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묘지 정문: "오 씨앗들"

시와 건축 | 2012-02-06 오후 2:42:48 | 조회수 : 2156 | 공개



유엔묘지 정문: "오 씨앗들"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동언

 
 유엔묘지 정문이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오랜 만이다. 유엔묘지 정문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 뒤편에는 육이오전쟁으로 희생당한 유엔군 전몰자들이 어른어른거리는 같다. 유엔묘지 정문은 얼핏 보기에 10대 소녀처럼 보인다. 왜일까? 아마 요즈음 흔히 이야기하는 S라인을 지닌 소녀 같은 기둥들 탓이리라. 그러다 갑자기 10대 소녀들이 무리로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엔묘지 정문은 다시 소녀들이 성인들로 된 모습들이 무수히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형상들이 수십 아니 수백으로 포개져 보인다. 유엔군의 전몰자일까? 환영일까? 새로운 형상들이 포개질 때마다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미스터리다. "오 씨앗들"이란 시 속에 답이 있었다. 정현종의 시다.
 ''발랄'이 별명인/십대/소년소녀/그들은 말하자면/움직이는 무한이에요./잠재력 무한/호기심 무한/창의력 무한/꿈 무한…/학교는 말하자면/그 무한한 것들이/맘껏 피어나고/잘 흐르고/잘 익어가게 하는 공간,/매장량을 알 수 없는/그 애들의 자발성이/빛을 발하도록/부추기는 곳/보살피는 곳/하여간/그 애들 속에 들어 있는/(투명해서 다 보이는)/씨앗들을/한없이 소중하게/보듬는/품./씨앗들/숨 쉬는 소리/들려요'
 10대 소녀 같은 유엔묘지 정문 앞에서 이 시에서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음과 같이 이 시를 바꿔쓰고 싶었다. '유엔묘지 정문은/10대 소녀들/그들은 말하자면/움직이는 무한이에요./잠재력 무한/꿈 무한…/전통은 말하자면/그 무한한 것들이/맘껏 피어나고/잘 흐르고/잘 익어가게 하는 공간,/매장량을 알 수 없는/그 정문의 자발성이/빛을 발하도록/부추기는 곳/보살피는 곳/하여간/그 정문 속에 들어 있는/(투명해서 다 보이는)/씨앗들을/한없이 소중하게/보듬는/품./씨앗들/숨 쉬는 소리/들려요/이제/씨앗들이/잠재적 형상들로 드러나요'.
 우리의 전통의 것들이 근대적 재료인 콘크리트와 새롭게 만났으나 전통적 요소의 핵심들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지붕의 선, 주신(기둥의 몸체)의 배흘림, 지붕에 콘크리트로 떡 주무르듯이 빚어진 물홈통 등. 지붕, 공포, 기둥이 콘크리트 옷을 갈아입었던 당시, 사람들은 내심 놀랐다. 씨앗들 속에 함축되어 있던 것들이 이렇게 표현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기둥 하나가 네 줄기의 다발 기둥으로 바뀔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공포는 또 저렇게 다발기둥에서 하나씩 빠져나와 마치 두 손이 전면과 측면에서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8인의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으로 바뀔 줄이야. 지붕은 콘크리트로 추상화하여 기와를 올린 것 같다. 그리고 천창은 일품이다. 우리 것과 서구 것의 묘한 결합이다. 아름다운 소녀들과 젊은 유엔군 전몰자들. 이방인 전몰자들의 햇빛 속에 화사한 웃음을 짓는 아름다운 소녀들. 전몰자들은 죽어서도 천창이 되어 소녀들을 즐겁게 하는구나.
 


잠재력 끓는 10대 모습 떠오르는 이유


 갈 길은 멀다. 지금의 정문은 다시 활성화하기의 초기단계이다. 아직은 10대 소녀에 불과하다.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통의 품에 안긴 '매장량을 알 수 없는' 씨앗들이 무수한 형상들로 변형 가능하다. 건축가 김중업이 이 정문을 만들 때 어떤 근본적인 생각을 했을까?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을 더듬어 본다.
 
