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의 시점으로 우리건축 비평하다

시와 건축 | 2012-02-09 오전 10:38:44 | 조회수 : 2834 | 공개



‘나쁜 남자’의 시점으로 우리건축비평하다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동언
 


 

‘나쁜 남자’와 ‘좋은 남자’는 동전 앞뒷면이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까칠하고 도도하고 막말까지 하는데 끌린다’라는 나쁜 남자에 대한 역설을 묘사한 글 아래 ‘나쁜 남자에 빠진 TV'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기사는 최근 히트를 친 드라마 속의 나쁜 남자들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나쁜 남자는 이기적이다. ‘파스타’의 최현욱(이선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등이 그 사례다. 독단적이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 ‘시크릿 가든’김주원(현빈) 등이 좋은 예다. 드라마 속의 나쁜 남자는 나빠도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재력이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현기준(강지환)을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사랑 따위는 안중에도 없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올인한다. 위의 공통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이기나 독단(이기와 독단은 형제이다)을 바탕으로 하여 재력 등을 지니고 있을 때 사람은 ~유아독존’(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이 말씀의 원래의 뜻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이다. 개개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존귀하다는 것이다. 개인이 존귀하기 위해서는 습관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조적 의미의 삶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습관적인 대중의 삶인 일상에서 일탈하여 실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개개인이 실존적 삶을 살 수 있을 때 내가 홀로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지역마다 지역성이 있듯이 개인마다 개성이라는 실존을 지니고 있다. 개성의 회복이 실존적 삶이자 창조적 삶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쁜 남자’도 결국 좋은 남자로 재발견 되는 셈이다.

개성의 회복이란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에서‘ ~내가 홀로 존귀하다’로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홀로 존귀하다’가 왜‘ ~잘 난 사람은 없다’는 부정형의 문장으로 바뀌었는가? 이기심이나 독단심이 지배하는 재력 등을 소유하면 할수록 저절로 나쁜 사람이 더 되어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기심이나 독단심이 좌지우지하는 지력(知力)(비평으로 넘어오면서 지력으로 넘어간다. 지는 일반세상에서는 곧 재력으로 치부하니까 말이다) 등이 습관화 되어간다. 그것은 경직화 되어간다는 말이고 창조성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나쁜 남자’가 건축비평이란 장르를 걷다

건축비평이란 무엇인가? 경직화 되어가는 ‘놈’을 말랑말랑하게 유동적인 ‘건축’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장르이다. 건축비평에 경직화 현상이 일어날수록 이기심이나 독단심에 종속된 앎이 설친다. ‘~내가 홀로 존귀하다’의 의미는 수많은 ‘나’ 중에서 나도 존귀하다는 말이지만 ‘~잘난 사람은 없다’의 경우는 자기 외에는 잘난 사람이 없으므로 이기 혹은 독단에 휘둘리는 지(知)가 될 수밖에 없다. 건축비평이 이기심 혹은 독단심에 따르는 앎에만 의지할 때 목적 잃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기 위하여’ 식의 비평은 결국 단세포적 자극-반응에 따라 움직이므로 인기에 영합하는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좀 더 대국적으로 보고 ‘ ~할 목적으로’의 시공간적 맥락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아래 독설 비평은 ‘90년대 대표건축 답사’ 행사기획자 조권섭씨의 글이다.

 

그간의 한국건축은 외국건축의 씨받이의 다름 아니다. 졸업장이 보증하는 학벌중심의 엘리트 주의가 만연하고 표절건축이 난무하는 것은 제대로 된 비평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건축이 ‘노가다문화’의 오명을 씻으려면 무엇보다도 비평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주변경관과 어울리며 그 시대의 삶과 정신을 담은 건축, 그래서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축을 찾아주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다].(경향신문 인터넷 판)

 

위의 비평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조권섭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앎에 대한 신뢰, 자신에 대한 신뢰, 등으로 똘똘 뭉쳐진 독단주의자란 사실이다.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꾼다는데 이 말은 상투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조권섭은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리가 없으므로 합리를 주기 위하여 식’은 조건반사적인 단기순익만 노리는 행위다. 단기 순익만 아닌 삶의 가치관, 집단의 가치관 등과 절충한 장기적 안목에서 ‘~할 목적으로’의 비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기심, 독단심에 종속되는 앎만을 갖고 비평해서는 안 된다. 이기 혹은 독단에 복속하는 앎의 교묘한 놀음으로 인해 ‘~잘난 사람 없다는 식’의 비평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기와 독단이 앎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사라질 때 혜안을 갖춘 앎이 나타날 것이다. 마치 사랑 따위는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하던 ‘나쁜 남자’가 어느 틈엔가 사랑에 빠져 올인 할 때,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이타적으로 전향하기 때문에 이기나 독단이 사라진다. 이때 지(知)는 혜안을 갖춘 앎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인터넷의 무명씨로부터 따온 것이다.

