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도시계획의 비전으로 채택되는 단어가 바로 지속가능성입니다.
지속가능성은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는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정의로운 도시가 될 때, 시민의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도시는 어떻게 계획하고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정의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철학자마다 정의(justice)를 다르게 정의(define)하고 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도시계획에 맞는 정의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데 조금이나 도움이 될 것 같아 <블로거 조민기 님이 쓰신 글 입니다. 정리가 잘되 있어서 퍼 왔습니다>
참고로 국토연구원 박재길 박사님이 발표하신 "도시계획과 사회적 정의에 관한 연구"를 첨부합니다.
이 글은 2년 전, 책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에서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가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작성했습니다.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3가지 관점의 정의론 및 저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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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책을 읽고 계시거나 이미 읽으신 분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책,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인터넷 독자서평을 보면 이 책은 정의(Justice)를 정의(Define)하지 않는다는 글이 많은데요. 하지만 저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는 아주 명확하게 그가 생각하는 정의를 논하는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공동체적인 정의”가 정의의 최선이라 밝힙니다.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재미있는 가설들 뿐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흥미로운 예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나는 예를 보면,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의 가치, 징병제와 모병제, 콩팥 판매, 안락사, 해외 원정 대리모 출산, 변기 수리비로 5만 달러를 낸 할머니, 동료를 먹으며 살아 돌아온 어부들, 마틴 루터킹이 대학원을 갈 수 있었던 이유, 기부 입학, PGA의 휠체어를 탄 골프선수 경기 허용, 테러리스트인 형을 고소한 동생 등 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에서 항상 논쟁거리였거나, 그냥 지나쳤던 사건에 대해 과연 올바른 결과(정의)는 무엇인가를 같이 고민할 뿐만 아니라 저자의 결말인 공동선의 정의로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1. 정의를 규정하는 가치관, 2. 그것에 대한 반박(문제점), 그리고 3. 적용 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문제점이라 제시하는 근거 (2) 역시 정의 가치관 (1)에서 옹호할 기회를 줌으로써 문제점의 문제점을 논합니다. 이처럼 반론에 반론의 과정이 엎치락 뒷치락 하기 때문에 읽는 내내 재미있는 지적 유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포함된 정의의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공리주의 관점에서의 정의 2. 자유주의 관점에서의 정의
3. 목적론적 관점에서의 정의 4. 공동체주의 관점에서의 정의
위 네 가지 정의는 철학적인 관점이라 어려워 보이나 샌델 교수는 흥미로운 예를 가정하거나 또는 위의 예처럼 실제 일어난 일로 위 네 가지를 설명합니다.
1. 공리주의 관점에서의 정의
공리주의는 한때 많은 사랑을 받은 관점이지만 너무나 큰 그리고 발견하기 쉬운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수가 다수의 행복 때문에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개개인의 인간성 무시 또는 2. 모든 것을 단일 통화(공리)로 계량화) 이것이 그동안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는 공리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모든게 그럴 듯 하고 설득하기 쉽기 때문 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를 알면서도 그냥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예를 들어, 다수결은 진리나 상호간의 이해 타산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공리주의에서는 벤담(Jeremy Bentham)과 밀(James Mill)의 정의론을 이야기하는데, 벤담이 주장한 공리주의가 위에서 언급한 ‘소수가 다수의 행복에 희생’ 해야하는 문제점에 의해 비난받자 밀은 인간성을 존중한 공리주의로 이것을 보완 합니다. 또한 그는 공리를 저급과 고급 쾌락으로 구분하지요. 즉,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투견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공리보다는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공리를 더 높은 공리로 봐야한다는 관점입니다.
2. 자유주의 관점에서의 정의
자유주의적 관점의 정의는 크게 칸트(Immanuel Kant) 형님과 롤스(John Rawls) 형님이 말씀한건데요. 칸트 형님은 자유를 최고의 정의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철학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게 이 칸트 형님인데요. 칸트는 같은 말인데도 항상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항상 무릎을 치게 합니다. 샌델교수도 칸트의 자유주의적 정의를 이야기 할 때 그의 관점에서 문제점들을 옹호 합니다. 칸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도덕, 자유, 이성입니다. 이걸 이야기하자면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요. 그래도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도덕은 ‘끌림동기’와 ‘의무동기’로 나누며 ‘의무동기’여야 정의롭다”고 합니다. 즉, 어떤 대가를 바라고 착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 ’옳은 일을 하는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다’ 입니다.
