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리얼팬터시(realfantasy) ‘산복도로’의 팬터시가 리얼팬터시가 되었을 때
//단지 내 몸이 이끌리는 대로/그대로 걸어가 /(나를 맡기겠어)//내 안에 모든감각이 살아나/마치 물감처럼 /woo one it down//귓가에 스치는 리듬소리에 /심장소리는 더 강하게 퍼져가/터질것만 같은 지금 이 순간/(come come) 소리질러//오늘밤은 Don`t stop the music/내가슴은 또 타오르지/점점 빠져드는 이느낌/나를 정말 미치게해//한순간 더 Don`t stop the music/밤새도록 날 춤추게 해/참을수가 없어 이대로/난 멈출 수가 없는 걸//내 작은 숨소리까지 느껴져/내 입술위로 멜로디가 움직여/헤어날 수 없는 지금 이순간/(oh oh) 소리질러//오늘밤은 Don`t stop the music/내가슴은 또 타오르지/점점 빠져드는 이느낌/나를 정말 미치게해/한순간 더 Don`t stop the music/밤새도록 날 춤추게 해/참을수가 없어 이대로/난 멈출 수가 없는 걸//Let it go Let it go //오늘밤은 Don`t stop the music/아름다운 볼륨을 따라/점점 깊어지는 이 느낌/정말 미칠 것 같아//한순간 더 Don`t stop the music/밤새도록 날 춤추게 해/참을 수가 없어 이대로/난 멈출 수가 없는 걸//(인순이의 팬타지아, 전문인용)
인간이 현실에서 팬터시가 어떤 역할을 하나 한번 보자, 습관성이 가득 차면 찰수록 팬터시에 대한 갈구가 심해진다. 이 팬터시를 현실의 세계에서 만나면 현실은 졸박해진다. 리얼리즘이 팬터시를 만나는 곳은 무의 공간이다. 리얼리즘은 말 그대로 현실주의 아닌가? 답답한 현실에 부는 바람인 것이다. 건축에서 기능주의가 왜 왜곡되었는가? 습관성이 꽉 참으로 인해 팬터시한 바람의 상실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기능이든 형태이든 맥락이든 팬터시 한 부분이 있어 현실의 애로 사항을 언제든지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현실을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방법은 팬터시를 수용하는 것 뿐이리라
통도사를 보더라도, 범어사를 보더라도 이 곳은 사찰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쉽게 팬터시에 접근할 수 없다. 팬터시는 공간에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도 유연하게 자라나므로 이처럼 팬터시로 즐길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유연성있는 마음이 건축으로 구축되며 팬터시를 마음껏 즐길 수도 있다. 우리의 전통건축의 핵심은 팬터시 이다. 서구건축을 보라. 모더니즘 후의 팬터시나 구조주의 후의 팬터시는 다시 생각할 여지인 것이다. 우리 건축의 어디를 보라. 그 속에는 팬터시가 거하고 있다. 기둥에도, 보에도, 바위에도 팬터시를 둔다. 심지어 마을 둘레를 둘러싸고 있다. 좌 청룡, 우 백호, 진산, 안산, 조산, 수구 등이 팬터시의 본원지이다. ‘밤새도록 날 춤추게 해/ 참을 수가 없어 이대로/ 난 멈출 수가 없는 걸’ 팬터시가 바로춤추게 하는 장본인이다. 리얼팬터시가 되지 않으면 상기의 기술처럼 팬터시를 통제할 수가 없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동양화는 팬터시를 리얼로 소통하는 행위라면 서양화는 리얼이 팬터시를 통제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범수의 그림은 마음이 놓인다. 그림에서 중년 아줌마의 눈에 팬터시가 거하는 것으로 보이며 현실적으로 흰 눈과 흰 입에 팬터시가 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 입을 제외하고는 50대 중반 아줌마이다. 남성호로몬의 과다 분비로 남성화되어 여성으로서는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 보인다. 딱 벌어진 어깨, 굵고 거칠은 손이 그의 이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팬터시가 거하고 있다.
팬터시가 있는 김범수의 그림은 또 있다. 조각무늬의 천이다. 밥상보와 유사하다. 사용한 색깔 등은 추상의 팬터시이면서 구체의 리얼이다, 말이 추상화이지 리얼팬터시이다. 팬터시의 수용일 뿐만 아니라 리얼이 추상을 구체적으로 잡아주고 있다. 아주 수작이다. 팬터시와 리얼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지역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입은 양복이 레디메이드의 리얼팬터시라 마음에 내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