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삶터] 서울역

서울의 삶터 | 2011-12-29 오후 6:25:05 | 조회수 : 4730 | 공개

 
지금으로부터 육백년 전, 조선의 수도 한양은 궁궐 하나, 큰 대문 세 개, 큰 길 두 개로 시작되었다. 북악산 밑에 경복궁이 들어섰고, 그 좌우로 동대문과 서대문이, 남쪽으로는 남대문이 있었다. 두개의 큰 길 중 하나는 서대문과 동대문을 잇는 종로인데, 이 길은 청계천과 함께 서울의 동서방향의 축을 이루었다. 남북 방향으로 난 길은 육조(六曹)거리였는데 현재의 세종로이다. 요즘에는 이 길이 태평로로 이어져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원래는 경복궁 앞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종로를 만나면 끝이 나버리는 길이었다. 그러면 남대문에서 서울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길은 현재의 남대문로인데, 종각 네거리에서 광교 위로 청계천을 건너 현재의 을지로 입구를 지나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었다.

동서방향의 간선도로는 일직선으로 되어있었는데 왜 남북 간선도로는 일단 종로에서 끊긴 후 조금 비껴서 다시 이어졌던 것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남대문에서 경복궁이 곧바로 이어지는 것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일부러 한숨 죽이려고 그렇게 하지 않았나 하고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정방형의 격자로 배치된 중국의 수도 북경과는 대비가 될 만한 한양의 가로체계가 되는 셈인데, 너무 인위적인 것을 피한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서울 도심의 가로체계가 20세기에 들어 바뀌기 시작한다. 1900년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남대문 밖에 「남대문역」이 들어선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남대문과 현재의 광화문 네거리를 잇는 새로운 남북 간선도로를 내고, 이 새로운 남북축에 세 개의 대형건물을 짓는다. 조선왕조의 기운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1925년 이 축의 남쪽 끝에는 경성역사가 지어지고, 다음 해 북쪽 끝에는 경복궁을 가로막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진다. 같은 해 그 중간 지점에 경성부청 (현재의 서울시청) 건물도 들어서게 된다.

총독부와 경성역사. 이 두 건물은 준공당시 그 규모로 서울 장안을 압도했었다. 이들은 또한 일제 식민지시대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했다. 총독부 건물이 식민지 통치의 상징이었다면, 경성역사는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징용병과 위안부와 군수물자가 만주로, 남태평양을 향해 이 경성역을 거쳐 갔을까.

이렇듯 서울역은 식민시대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지켜오고 있다. 일제시대 서울 장안을 압도하던 서울역. 그러나 지금은 바로 앞의 대우빌딩과 회현고가차도, 힐튼호텔 등에 눌려 초라해 보이는 것이 조선시대를 풍미하다 결국 일제에 의해 그 기운을 잃고 말아버린 남대문과 다를 바가 없어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렇듯 역사성을 지닌 서울역만을 상상하고 그 내부로 들어섰다가는 깜짝 놀라고 만다. 우선 역사(驛舍) 정면 중앙부의 문을 들어서면 높은 천장과 굵은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지는, 한때는 아주 화려했음직한 로비가 된다. 십여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을 떠나는 사람, 도착하는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이 썰렁하게 비어있다.

옛날 매표소로 쓰이던 조그만 방들이 로비 주위에 있는데 지금은 「가출인상담소」로 바뀌었다. 하루에 가출소년, 소녀 몇명이나 여기 찾아와 상담을 할른지, 또는 요즈음의 약삭빠른 가출 소년소녀들이 과연 이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기나 할른지는 몰라도,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어리숙한 서울역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야릇해진다.

