 외부로 열려 있는 전면 거실에 담기는 전경은 노출콘크리트 벽면에 의해 걸러져 후면의 주거공간에 삽입된다. 건물 앞에 펼쳐진 목가적인 풍경은 이 과정을 통해 비일상적 풍경으로 전환된다. 이런 비일상적 풍경을 시인 정현종은 '초록의 기쁨'에서 썼다.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내려오며/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왕관이 되어/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초록의 샘답게/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神殿)이다//해여, 푸른하늘이여,/그 빛에, 그 공기에/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공중에 뜬 물인/나무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하늘의, 향기/나무들의 향기!'
도심의 일상성 속에 있던 우리는 비일상적 풍경에 깜짝 놀란다. 일상성 속에 숨어있는 비일상적 풍경을 늘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일상성은 우리의 몸처럼 투명하다. 공기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다시 일상을 곰곰 생각하면, 즉 반성적 사고를 하면 일상성을 벗어나 비일상적인 것이 보인다. 노출콘크리트 벽을 기준으로 하여 좌측은 비일상적 공간형태이고 우측은 일상적인 형태다. 일상적 형태는 아무런 막힘을 주지 않는다. 비일상적 형태는 그것을 보는 시야나 촉감이 턱턱 막힌다. 한 번 더 생각나게 만든다.
시인 정현종의 '어눌의 푸른 그늘'
일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곱씹어 생각하게 됨에 따라 의미가 훨씬 깊어진다. 부부의 육체적 장애는 일상적 사고로 보면 기막힌 것이지만 곰곰이 생각을 하면 그들의 장애에서 역으로 '깊이와 넓이'를 발견한다. 시인 정현종은 '어눌의 푸른 그늘'에서 어눌 혹은 장애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예컨대 내 일터의 화원아저씨/화분을 갖다주면서/발음한 '난초'/어눌하기 짝이 없는 그 '난초' 속에서 순간/서늘하게 밝은 세상,/며칠 있다가 화초가 잘 자라는지 보러/씩 웃으면 들어오던/웃음의 그 깨끗한 빛,/어눌의 참 서늘한 깊이/그 푸른 그늘 아래 내 마음 쉬느니.'
이 주택에서 우리는 "어눌함의 참 서늘한 깊이"를 발견한다. 건축가는 일상을 곱씹어 다시 생각하는 비일상적 사고를 통해 '어눌함의 참 서늘한 깊이'를 거동이 불편한 부부로부터 눈치로 알아냈다. 그는 '어눌함의 참 서늘한 깊이'를 차용하여 주택설계 원리로 전환시킨다.
이 주택은 일상성으로 처리된 사적인 공간과 비일상적으로 처리된 공적인 공간으로 구성돼있다. 여기서 건축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발동한다.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를 어떻게 풀어내는가가 이 건축물의 초점이다. 건축가의 창조적 일이란 '유창하면서도 어떤 깊이도 갖지 않는 세상'에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 건축물에서 좌측은 노출콘크리트 벽과 대조적으로 시멘트모르타르 마감을 했으므로 참으로 어눌하다. 슬라브도 좌측은 V형도 아닌 것이 평평한 것도 아닌 것이 어눌하기 짝이 없다. 노출콘크리트 벽의 우측은 상대적으로 유창하면서 깊이가 없다. '유창하면서 미지근한 얕음'과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가 상호 짜깁기가 되어있는 건축물이다. 졸박미(拙樸美)는 바로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김명건의 건축언어는 주로 노출콘크리트 벽의 사용으로 인한 촉각적인 것이 주였는데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가 첨가 되었다. 건축가의 어눌하면서 참 서늘한 깊이가 일시적 현상인지, 더욱 깊어질지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will my husband cheat again
link what makes married men ch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