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이 쓰는 가정 이야기

Essays | 2012-01-10 오후 9:49:50 | 조회수 : 2909 | 공개

* 이 글은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까지 중앙일보 칼럼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글 1

우리집도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집안에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들여놓고 산다. 소파나 냉장고 같이 덩치가 큰 것들, 또 양말이나 애들 감기약 같이 소소한 것도 있다. 마음먹고 차근차근 챙겨보면 아마도 수천가지의 물품들이 있을 것이다. 이 중에는 우리 식구가 매일 쓰는 칫솔이 있고, 일년에 한번쯤 쓰거나 말거나 할 손전등도 있다. 심지어는 결혼식 때 매었던 흰 넥타이처럼 앞으로 한번도 쓰지 않을 것도 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각기 집안 이 구석 저 구석에 잘 숨어있기 때문이다.

손전등은 거실 장식장 왼쪽 맨 밑칸에, 흰 넥타이는 안방 장롱 오른쪽 문짝 넥타이걸이 맨 안쪽에 걸려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올 봄 내 생일에 막내아이가 선물한 스킨로션이 집안 어느 구석에 숨어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내 아내는 수천가지나 되는 우리집 살림살이들을 척척 찾아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10여년전 갓 결혼하여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날 때, 마지막으로 태엽감는 자명종 시계를 이민가방에 쑤셔 넣은 적이 있었다. 이 시계가 현재 우리집 어느 설합 속에 묻혀 있는지까지도 내 아내는 알고 있을 터다.

아내나 나는 어린 시절 한옥에서 자라난 세대다. 그래서 안방 아랫목 뒤로 있던 다락에 몰래 기어올라가 거기 쌓여있는 별의별 신기한 물건들을 뒤져 보느라 한나절을 보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벼루도 있었고, 내가 돐날 신었던 고무신 한켤레도 있었다. 우리 윗 세대들은 집에 들어온 것은 무엇 하나 내다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안방 다락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보고(寶庫)였고, 아이들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또 자신으로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를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아내도 장모님의 전통을 이어받아 아무 쓸데가 없어진 것도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다락이 없다. 허드렛 것들을 쌓아둘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좋은 놀이터를 잃어버린 셈이다. 가뜩이나 무엇이든 한번 쓰고 버리는 인스탄트식 세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성장한다. 이 아이들이 후에 간직하고 물려주게 될 우리 가족에 대한 추억은 사진 몇장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글 2

아빠, 싼타 클로스가 어떻게 들어와요?

딸 아이는 아파트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게 물었다. 3년전 이맘때 우리는 10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옮겨서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 7살이던 딸은 선물을 잔뜩 가진 싼타 할아버지가 우리 몰래 들어올 굴뚝이 아파트에는 없다는 사실이 무척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살던 집에는 벽난로에 굴뚝이 있었는데 말이다.

아빠, 여기는 굴뚝이 없잖아요. 우리 아파트는 높으니까 싼타 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 썰매를 타고 날아 오셔서 여기 발코니로 직접 들어오실꺼야. 우리 발코니 문을 열어놓고 자자.

아빠, 한국집에는 왜 굴뚝이 없어요? 옛날 아빠가 너만한 시절에는 한국집에도 굴뚝이 있었단다.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방바닥 밑으로 지나서는 굴뚝으로 나갔었지. 그러니 방바닥이 따뜻했겠지? 그걸 온돌이라 부른단다. 저녁이 되면 엄마들이 밥을 짓느라 동네 굴뚝마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피어나곤 했지.... 건축을 전공한 아빠가 설명해 주어도 딸은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지난 삼십년 동안 아파트를 많이 지어 들어가 살게 되면서 잃어버린 우리 것 이 많다. 가는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이 없어지고 김장독을 묻을 땅을 잃었다. 처마와 처마가 이어지는 골목길을 잃어, 내 일곱살난 막내 아들이 대장 은 알겠는데 골목 대장은 무어냐고 물어올지 모른다. 또 낙숫물 은 어떻게 설명하랴.

아내와 나는 귀국 이삿짐을 챙기며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맞닥트릴 우리 것 들을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기우였다. 3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이들은 구슬치기할 골목길이 없어도 아파트 주차장에 그득찬 자동차 사이로 롤러스케이트를 잘도 탄다.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는 못 듣지만 에어컨 호스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이유를 궁금해 할 줄은 안다. 그런데 이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글 3

며칠 전 막내의 유치원 졸업식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었다.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읽고 있었고 비디오 기사는 그것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디오 카메라에 달린 조명등이 무대 커텐에 닿았는지 그만 커텐에 불이 붙어버렸다. 처음에는 연기만 조금 나는 것 같더니 일초도 채 지나지 않아 조그만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집 사진기사인 나는 무대 바로 앞에 앉아 있었던 터라 앞뒤 생각할 틈도 없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커텐에 붙은 불을 맨손으로 털어 껐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은 조금 놀랐고, 연기 때문에 누군가 기침을 한두번 했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졸업식은 계속 진행이 되었다.

건축을 공부한 나는 그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안다. 40평이 채 안되는 지하강당에 이백명쯤 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빼곡히 차 있었는데, 만일 불이 조금만 크게 붙기 시작했었더라면 큰일 날뻔 했다. 놀란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찾으랴, 하나 밖에 없는 출구로 뛰어나가랴 난장판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와중에 몇명쯤은 크게 다쳤을 터다.

그런데 아무도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들의 유치원 선생님들과 다른 학부모들 앞에서 기민한 판단력과 민첩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에 내심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던 내게는 김이 빠지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졸업축하 저녁을 사주면서 아빠가 수퍼맨이라 아직도 믿고있는 내 아들에게 물었다. 󰡔민기야, 아까 아빠가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었지? 왜 그랬는지 아니?󰡕 민기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응, 아빠가 사진찍다가 먼지가 많아서 먼지 털라고 그랬쟎아.󰡕 속으로 「이 멍청한 녀석..」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민기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 어른들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내 자랑이 아니요 아비된 내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지금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는 내 양손에 새삼 힘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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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5
벨제붑   2012-01-16 08:23 [ Modify ]  [ Delete ]
저도 아파트에서 자라와서 다락에 얽혀 있는 추억이 없습니다. 종종 시골 외가댁에 갈 때면 사촌들과 마당과 골목에서 늦게까지 놀곤 했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새삼 그때가 떠오르네요.
Gold Rain 님 말씀처럼 글을 읽는 내내 얼굴에 미소가 절로 생겼습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 즐겁게 시작할 수 있겠네요~
Justin   2012-01-11 15:15 [ Modify ]  [ Delete ]
글을 읽다보니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 세살된 아들이 싼타할아버지가 들어올 곳이 없고 열쇠도 없다며 저녁부터 대문을 못닫게해서 재운 후에야 문을 닫을 수 있었던 슬픈(?) 사건이 떠오릅니다. ^^
다은   2012-01-11 13:10 [ Modify ]  [ Delete ]
유치원의 영웅이셨는데... 아무도 몰라주다니ㅋㅋ
이제부터   2012-01-11 11:48 [ Modify ]  [ Delete ]
저희 집에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다락이 있습니다!! 저도 거기서 엄청 놀았는데...ㅋㅋ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Gold Rain   2012-01-11 11:35 [ Modify ]  [ Delete ]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예요^ ^
읽고 있으니 얼굴에 미소가 절로 생기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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