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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늘어나는 문화예술 공간
서울의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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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3 오후 11:11:06
| 조회수 :
3584
|
공개
텔리비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악인으로 박동진(朴東鎭) 선생을 들 수 있다. 이 분은 걸쭉한 음성과 구수한 입담으로 우리 고유의 노래인 창(唱)을 대중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분은 텔리비젼에 나올 때마다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망건 위에 갓을 쓰고, 한 손에는 합죽선(合竹扇)을 들고 있다.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인 셈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강이나 명산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풍류를 즐기며 시조를 읊을 때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쓰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었으리라.
우리가 음악연주회, 오페라 등의 현대판 풍류를 즐길 때 입는 복장은 그게 아니다. 남자들은 대개 짙은 색 양복 정장을 입고, 여자들은 밝은 색의 양장 차림이다. 공연 전후에 관람객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공연장 로비를 우아하게 거니는 것이 사실 멋지기는 하다. 다만 「갓쓰고 합죽선 든」 모습이 이들 무리 틈에 끼어든다면 얼마나 「이국적(異國的)」으로 보일까.
그런데 잘 믿기지 않겠지만 이 현대판 풍류의 세계에 갓과 합죽선이 다시 살아났다. 연건평 3만6천평의 「초대형 복합문화예술센터」, 「21세기의 꿈을 담는 문화의 큰 그릇」으로 지칭되며, 동양최초의 오페라하우스에 첨단 공연시설을 자랑하는 예술의 전당이 바로 이 부활의 장소이다. 서초동 법원청사와 서울검찰청 옆을 지나는 반포로에 서서 남쪽으로 우면산을 보면 길이 끝나는 곳에 산 밑자락을 막고 서 있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예술의 전당 건물 중 가장 최근에 개관된 오페라하우스 「축제극장」 건물인데 그 모양이 영낙없는 갓의 모습이다.
그러면 합죽선은 어디에 있을까? 예술의 전당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아도 합죽선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합죽선은 오페라 하우스 서쪽에 있는 음악당 지붕 위에 얹힌채 납작하게 누워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돋움을 해서 보아도 지붕 위의 합죽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군가 헬리콥터라도 타고 이 부근을 내려다 보면 이 부채꼴의 지붕이 눈에 잘 띈다. 우리는 오페라하우스 내에 진열된 예술의 전당 모형에서 이 부채꼴을 확인하고 만족해 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지만 초현대판 문화시설에서 옛날 풍류의 상징인 갓과 합죽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꽤 신선한 충격이요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땅 위에 서있는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갓은 보아도 합죽선까지는 볼 수가 없다. 온전한 즐거움은 이 예술의 전당을 공중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건축가 김석철(金錫澈)은 일년 전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갓과 합죽선의 존재는 「우수꽝스러운」 일이라고 일축해버린다. 다만 그 당시 문공부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예술의 전당 설계를 발표하면서 한국적 이미지의 갓과 합죽선을 유달리 강조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한국건축계의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석철 선생이 우리네에게는 잘 보이지도 않을 합죽선을 건물 지붕 위에 납작하게 올려 놓을리는 없다고 믿고 싶다. 그런즉 장관쯤 되는 사람만이 공중에서 볼 수 있는 합죽선을 애써 부인하려는 그 분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기실 서울의 대형 문화예술공간은 거개가 다 관 주도하에 건축되었다. 법원가라고 불리우는 8차선의 서초동 반포로가 우면산으로 막혀 끝이 나는 드라마틱한 부분에 세워진 예술의 전당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중심부 세종로에 정부종합청사와 나란히 세워진 세종문화회관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관은 예술과 문화를 제 곁에 놓고 싶어하는 것 같다. 좀더 심하게 말을 하자면 관은 소위 고급문화를 자신과 결부시켜 자신의 강압적인 이미지를 유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예술의 전당 음악당의 개관식은 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행사였고, 오페라하우스의 개관식은 노태우 대통령 퇴임 열흘전에 벌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남산의 국립극장은 유신헌법이 제정되는 1972년에 세워졌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은 3공이 마지막 위세를 떨치던 1978년에 건립되었다.
대형 문화예술공간들이 관청가에 가까이 붙어있다는 사실에도 예외가 있다. 남산 중턱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국립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지하철역이 있는 장충체육관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물론 승용차를 타고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개관할 1972년 당시 얼마나 많은 서울시민들이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인가. 그런 탓인지 이 국립극장은 아직까지도 관객 동원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민 중 과연 몇 퍼센트나 이 극장에 가 보았을까?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은 소위 고급문화의 공간이다. 뛰어난 예술감각의 소유자들만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잠실의 롯데월드 어드벤쳐는 이른바 대중문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교향악단이나 발레공연은 없지만, 경쾌한 브라스밴드 연주와 화려한 퍼레이드, 세계 곳곳의 유명한 장소를 본 뜬 거리풍경과 각종 위락시설이 잘 어울려,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고급문화공간과 대중문화공간의 차이는 각기 담고 있는 문화의 내용 또는 그 수준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롯데월드로 가는 길은 열린 길이다.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 2호선 잠실역은 지하에서 바로 롯데월드로 연결된다. 그 정도가 아니다. 잠실역에 내리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롯데월드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잠실역에서 지상으로 나가는 통로는 많이 있지만 롯데월드로 나가는 통로만이 가장 넓고 환하게 꾸며져 있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아예 손목을 잡아 끄는 격이다. 이에 비해서 고급문화공간은 대중을 「유혹」하지 않는다. 국립극장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 올 사람만 오라」는 투다. 그것도 타박타박 걸어오지 말고 승용차를 타고 미끄러지듯 들어오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20년 전에 벌어졌던 국립국장의 고고함이 예술의 전당에서도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예술의 전당의 위치는 뒤로 우면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앞으로는 법원가를 두고 있다. 시민의 삶 속에 뛰어 들어가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반면에 롯데월드는 한 건물 안에 백화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위치도 잠실 아파트 단지 코앞에 있다. 게다가 예술의 전당 근처에는 지하철역이 없다. 물론 3호선 역 중의 하나는 「남부터미널/예술의 전당」역이 있기는 하다. 이 역은 남부터미널 바로 밑에 있다. 그런데도 그 이름에 예술의 전당을 굳이 들먹거리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실제로 이 역에서 내려 예술의 전당까지 걸어가보자. 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면 그때부터 난감하다. 기대와는 달리 우선 예술의 전당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예술의 전당」역이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물어물어 예술의 전당으로 걸어간다. 성인남자의 걸음으로 20여분을 부지런히 걸어야 된다. 요즘 서울 시민에게는 도보 20분은 「永遠」의 시간이다. 마침내 우리는 예술의 전당 앞에 도착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는 없고 지하도가 하나 있어 피곤을 가중시킨다. 이것은 서울에서 가장 재미없는 지하도이다. 벽면을 대리석으로 장식한 고급 지하도이기는 하지만 약 50미터를 가는 동안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김이 빠지는 지하도이기도 하다. 서울의 다른 지하도에는 그리도 많던 지하상가가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전당 앞이니 예술가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찻집과 소규모 화랑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명동에 있었던 옛 국립극장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이 큰돈을 들여 문화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은 고맙지만, 서울시민의 삶과 밀접된 곳을 선택하는 지혜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출처: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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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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