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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 예식장
서울의 삶터
|
2011-12-27 오후 3:03:44
| 조회수 :
2623
|
공개
좀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지만 91년 현재 서울에서는 하루에 이백이십쌍이 결혼을 한다고 한다. 결혼식에는 으레 하객이 있기 마련인데 한 쌍당 백명씩만 잡아도 하루에 이만이천명이 결혼식장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결혼식이 주말에 집중되니 실제 예식장에 몰리는 하객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강남역 네거리에 있는 목화 예식장을 찾아보았다. 6층으로 된 건물에 동시에 5쌍의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5개의 예식장과 4개의 연회장을 갖추고 있다. 물론 폐백실, 드레스실, 미용실, 커피숍 등도 마련되어 있어 그야말로 결혼식에 관한한 모든 것이 한군데에서 해결이 된다.
건물 앞은 도착하는 차, 앞 쌍 결혼식을 끝내고 나가는 차들로 항시 복잡하다. 건물 입구부분도 미리 약속을 해놓고 서로를 기다리는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간신히 로비에 들어서면 바로 안내판이 눈에 뜨인다. 하나의 예식장마다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쌍의 결혼식 안내패가 붙어있다. 집 모양을 본따 만들어 놓은 안내판에 결국 모두 10개의 안내패가 상하좌우로 붙어있는 셈인데, 그 모양이 흡사 아파트에 빼곡히 들어선 닭장 같은 집을 보는 것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아래 위로 또 양옆으로 다닥다닥 붙어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까.
어디에나 그득한 하객들을 헤쳐가며 이층으로 올라가 본다. 층계 바로 앞에 조그만 로비가 있고, 그 왼쪽으로는 실제 예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예식장 안에 들어서면 화려하지만 싸구려로 보이는 불란서풍의 벽 장식과 샹들리에가 눈에 뜨인다. 요즈음 이런 식의 실내장식을 참 많이 본다. 동네 대중뷔페식당을 가도 이것을 보고, 하다못해 대중 사우나에 가보아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급문화의 대중화라는 것인가 보다.
예식장의 배치는 극장과 비슷하다. 출입문에서 가장 먼 쪽에 무대가 있고 그 앞으로 하객들의 의자가 줄지어 놓여있다. 그런데 예식장과 극장 무대가 다른 점은 예식장의 주인공 배우(신랑, 신부)는 연극(결혼식)의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관객(하객)을 등을 지고 서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연격인 주례가 하객과 마주보고 있다.
이런 식의 배치는 사실은 서양의 결혼식을 그대로 본 딴 것이다. 서양에서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서양의 신랑, 신부는 교회 제단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서서 엄숙히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신랑 신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도 (신자라면 당연히 교회에서 식을 올릴테니까) 그저 서양식으로 하다보니 이렇게 어색한 일이 벌어진다.
옛날 우리 나라의 혼례식은 이렇지 않았다. 혼례식은 으레 신부집에서 치러지는데,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한쪽으로는 병풍을 치는 것으로 훌륭한 식장이 만들어진다. 식이 시작되면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맞절을 하고, 혼례주를 나누어 마시는 등의 순서가 있다. 혼례식은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신랑, 신부를 가운데 놓고 둘러 선 채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이들을 지켜본다. 그러니 이들의 표정은 구경꾼에게 낱낱이 공개되어 나중에 놀림감이 되기도 하고, 또 신랑, 신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볼 수도 있다.
앞으로 몇십 년을 함께 울고 웃을 내 사람의 얼굴이 지금 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평소답지 않게 동백기름 바른 머리에 연지곤지 찍은 얼굴이다. 앞으로 평생 잊혀지지 않을 오늘 혼인날의 얼굴을 보며 『내 이 여인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 다짐을 해본다. 그런데 오늘의 신랑, 신부는 주례를 향해 나란히 서서 벌(?)을 서고 있다. 내 일생에서 가장 귀한 이 순간, 아름다운 나의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앞에 선 주례의 주례사가 계속 이어진다. 『신랑은 최고학부를 졸업한 영재로서....』 신랑 신부 등뒤로는 하객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이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첫번째 부류는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 형제 등 아주 가까운 친척들이다. 이들은 그래도 주례나 신랑, 신부의 뒷모습에서부터 눈을 떼지 않는다. 두번째 부류는 모처럼 모인 먼 일가친척들이다. 이들은 이런 결혼식이 아니면 좀처럼 서로 만날 기회가 없다. 그래서인지 주례사에는 관심이 없고 계속 예식장 내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세줄 건너 앉아 있는 부산 외가 오촌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조금 있으니 늦게 도착한 육촌 동생 부부가 등뒤에서 아는 채를 한다. 다시 인사를 나눈다.