 건축의 기능이나 아름다움은 모두 생활이라는 기반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좋은 건축을 위해서는 생활이라는 인간의 속성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감성과 이제까지 축적된 기술과 전통을 간파하는 단호한 지성이 필요하다. 이 양자는 건축가의 필수적인 자질인 동시에 커다란 목표가 된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공법과 자재, 공간파악 개념도 발전하였고, 시대에 따라 형상도 변해왔다. 이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건축언어이므로. 이들 가운데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새롭게 살리는가 하는 것 또한 건축가가 영위해야 할 창조활동의 근간이 된다.('한국건축가협회 수상작품집: 제1회~10회', 기문당 펴냄 1992)
 
 윗글의 요지는 전통 속에서 배양된 씨앗에서 자란 잠재형상들 가운데 당시 생활과 기술의 범주 내에 가장 적합한 건축언어를 추출해 새롭게 살리는 것이 건축가가 영위해야할 창조활동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건축가 김중업의 평생 믿음이라 볼 수 있다. 추측컨대 건축가는 한국의 전통 대문 속에 현재 및 미래의 정문의 모든 것들이 숨어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전통대문에는 정문의 모든 것들이 배태되어 있고, 달리 말하면 함축되어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현화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표현화의 완성이 과거의 완성으로 간주된다. 과거-현재-미래가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과거의 것은 현재 및 미래의 것을 함축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드러냄이자, 미래의 함축이다. 마치 현재의 나의 모습이 과거의 그것의 드러냄이자, 미래의 그것의 함축인 것처럼.
 조상이 만든 건축물 속에는 우리 고유의 혼이 있고 후손들은 이 혼을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고 확대시키고 질적으로 양질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유엔묘지 정문은 전통대문 가운데 살릴 부분은 새롭게 살리고 천창이라는 신기술을 도입하고 형상적인 측면에서 예민한 감성이 발휘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의문으로 남는 것은 정문의 높이가 인체 스케일에 비해 너무 높다는 점이다. 그가 설계한 부산대학교 인문관 역시 천정이 턱없이 높다. 이는 그의 스승인 프랑스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의 영향인 듯하다. 앵글로 색슨족의 평균신장 183cm을 기본단위로 하여 모듈을 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인의 신장에 맞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왜 그 모듈을 고집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르 꼬르뷔지에의 모듈시스템에서 어느 하나를 바꾸는 것은 바로 시스템 전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유엔묘지 정문은 아직 10대처럼 움직이는 무한이다. 잠재력도 무한하고 꿈도 무한하다. 전형적인 옛 대문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마음껏 변할 수 있다. 전통이란 과거로부터 흘러오는 또 흘러가는 공간으로서 "무한한 것들이 맘껏 피어나 잘 흐르고 잘 익어가게 하는 공간"이다. 또한 옛 것들이 "자발성의 빛을 발하도록 부추기는 곳, 보살피는 곳"이 바로 전통이다. 정문 속에 들어 있는 "(투명해서 다 보이는) 씨앗들을 한없이 소중하게 보듬는 품"이 바로 전통인 것이다. 유엔묘지 정문 속의 씨앗들에서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묵살할 수 있겠는가? 씨앗들이 또한 전통의 힘으로 싹을 틔워 발아하여 잠재형상들을 만드는 데 어찌하겠는가?
 



전통을 자신의 현대언어로 표현한 김중업


전통이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엔묘지 정문 속으로 들어가 통찰력으로 보면 아직도 형상화되지 않은 씨앗들이 수 십 만 아니 수로서 셀 수 없을 만큼 숨어있고 전통의 힘으로 잠재적 형상들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잠재형상들을 보살피는 것 또한 전통의 힘이다. 김중업은 잠재형상들을 얼마나 보았을까? 그가 보았던 것들 중 일부는 그의 생애를 통해 건축화한 것도 있고 끝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만 것도 있다. 여기서 잠재형상이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형상을 말한다. 건축가 김중업의 유엔묘지 정문은 전통대문을 모방한 재현적 추상일지라도 그 잠재형상들의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재현과 추상, 이 중에서 과연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가? 재현, 그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반면 재현적 추상이 점점 추상화되면 재현은 원래 모습을 잃는다. 재현에서 멀어져버린 추상은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 재현적 추상의 한도는 모사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데까지 추상화시키는 것이다. 재현적 형상의 상실은 곧 우리 옛것에 대한 아이덴티티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우리 옛것의 재현적 추상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유엔묘지 정문을 설계할 때 1985년에 실현된 '올림픽 조형물 및 광장'설계를 잠재형상으로 이미 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유엔묘지 정문을 바라보면서 김중업의 평생 동안의 작품들을 잠재형상들로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우리 전통의 앞으로의 흐름을 보고 싶은가? 정문의 잠재형상들을 살펴보자. 김중업의 전 생애 작품과 앞으로 그의 작품이 후배 건축가에 의해 어떤 형상들로 나타날 것인가가 알고 싶은가? 유엔묘지 정문으로 가자. 그리고 정문을 투시하여보자. 씨앗들의 싹을 틔우자. 무수한 형상들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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