둘째, 칸트의 자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와는 다른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딸기맛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먹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딸기맛을 좋아하는 생물학적인 요인을 갖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진정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자유입니다.
“이성에는 ‘가언명령’과 ‘정언명령’이 있으며 ‘정언명령’이 정의롭다” 할 수 있습니다. 정언명령이란 ‘내 행동의 원칙’인데요, 이 원칙이 또한 보편적 법칙이어야 정언명령이 성립합니다. 칸트의 유명한 말인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처럼 자유는 자유인데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해도 보편적 입법의 원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성인군자 같은 이야기죠.
칸트는 천재여서 이처럼 완벽한 자유주의적인 정의를 성립하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이 문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를 강조하면서 또 다른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샌델 교수 역시 이런 완벽한 법칙 속에서 행동할 일반인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이것은 너무 힘든 자유(?)를 강요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칸트는 그가 말한 것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롤스는 칸트와는 조금 다른 자유주의적 정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인 정의론에서 자유는 자유인데 그 이전에 무조건적으로 평등한 조건이 바탕이 된 이후의 자유가 정의롭다고 밝힙니다.
저자는 이것을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강남구 학생이 강북구 학생보다 수능 점수가 1점 높다고 좋은 학교에 가야 하는 건 평등치 못하다라는 관점입니다. 저자는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예를 들어, 진보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강남구에 사는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옳바르다는 다른 관점의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사고의 유연함을 보여줍니다.
롤스 정의의 핵심은 정의로운 사회계약입니다. 즉, 이런 원초적 평등을 전제로 자율과 호혜, 이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회 계약만이 정의롭다고 정의합니다. ‘만약 자동차가 망가졌는데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와서 차를 고쳐줬을 경우 수리를 받은 사람은 보상을 해줘야 하는가’라는 명제를 던짐으로써 계약에 있어 합의가 작동할 수 있는 두가지 조건인 자율과 호혜를 재밌게 설명합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텔로스(telos, 목적)에 의해 정의를 바라봅니다. 텔로스는 플룻(flute)은 음악을 잘하는 사람을 위해 생겨난 것이기에 이것은 잘 부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목적론으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런 목적론적 근거 아래 정의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줄 수 있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목적론적 관점의 정의론의 문제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범했던 오류처럼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예는 노예로 태어났고 여성은 정치적으로 열등하기에 그 목적에 맞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텔로스가 적합하다라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기인한 상당히 위험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정의는 본성에 맞는 역할을 사회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 입니다.
4. 공동체주의적 정의
샌델교수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공동체주의라는 용어는 저자가 어느 학자와 공동으로 만든 말이라고 하네요. 정의를 논할 때 연대 의무나 소속 의무를 빼놓고는 정의를 논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실제 미국의 한 정치인이 테러범인 형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는 것은 이런 소속 의무 때문이고 이는 비난 받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서사적 관점에서 정의를 논해야 하는데요, 만약 어느 한 일본인이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죄는 단순히 과거 조상의 잘못이고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을 위해 보상을 할 의무가 없다라고 말을 했을 때 인간은 서사적 존재라는 관점에서 위의 일본인은 단순히 자신과 과거를 분리하려는 시도이며 그것은 자신과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일 뿐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주의란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상관 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공동선(공동체주의)의 관점에서 정의는 시장의 도덕적인 한계를 인식한 정부가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부의 재분배가 아닌 부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걷어 공공기관과 공공서비스를 일으킴으로써 부자와 빈자 모두가 그것을 똑같이 이용할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와 공리주의에서 항상 논란되었던 종교 문제도 공동선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최근 공정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여론과 맞물려 우리 사회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여러 사회 현상을 모두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 책은 그것을 생각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기 때문에 이처럼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유명환 장관 딸의 공무원 특채 채용 사건이나 한겨레 신문의 ‘신정환을 위한 변명’ 같은 글도 이 책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게 되고 정말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지, 저같은 일반인도 그 누구의 말처럼 아테네 학당에서 그 유명한 철학자와 토론하듯이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