예식장 안 의자가 다 차지 않았는데도 뒤편 로비에서 서성대는 부류도 있다. 이들은 거개가 다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다. 이들도 역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나누기에 바쁘다. 『야! 오랜만이다. 언제 제대했냐?』 『어머, 너 약혼했다면서?』 이들 역시 정작 결혼식에는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은 비디오 촬영기사이다. 주례 뒤로 가서 환한 조명을 비추며 신랑 신부를 촬영하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 나와 이번에는 신랑측 부모를 찍기도 한다. 원래 단상에는 주례와 신랑 신부만이 올라가 있어서 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초점이 되어야 하는데, 이 비디오 기사가 오히려 더 많은 눈길을 받는다. 무릇 사람의 눈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물체를 더 잘 인식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밝은 조명을 비추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다. 유니폼을 입은 진행보조원 아가씨도 식이 진행되는 동안 여기저기 거리낌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아가씨는 신부가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 자락을 펴주고 들어주면서 신랑, 신부 주위를 맴돈다.
그런데 이 촬영기사와 보조원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두가지 있다. 첫째로, 마치 자기들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이라도 된다는 듯, 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신랑, 신부 주위를 거리낌없이 돌아다닌다. 둘째로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표시를 가지고 있다. 촬영기사의 비디오카메라, 보조원의 유니폼들 말이다.
잘 살펴보면 이러한 일종의 소도구들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많다. 대기업의 회장이 사장단을 불러놓고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호통을 치는 자리에 푸른색의 작업복을 입은 청소 아줌마는 큰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들고 거침없이 회장실에 들어온다. 회장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전혀 신경을 주지 않은 채 한쪽 구석에서부터 쓰레기통을 비우기 시작하는데,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사장단들도 아줌마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이 아줌마는 아까 남자 화장실에도 거리낌없이 들어가 청소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보이는 사람이지만 유니폼과 소도구를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다니.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느덧 식순이 모두 끝이 난다. 이제 신랑, 신부는 팔짱을 끼고 음악소리에 맞추어 식장 통로 한가운데를 걸어 나간다. 이때만큼은 뭇 사람들의 시선이 이들 신혼부부에게로 일제히 쏠린다. 일생에서 가장 멋진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통로 길이는 고작해야 15미터. 아주 천천히 걸었는데도 15초도 지나지 않아 행진이 싱겁게 끝이 나고 만다. 신랑 입장에서 신랑, 신부 퇴장까지 모두 12분이 걸렸다.
옛날 혼례는 신부가 이제껏 자라온 정든 집, 그러나 곧 떠나야 할 집에서 치러졌다. 신랑, 신부는 이날 하루만큼은 일생일대의 최고 주인공이 되어 빙 둘러싼 손님들의 뭇 시선을 받으며 마냥 행복해 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결혼식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단순히 결혼장소를 빌려 일을 치른다. 둘이 길을 가다가 다방이 있으면 들어가 잠시 마주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오듯, 한시간여 머물다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곳, 거기서 일생의 중대사를 치른다. 그것도 축하객에게 등을 돌린 채 말이다. 바로 위층과 아래층에서도 같은 예복을 입고 같은 형식으로 다른 쌍들이 식을 올리고 있다. 오늘의 예식장은 신혼부부의 생산공장이다.
하루에 이백 이십 쌍의 부부가 새로이 생겨나는 생명의 도시 서울. 좀 더 뜻깊고 인간적인 백년가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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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삶터'는 제가 지난 1990년대 중반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칼럼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당시의 서울 상황과는 달라진 것들도 많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여기 그 씨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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