로비 정면으로는 폭이 넓은 계단이 있다. 옛날 개찰구가 있던 곳이다. 개찰구를 지나며 역무원에게 차표를 건네주면 찰깍하고 차표에 구멍을 뚫어주곤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이다. 그런 개찰구 대신 새로 난 계단 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별천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계단 끝에서부터 엄청나게 큰 실내 광장이 시작되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여기가 바로 대합실이다. 적어도 오륙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기차표를 사기도 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대합실의 대부분은 교회당에서 볼 수 있는 긴 나무의자로 가득 차있다. 그것도 가지런히 오와 열을 맞추어서 말이다.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관문에 놓여진 의자치고는 꽤나 검소(?)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호텔 로비 같은 곳에서는 부드러운 소파가 대개 「ㄷ」字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어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내주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이 딱딱하고 볼품없는 대합실 의자가 오히려 좋을 경우가 있다.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는 이 긴 의자에 사람이 앉으면 옆 사람 또는 앞뒤 사람과 시선이 맞부딪칠 염려가 없다.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부터가 피곤한 이 상황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대합실 의자는 앞뒤, 옆 사람과의 만남을 최소한으로 억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의자 근처 기둥에는 예외없이 TV가 달려있다. 볼륨을 조그맣게 줄여놓아서 사실 TV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저 무의미한 시선을 주고 있을 뿐이다. TV는 내 시선을 그런대로 고정시켜놓을 곳을 제공한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구실이 되는데, 특히 옆으로 지나치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아 좋다. 이렇듯 사람이 장시간 무엇인가를 기다려야 하는 장소에는 무심히 눈 줄 데를 많이 마련해 놓으면 기다리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이 커다란 대합실의 뒷쪽으로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소위 「식당가」라 불리워지는 곳이다. 분식집, 한식집, 햄버거 가게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음식을 파는 곳이다. 이곳은 항상 붐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배가 고프기 마련인가 보다. 하기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울역 주변, 특히 서울역에서 용산쪽으로 가는 길가에는 대중 음식점이 많이 몰려 있다.

대합실 초입 계단 건너편에도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올라가보면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대규모 백화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방금 지나온 대합실 바로 윗층이 모두 백화점 매장이 되는데, 이곳은 시중 백화점과 모든 것이 똑같다. 화장품에서부터 의류, 아이들 장난감은 물론이요, 극장에 식당가까지 다 갖추어져 있다.

대합실에서 백화점으로 올라가지 않고 밑으로 내려가보면 여기는 사우나, 전자오락실, 노래방, 볼링장 등이 나타나는데, 주위를 잘 살펴보면 세번째로 놀라고 만다. 이곳은 바로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서부역」으로 불리우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새로 생긴 대합실과 백화점이 서울역 건물 뒤에 있는 기존의 플랫폼과 철도 위에 걸쳐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새로운 「육교」 건물은 국가예산으로 철도청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민간자본을 들여와 1988년에 지은 것이다. 철도청의 입장에서야 서울 인구 30만이던 시절 지어진 비좁은 서울역사가 몇배로 커지니 좋고, 민간자본가야 서울의 도심에 땅 값을 한푼도 들이지 않고 큰 쇼핑센타 하나 지어 장사를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다. 이 「서울민자역사」는 80년대의 상업주의가 낳은 서울의 걸작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19세기말 시꺼먼 연기를 내뿜는 철마(鐵馬)가 도착하는 남대문역은 개화기의 한 사건이 되었다. 20세기의 초 일제는 광화문을 헐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기 일년전, 조선의 장엄한 남대문 코 앞에 그 보다 높은 경성역사를 짓는다. 만주로,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군수물자와 위안부와 학도병이 출발하던 곳이다.

20세기 말, 서울역은 이제 단순히 기차의 종착역이 아니다. 고속도로와 비행기 여행에 밀려 점차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게 될 즈음, 서울역은 다시 태어난다.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상업주의를 반영하듯, 식당가, 백화점을 갖춘 도심내 대규모 복합상가시설이 된 것이다. 지난 백년간 서울의 관문으로, 서울의 첫인상으로 존재해 왔던 서울역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능과 의미를 바꾸어 온 역사의 증인이다.


*이미지출처: 사진1-  sam520204님의 네이버 블로그, 사진2-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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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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