 

한편 김수근(1931~1986)은 한국 현대건축 1세대들이 서구 근대건축의 도시질서와 정체성 개념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에 반해 한국전통예술에서 깊이 있는 안목을 보여왔다. 즉 서구의 합리적 도식에 반발해 한국의 무정형적인 자연적인 모습들에서 건축미학을 완성해나갔다. 그의 건축은 사용자가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의 크기와 휴먼 스케일로 구성돼있다. 또한 의도된 작의성으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공간 내에서 다양한 해프닝과 놀이가 이뤄지도록 해 기능적인 것과는 다른 창조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김수근의 이런 미학은‘사이’ ‘멋’으로 표현된다....

 

조권섭에게 익숙한 조건반사적인 합리에 반해 무정형적 자연적인 모습의 건축미학, 사용자의 친밀감, 의도된 작의성, 창조적 공간, 사이, 멋 등의 어휘를 구사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건축의 이타적인 면을 안다. 그는 사랑, 고통, 죽음, 창조 등 인간의 한계에 부딪힐 때 그것 너머에 다가오는 새로운 지평이 있음을 확신한다.

 

건축, 새로운 지평을 향하여 걸어나가다

그럼 이쯤 건축비평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건축비평은 재현의 수단이 아니다. 주례사 비평, 기행문 비평, 여행안내서 비평, 리포트비평처럼 여행자 입장에서 건축물을 사실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글로 재해석 하는 행위이다. 건축설계도 역시 지금까지 지어진 건축물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3차원의 공간에 구현화 시키는 작업이다. 새로운 관점에서 건축비평과 설계는 서로 만나는 것이다. 설계가 무수히 새 지평들을 여는 것처럼 비평 또한 무한히 새 지평들을 여는 것이다. 새 지평들을 열기 위해서 무한대의 관점이 필요하다. 이 무한대의 관점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건축공학적 관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건축공학이란 수식 즉 과학으로 무장되어 있다. 건축공학에서는 대부분의 것이 수치로 환원된다.

자연현상도 우리의 삶도 움직이면서 역동적이므로 상당히 복합적이고 모순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담아가는 건축도 당연히 이러한 복합성과 모순성을 수용해야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성과 모순성은 결코 로버트 벤츄리가 이야기하는 그 복합성과 모순성이 아니다. 그는 과거로부터 무수한 기호를 인용부호와 함께 인용만 했지 그 기호를 시공간적으로 맥락화 하는 데는 실패했다. 맥락화를 위해서는 이타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생각을 이기적으로나 독단적으로 내세워 탈맥락화 시켜서는 안 된다. ‘~잘난 사람 없다는 식’의 건축은 더 이상 안 된다. 우리도 이타적인 건축으로 조금씩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홀로 존귀하다’는 식으로 주위를 살핀다면 이기심, 독단심 등이 사라질 뿐 아니라, 앎도 단견에서 장견으로 바뀐다. 즉 혜안의 앎으로 탈바꿈한다.

건축공학으로 방향을 잡고 있던 우리건축설계교육체계가 건축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고 있다. 건축공학/건축학의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건축공학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건축학은 타자화 되었다. 건축공학이 건축학에 대해 상위체형을 유지하고 있을 때 건축설계는 나아갈 길이 한정되어 있는 듯하였다. 이제 설계가 복합성과 모순성을 수용함으로써 건축이 상위체형으로 올라감으로써 나아갈 체형의 종류도 무수해졌다. 그러나 경기 탓으로 국내 설계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설계시장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았다. 선진국의 설계시장은 파고들어가기가 더 어려워진 듯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건축의 인문화 작업의 지체다. 건축비평이 왜 활성화 되지 않는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건축공학의 전문화 현상이 점점 깊어짐에 대응하여 인문학의 보편화가 건축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건축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드웨어인 건축공학은 일반인이 꿰뚫어야 할 이유가 없다. 소프트웨어인 건축학은 문화 예술의 한 분야로 문화수준이 높을수록 많은 관심을 가진다. 일반인과 전문건축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비평가의 비평이다. 그래서 건축을 상식적인 언어로 풀어야 한다. 건축의 상식화는 건축의 대중화를 초래하고 이것이 곧 시장 활성화이다. 꽁꽁 얼어붙은 설계시장을 활성화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건축비평을 활발히 하는 것이다.

설계를 하기 위해서는 설계자체의 시간도 주요하지만 설계 외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관점들을 공급해줄 과목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건축학이 공학위주의 교과과정을 지니고 있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건축비평은 이론, 역사와 맞물려 돌아간다. 이론과 설계는 필히 맞물린다. 설계가 다양성과 복합성을 띠기 위해서 이론, 비평, 역사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시장은 더욱 넓어지고 건축비평은 더 이상 ‘나쁜 남자가 아닌 백마 탄 기사’가 된다. 건축비평이 이론과 역사와 사랑에 올인 할 때다. 다시 말해 지금은 건축사를 포함하는 건축인들이 다양하고 모순된 시점들을 인문학으로부터 가져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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